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평양대부흥 1백주년을 맞이해 대부흥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교단과 단체마다 의미있는 행사를 개최해 1백주년을 기념하는 한편, 다가올 대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흥이 ‘진정한 대부흥’보다는 ‘구호를 위한 대부흥’에만 그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단체마다 난무하는 과시성 집회와 천편일률적인 기도집회만으로 과연 대부흥이 재현될까? 본지는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 라이즈업 코리아 이동현 목사를 초청해 현 한국교회의 대부흥 운동에 관해 의견을 들어 보았다. -편집자 주

대담자: 김준형 편집국장/ 정리 신유정 기자
대담일시 : 2007년 2월 21일 오후 2시
장소제공 : 서울 논현동 예맥 화랑

지금의 대부흥운동, 역사적 고찰 선행돼야

-아직은 이른 감이 있지만 현재 한국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부흥 운동에 관해 세 분의 평가 내지는 소감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박종화 : 2007년에 대부흥을 재현하자는 취지는 좋은데 정작 1907년에 일어난 평양대부흥에 관해서는 그 역사적 평가나 과정에 대한 고찰이 너무 미흡합니다. 1백년 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회개와 부흥의 물결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배경이 있었단 이야기죠.

대부흥을 외치는 분들은 많지만 이 대부흥이 왜 1백년 전에 발생했는지, 1백년이 지난 오늘 왜 필요한지를 논하는 분은 찾기 힘듭니다. 그렇다 보니, 대부흥 운동이 전 교회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일부 지도자들만 중심이 되는 운동이 되어 버렸고 정작 부흥의 주체가 될 교인들은 “1907년의 평양대부흥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동현 : 박 목사님께서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날 당시 한반도는 민족사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주권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억압당한 조선인들의 가슴에 엄청난 한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갈망으로 이어진 것이 평양대부흥이었습니다.

물론, 선교사와 목회자, 장로의 진실한 회개가 있었지만 몇 명의 지도자들이 회개했다고 갑자기 일어난 운동은 아닙니다. 우리 민족 안에 응축돼 있던 갈망이 지도자들의 회개를 계기로 표출된 것입니다. 결코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한국교회는 대부흥이 마치 집회 한번 하면 열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박종화 : 그런 점에서 1907년의 대부흥은 민족적 위기에 처한 한민족 모두가 갖고 있던 영적 갈망이 기폭제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부흥이 일어난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 역사적 상황과 선배들의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애쓰고 계신 관계자 분들께는 실례가 되는 표현이지만 지금의 대부흥 운동은 일종의 ‘쇼’같은 느낌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2007년 대부흥 운동이 이벤트로 시작해 이벤트로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표피적 부흥만 좇지 말고 역사적 반성과 고찰을 통해 이 시대에 부흥이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승구 : 맞습니다.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찰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당시 믿음의 선배들이 이룩한 업적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무래도 상황적인 이해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1907년의 대부흥은 사람들이 전략적으로 이룬 것도 아니고 우리 민족의 열망만으로 이뤄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부흥의 역사적 의미는 마땅히 근원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역사라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추진하는 대부흥 운동이 당시 상황에 대한 고찰이나 평가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나타난 대부흥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면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가 고려해야 할 1907년의 특징적 사건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 송경호 기자

박종화 : 1907년이 왜 한민족에게 중요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흥이 불붙기 전인 1905년에 조선은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잃었습니다.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총체적인 민족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1902년에는 영국이 한반도의 일본 접수를 승인했고 1905년 미국 역시 일본과 밀약을 맺고 일본이 한반도를 접수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온 국민이 정신적 공황상태 또는 영적,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당시 한민족들은 조선땅을 찾은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일본의 압제에 대항해 우리를 구원해 주리라는 낭만적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선교사들일 뿐이었지 선교사에게 외교관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 일제치하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는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안창호 선생이 평양 네거리에서 선교사와 마찰을 빚은 것도 이러한 국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고 평양대부흥을 전후해 미국 선교사들은 이같은 오해를 풀고 한민족과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것이 선교사의 회개 운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동현 : 미국은 1905년 일본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고 일본의 한국 침략권을 인정했는데 이 조약을 맺기 전인 1882년에는 한국과 한미 수호조약을 맺은 바 있습니다. 한미 수호조약에서 미국은 한국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당할 때 개입해서 조정하거나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1903년 원산 창전(創前)교회에서 열린 각 교파 합동기도회에서 자신의 선교가 효과가 없었던 이유는 한국인에 대한 백인으로서의 우월 의식과 자만심에 있었다고 회개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하디 선교사 개인의 회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암묵적으로 허락한 것에 대한 미국인 선교사로서의 회개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소수였던 기독교, 진리로 사회적 리더십을 이끌다

-1907년의 대부흥에 앞서 1903년 원산대부흥부터 일어난 회개의 물결은 선교사와 한국인 간의 영적 화해의 물꼬를 텄다는 말씀으로 정리가 됩니다. 대부흥이 개인적 측면의 회개보다는 역사적, 사회적 갈등의 해소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대부흥의 특별한 의미를 찾아 본다면 어떨까요.

