최근 실시된 NCF(National Center for Fathering)의 조사에 따르면 다섯 명의 자녀들 중에 두 명은 아버지가 퇴근하기 전에 잠든다. 또한 이 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72.2%가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위기를 자녀 교육에 있어 아버지 역할의 부재를 지적했다. 이 같은 가정에서 아버지들의 영향력 상실은 세대 간에 신앙이 전수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인 “아버지와 자녀간의 대화”를 증발시켜 버리는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이 비극은 세대차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차이까지 존재하는 이민자 가정의 1세 아버지들과 2세 자녀들 사이에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일찍 이민 온 1.5세든지,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든지 간에 시간이 갈수록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어 간다. 자녀들은 미국에서 교육 연수가 늘어감에 따라 영어가 급속히 편해지고 반대로 한국어 구사능력은 급속히 떨어진다. 더구나 자녀가 사춘기가 될수록 감정을 읽고 반응하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게 요구되지만 모국어가 다른 부모가 자녀의 감정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양질의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결국 이민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나누는 대화라는 것은 고작 “오늘 저녁 메뉴 뭐야?” “신문 좀 갖다 줄래?” 등 서로간의 필요만 나누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여기서 좀 더 심해지면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메모지에 글을 써서 교환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지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기도 한다. 현대 이민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자신의 출세보다 자녀의 보다 나은 미래인 경우가 많다. 보다 가정다운 가정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넌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생각지도 않던 언어와 문화의 차이라는 기대치 않은 복병으로 자녀와 대화가 막히고 남남이 되어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민의 선택 자체를 후회하는 부모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처럼 자녀와 대화의 벽을 느끼는 아버지들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교회는 이런 갈증으로 고민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가? 아버지의 날을 맞아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먼저 통하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PRTI(P: Perspective 시각변화, R: Respect 상호존중, T: Transparency 투명성, I: Initiative 주도권)를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자녀와 성공적인 대화를 점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Perspective)을 교정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자신을 바라봄에 있어서는 아무리 자녀와 대화가 심하게 막혀 있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말의 변화처럼 자녀가 아버지의 변화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더구나 아버지의 말의 변화가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이 된다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 얼음 같던 자녀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굳게 닫힌 입술이 열린다. 어떤 장애물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변화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는 한 자녀와 진실한 대화가 시작되기에 늦은 시기란 없다.
한편 자녀를 바라봄에 있어서는 “자녀는 나의 소유”라는 환상을 일찌감치 깨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자녀는 18년간만 (때로 어떤 자녀는 이 렌트 기간이 좀더 길어져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나의 품에 두고 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빌려 주신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이런 시각만 있으면 나와 자녀 관계에 혁명이 일어난다. 비록 자녀로 인해 지치고 힘든 일이 있다 할지라도 자녀가 곁에 있는 하루하루가 특권처럼 감사하게 느껴진다. 또한 부모로서 미숙함과 부족함이 많이 느껴진다 할지라도 내가 적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고 맡겨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에 자녀 양육에 있어 여유와 자신감이 생긴다.
둘째, 자녀와 질 높은 대화를 위해서 서로 존중 (Respect)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여기서 특별히 존중해야 될 부분은 상호간의 문화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자신의 유년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 교육 환경 속에 성장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꾸중 할 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버릇없이 어른 앞에서 눈을 부라린다고 야단이 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지적하고 있을 때 공손함을 표시하기 위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가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또한 한국 가정에서는 부모가 말할 때 중간에 끼어들어 질문을 하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지만 학교에서는 주관이 뚜렷한 학생으로 오히려 영웅시되는 분위기다. 이런 문화의 차이를 존중해서 자녀가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그 아이의 입장에 서서 헤아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1세 부모와 2세 자녀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서로간의 모국어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 간 대화의 간격을 더욱 크게 벌여놓는 주범은 문화 차이로 인한 말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1세 아버지의 대화 스타일에는 한국적인 문화가 깊이 배어있다.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고 관계중심적인 유교문화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집단주의문화(Collectivistic Culture)가 강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언어 습관에도 이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대화시 중요한 것은 정보의 전달보다 사람과의 관계이다. 그래서 1세 이민자들은 말할 때 상대방의 기분과 감정을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눈치, 침묵, 제 삼자를 통해 돌려 말하기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2세의 말하는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개인주의와 실용주의 문화(Individualistic and Pragmatic Culture)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하기는 언제나 이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감정과 관계를 고려하기보다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가장 큰 의미를 둔다. 이와 같은 차이로 1세 부모와 2세 자녀의 대화에 오해와 불신이 발생한다. 관계를 중시한 나머지 나의 말이 자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고민하면서 돌려 말하기를 선호하는 아버지를 미국에서 자라난 자녀들은 헤아리기 어렵다. 오히려 자식의 눈치를 살피고 삼자인 엄마를 통해 돌려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빠가 비겁하고 솔직하지 않게 비춰진다. 반면 아버지들은 자신의 깊은 속을 헤아려 주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자기주장만 일삼는 자녀가 도전적이고 버릇없이 느껴진다. 이런 서로간의 오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차이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처음에는 좀 낯설지라도 상대방의 스타일에 나를 맞출 필요가 있다.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이슈라 할지라도 돌려서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하지 않아야 한다. 직접적으로 말하더라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온유하고 친절하게 말하는 습관을 지속하면 자녀도 오히려 훨씬 잘 경청하게 된다.
셋째 진실한 대화를 위해서 투명성(Transparency)이 생명이다. 아버지들은 자녀 앞에서 완전해 지려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 자녀는 결코 완전한 아버지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진실한 아버지를 기대한다. 물론 어릴 때는 아버지를 완전한 자로 믿는다. 하지만 사춘기의 시작으로 비판적인 사고가 발달하면서 아버지의 반복되는 실수를 목격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대단한 착각 속에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연약함(vulnerability)을 감추는 아버지는 신뢰를 잃는다. 반대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보여주는 아버지가 용기있고 진실한 아버지로 인정받는다. 오늘 당장이라도 실천에 옮겨 최고의 효과를 볼 수 있는 투명성이 녹아 있는 대화의 방법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실수했을 때 자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주저하지 말라. 한국 아버지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권위가 손상을 입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잘못해 놓고도 사과를 주저한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잘못을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자녀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했을 때 사과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잃게 된다. 부모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자라지 못한 자녀는 남에게 잘못하고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녀에게 사과함으로써 자녀에게 사과를 가르치라. 둘째 자녀에게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말을 주저하지 말라.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녀의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라. 물론 아이가 알았을 때 지나친 걱정과 혼란이 몰려올 경제적, 진로적 어려움을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적절한 선에서 지혜롭게 상황을 솔직하게 오픈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아빠가 나를 믿어 준다는 뿌듯한 긍지와 나도 아빠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지고 친밀감이 깊어진다.
넷째 아버지는 대화의 주도권(Initiative)를 가져야 한다. 자녀와 대화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아버지가 적극적인 해결사로 뛰어들지 않는 한 해답이 없다. 자녀가 먼저 찾아와 사과하고 문제를 풀어주겠지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물론 아버지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대화가 막힌 자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화가 막혀 있는 상태에서 자녀가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거절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물러서 있으면 안 된다. ‘말을 해도 무반응, 무관심이면 내 자존심은 어떻게 되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당장은 묵묵무답일지라도 사랑어린 자상한 말로 먼저 다가오는 아버지를 고마워하지 않을 자녀는 없다.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좋은 결과로 보상받게 된다.
교회는 자녀들과 대화가 단절된 채 외로운 중년을 보내고 있는 가장들을 위한 사역에 눈을 떠야 한다. 미주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인교회들은 자녀와의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고민하는 아버지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역을 통해 교회 성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 사회적 성취를 위해 가정을 희생하고 앞만 바라보고 달려오다가 뒤늦게 가족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이제는 어떻게 다가설지 몰라 주저하는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있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을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계발해 나가야 한다.
추천할만한 방법으로는 자녀와의 관계의 회복을 염원하는 아버지들을 위한 정기적, 지속적인 기도모임과 독서모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성공적인 자녀양육의 노하우에 대한 필요는 불신자 아버지들에게도 동일하게 느끼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 모임에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를 초대하면 전도의 전초 기지적인 소그룹이 될 수 있다. 또한 2세 자녀들의 문화와 언어의 습관의 이해를 돕는 세미나 역시 아버지들의 자녀와의 관계와 대화를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한 인간의 인생의 계절에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정체성의 혼란(Identity Crisis)을 겪는 두 번의 시기가 있다. 첫번째 혼란기는 갑작스러운 육체의 성장으로 혼란이 몰려오는 청소년기다. 그리고 두번째 혼란기는 사회경제적 지위, 자녀교육 등 모든 인생의 과목에서 중간 성적표를 받아보며 인생의 한계를 직시할 수밖에 없는 중년기이다. 그런데 공교로운 사실은 이처럼 위기를 경험하는 중년기 부모들의 자녀들의 나이 또한 위기를 경험하는 청소년기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일촉즉발의 위기를 통과하는 두 세대가 한 지붕 밑에 사는 마냥 불안한 부정적인 시기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위기의 두 세대를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넣어주신 것은 특별한 계획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나의 불확실함과 연약함을 통해 자녀의 연약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 시각을 가진 다면 이 시기는 아버지와 자녀간 최대의 갈등기가 아니라 인생 최고의 상호이해의 시기가 될 수 있다. 죽도록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겸손만을 무기삼아 나간다면 반드시 자녀의 닫힌 마음과 입이 열리게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힘든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참는 사랑과 인내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깨닫게 하신다. 자녀와의 갈등으로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아버지는 인생의 실패자나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과정이 당장은 힘들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장기적인 인생의 안목으로 바라 봤을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되는 인생학교를 통과하고 있는 가장 가치있고 생산적인 시간이다. 희망을 갖길 바란다. 그리고 동시에 부담과 책임을 갖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않으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6)
이돈하 목사는?
그는 트리니티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 석사(MA), 박사 과정(Ph.D. Candidate)을 마치고 8월부터 포틀랜드 벧엘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 기고는 그의 학술 논문 “이민사회의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 향상 방법(Ethnic Identity Formation of Second-Generation Korean-American Adolescents and Its Influence on Communication with Their Fathers)”에 근거하고 있다. 이 논문은 다문화교육학회 (Multi-Education Society)의 기관지인 MER(Multi-Education Review)의 2011년 최우수작으로 선정, 출판된 바 있다.
특히 이 비극은 세대차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차이까지 존재하는 이민자 가정의 1세 아버지들과 2세 자녀들 사이에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일찍 이민 온 1.5세든지,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든지 간에 시간이 갈수록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어 간다. 자녀들은 미국에서 교육 연수가 늘어감에 따라 영어가 급속히 편해지고 반대로 한국어 구사능력은 급속히 떨어진다. 더구나 자녀가 사춘기가 될수록 감정을 읽고 반응하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게 요구되지만 모국어가 다른 부모가 자녀의 감정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양질의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결국 이민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나누는 대화라는 것은 고작 “오늘 저녁 메뉴 뭐야?” “신문 좀 갖다 줄래?” 등 서로간의 필요만 나누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여기서 좀 더 심해지면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메모지에 글을 써서 교환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지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기도 한다. 현대 이민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자신의 출세보다 자녀의 보다 나은 미래인 경우가 많다. 보다 가정다운 가정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넌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생각지도 않던 언어와 문화의 차이라는 기대치 않은 복병으로 자녀와 대화가 막히고 남남이 되어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민의 선택 자체를 후회하는 부모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처럼 자녀와 대화의 벽을 느끼는 아버지들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교회는 이런 갈증으로 고민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가? 아버지의 날을 맞아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먼저 통하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PRTI(P: Perspective 시각변화, R: Respect 상호존중, T: Transparency 투명성, I: Initiative 주도권)를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자녀와 성공적인 대화를 점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Perspective)을 교정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자신을 바라봄에 있어서는 아무리 자녀와 대화가 심하게 막혀 있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말의 변화처럼 자녀가 아버지의 변화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더구나 아버지의 말의 변화가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이 된다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 얼음 같던 자녀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굳게 닫힌 입술이 열린다. 어떤 장애물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변화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는 한 자녀와 진실한 대화가 시작되기에 늦은 시기란 없다.
한편 자녀를 바라봄에 있어서는 “자녀는 나의 소유”라는 환상을 일찌감치 깨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자녀는 18년간만 (때로 어떤 자녀는 이 렌트 기간이 좀더 길어져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나의 품에 두고 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빌려 주신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이런 시각만 있으면 나와 자녀 관계에 혁명이 일어난다. 비록 자녀로 인해 지치고 힘든 일이 있다 할지라도 자녀가 곁에 있는 하루하루가 특권처럼 감사하게 느껴진다. 또한 부모로서 미숙함과 부족함이 많이 느껴진다 할지라도 내가 적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고 맡겨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에 자녀 양육에 있어 여유와 자신감이 생긴다.
둘째, 자녀와 질 높은 대화를 위해서 서로 존중 (Respect)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여기서 특별히 존중해야 될 부분은 상호간의 문화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자신의 유년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 교육 환경 속에 성장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꾸중 할 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버릇없이 어른 앞에서 눈을 부라린다고 야단이 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지적하고 있을 때 공손함을 표시하기 위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가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또한 한국 가정에서는 부모가 말할 때 중간에 끼어들어 질문을 하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지만 학교에서는 주관이 뚜렷한 학생으로 오히려 영웅시되는 분위기다. 이런 문화의 차이를 존중해서 자녀가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그 아이의 입장에 서서 헤아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1세 부모와 2세 자녀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서로간의 모국어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 간 대화의 간격을 더욱 크게 벌여놓는 주범은 문화 차이로 인한 말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1세 아버지의 대화 스타일에는 한국적인 문화가 깊이 배어있다.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고 관계중심적인 유교문화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집단주의문화(Collectivistic Culture)가 강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언어 습관에도 이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대화시 중요한 것은 정보의 전달보다 사람과의 관계이다. 그래서 1세 이민자들은 말할 때 상대방의 기분과 감정을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눈치, 침묵, 제 삼자를 통해 돌려 말하기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2세의 말하는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개인주의와 실용주의 문화(Individualistic and Pragmatic Culture)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하기는 언제나 이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감정과 관계를 고려하기보다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가장 큰 의미를 둔다. 이와 같은 차이로 1세 부모와 2세 자녀의 대화에 오해와 불신이 발생한다. 관계를 중시한 나머지 나의 말이 자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고민하면서 돌려 말하기를 선호하는 아버지를 미국에서 자라난 자녀들은 헤아리기 어렵다. 오히려 자식의 눈치를 살피고 삼자인 엄마를 통해 돌려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빠가 비겁하고 솔직하지 않게 비춰진다. 반면 아버지들은 자신의 깊은 속을 헤아려 주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자기주장만 일삼는 자녀가 도전적이고 버릇없이 느껴진다. 이런 서로간의 오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차이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처음에는 좀 낯설지라도 상대방의 스타일에 나를 맞출 필요가 있다.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이슈라 할지라도 돌려서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하지 않아야 한다. 직접적으로 말하더라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온유하고 친절하게 말하는 습관을 지속하면 자녀도 오히려 훨씬 잘 경청하게 된다.
셋째 진실한 대화를 위해서 투명성(Transparency)이 생명이다. 아버지들은 자녀 앞에서 완전해 지려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 자녀는 결코 완전한 아버지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진실한 아버지를 기대한다. 물론 어릴 때는 아버지를 완전한 자로 믿는다. 하지만 사춘기의 시작으로 비판적인 사고가 발달하면서 아버지의 반복되는 실수를 목격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대단한 착각 속에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연약함(vulnerability)을 감추는 아버지는 신뢰를 잃는다. 반대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보여주는 아버지가 용기있고 진실한 아버지로 인정받는다. 오늘 당장이라도 실천에 옮겨 최고의 효과를 볼 수 있는 투명성이 녹아 있는 대화의 방법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실수했을 때 자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주저하지 말라. 한국 아버지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권위가 손상을 입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잘못해 놓고도 사과를 주저한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잘못을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자녀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했을 때 사과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잃게 된다. 부모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자라지 못한 자녀는 남에게 잘못하고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녀에게 사과함으로써 자녀에게 사과를 가르치라. 둘째 자녀에게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말을 주저하지 말라.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녀의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라. 물론 아이가 알았을 때 지나친 걱정과 혼란이 몰려올 경제적, 진로적 어려움을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적절한 선에서 지혜롭게 상황을 솔직하게 오픈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아빠가 나를 믿어 준다는 뿌듯한 긍지와 나도 아빠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지고 친밀감이 깊어진다.
넷째 아버지는 대화의 주도권(Initiative)를 가져야 한다. 자녀와 대화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아버지가 적극적인 해결사로 뛰어들지 않는 한 해답이 없다. 자녀가 먼저 찾아와 사과하고 문제를 풀어주겠지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물론 아버지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대화가 막힌 자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화가 막혀 있는 상태에서 자녀가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거절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물러서 있으면 안 된다. ‘말을 해도 무반응, 무관심이면 내 자존심은 어떻게 되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당장은 묵묵무답일지라도 사랑어린 자상한 말로 먼저 다가오는 아버지를 고마워하지 않을 자녀는 없다.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좋은 결과로 보상받게 된다.
교회는 자녀들과 대화가 단절된 채 외로운 중년을 보내고 있는 가장들을 위한 사역에 눈을 떠야 한다. 미주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인교회들은 자녀와의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고민하는 아버지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역을 통해 교회 성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 사회적 성취를 위해 가정을 희생하고 앞만 바라보고 달려오다가 뒤늦게 가족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이제는 어떻게 다가설지 몰라 주저하는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있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을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계발해 나가야 한다.
추천할만한 방법으로는 자녀와의 관계의 회복을 염원하는 아버지들을 위한 정기적, 지속적인 기도모임과 독서모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성공적인 자녀양육의 노하우에 대한 필요는 불신자 아버지들에게도 동일하게 느끼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 모임에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를 초대하면 전도의 전초 기지적인 소그룹이 될 수 있다. 또한 2세 자녀들의 문화와 언어의 습관의 이해를 돕는 세미나 역시 아버지들의 자녀와의 관계와 대화를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한 인간의 인생의 계절에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정체성의 혼란(Identity Crisis)을 겪는 두 번의 시기가 있다. 첫번째 혼란기는 갑작스러운 육체의 성장으로 혼란이 몰려오는 청소년기다. 그리고 두번째 혼란기는 사회경제적 지위, 자녀교육 등 모든 인생의 과목에서 중간 성적표를 받아보며 인생의 한계를 직시할 수밖에 없는 중년기이다. 그런데 공교로운 사실은 이처럼 위기를 경험하는 중년기 부모들의 자녀들의 나이 또한 위기를 경험하는 청소년기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일촉즉발의 위기를 통과하는 두 세대가 한 지붕 밑에 사는 마냥 불안한 부정적인 시기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위기의 두 세대를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넣어주신 것은 특별한 계획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나의 불확실함과 연약함을 통해 자녀의 연약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 시각을 가진 다면 이 시기는 아버지와 자녀간 최대의 갈등기가 아니라 인생 최고의 상호이해의 시기가 될 수 있다. 죽도록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겸손만을 무기삼아 나간다면 반드시 자녀의 닫힌 마음과 입이 열리게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힘든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참는 사랑과 인내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깨닫게 하신다. 자녀와의 갈등으로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아버지는 인생의 실패자나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과정이 당장은 힘들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장기적인 인생의 안목으로 바라 봤을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되는 인생학교를 통과하고 있는 가장 가치있고 생산적인 시간이다. 희망을 갖길 바란다. 그리고 동시에 부담과 책임을 갖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않으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6)
이돈하 목사는?
그는 트리니티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 석사(MA), 박사 과정(Ph.D. Candidate)을 마치고 8월부터 포틀랜드 벧엘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 기고는 그의 학술 논문 “이민사회의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 향상 방법(Ethnic Identity Formation of Second-Generation Korean-American Adolescents and Its Influence on Communication with Their Fathers)”에 근거하고 있다. 이 논문은 다문화교육학회 (Multi-Education Society)의 기관지인 MER(Multi-Education Review)의 2011년 최우수작으로 선정, 출판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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