박종화 :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이유는 하나님께서만 아실 겁니다. 부족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분석해 보자면 1907년 대부흥은 다양한 계기와 의의가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무력하고 신뢰할 수 없었고 사회적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기독교는 극소수인의 종교였지만 사회적 리더십을 이끌었습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의 결과는 1919년 3.1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수인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어떻게 대부흥을 일으키고 민족적 운동까지 주도할 수 있었을까? 당시 기독교는 사회구성원들 안에 있는 민족 구원, 통전적 구원에 대한 갈망을 끌어 안고 있었습니다.

1907년의 부흥을 ‘누가 무슨 회개를 했다’는 식의 단선적인 측면에서만 논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집단적, 민족적 현상의 분출이 다양한 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선교사들과 러시아, 미국, 영국에 걸었던 기대치가 절망으로 변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함이 한국인의 마음에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또 당시 기독교는 사회적, 개인적 구원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 있는 역동적인 교인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교회 구성원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인 천민과 아녀자들이었습니다. 주도적인 인물이 교회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또 구원을 받고자 하는 갈망이 엄청났습니다.

이런 역사적 비판 없이 교인들이나 목회자들 대부분이 1907년의 부흥을 개인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역사학자, 사회학자, 신학자가 다 모여서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반성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동현 : 매우 중요한 접근 방법을 박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이 우리를 지배할 정도로 강한 나라로 발전했다는 것도 충격이었습니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은 사회적 위기와 연결된 ‘갈급함’ 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갈급함이 있습니까? 현재 한국사회는 국민 모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송경호 기자

이승구 : 지금 한국교회가 1907년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본받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1백년 전 우리 선배들은 소수자였고, 따라서 스스로를 의지하거나 스스로가 이 사회 속에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역시 스스로의 힘을 의식하고 과시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907년의 그 ‘작은 무리들’도 긍휼히 여기셨고 그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으며, 민족사적인 기여도 하게 하셨습니다. 아마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성도들이 많음을 자랑하고 힘을 의식하고 그것을 과시하며 숫자와 힘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비기독교적인 생각을 하는 듯합니다. 참 대조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작다 여기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움의 손길을 베푸십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지식이 부족하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는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너무 많은 종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의 근본적 과제가 생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기념, 현재는 반성, 미래는 준비해야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대략 현재 한국사회 역시 1907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영적 갈급함과 사회적 위기가 증폭돼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승구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박종화 : 중요한 질문입니다. 대부흥을 외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1백년 전 그 땅에 일어났던 부흥을 지금 이 땅에 ‘동일한 형태’로 재현하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시대착오적 발상입니다. 사회적 토양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먼저 1907년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정신을 기념하고 그 이후 1백년의 시간 동안 우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대 그리고 앞으로 올 시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또 2007년에 일어날 부흥의 주역, 부흥의 대상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합니다. 저도 기성세대 중의 한 사람이지만 이 시대 일어날 부흥의 주역은 이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기성세대의 패러다임에 맞춰서 양적 증가, 양적 성장의 의미로서의 ‘부흥’을 외치고 있을 뿐 새로운 세대가 바라는 부흥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도자가 원하는 부흥만 말하지 말고 이 시대 사회 구성원들이 바라는 부흥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이승구 : 다음 세대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한국교회의 큰 과제 역시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들을 기독교 진리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사회와 세계의 모든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부흥의 초석이 아닐까요?

▲이동현 목사(라이즈업 코리아) ⓒ송경호 기자

이동현 : 평양대부흥에서 한국교회가 본받을 점은 교회가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고 반응을 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1907년과 똑같지는 않지만 2007년 한국사회도 정세가 불안하고 국민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에 대해 지혜롭게 반응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아예 무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평양대부흥은 사회적 위기에 고통 받는 국민들의 영적 갈망을 교회가 끌어안는 데에서 시작됐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 사회의 위기, 또 그에 고통 받는 사회구성원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 외치는 부흥이 사회와 너무 거리가 먼 교회만의 운동이 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박종화 : 그렇습니다. 현재 한국교회 교인들 중에는 사회를 이끄는 중추적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기독교의 정신을 실천하는 이들을 발견하기는 힘듭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신앙인들이 기독교 정신을 자신이 종사하는 일터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삶 따로 신앙 따로’의 이분법적인 삶이 아니라 실천적인 신앙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부터 실천적인 신앙을 가르치고 교육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사회적 위기가 생길 때마다 이념적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신앙은 모든 체제나 이념을 초월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신학적 반성 없이 기존체제에 동화되면 안 됩니다. 신학적 반성 없는 부흥은 자칫 체제의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회적 현상을 편협하게 바라보면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 주기는커녕 편협한 사고 안에 갇히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안을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화(和)하되 같아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승구 : 조금 전에 박종화 목사님께서 “신앙은 모든 체제나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신앙이 그 어떤 이념이든지, 이념의 노예가 되거나 이념에 사로잡히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 어떤 이념에 묶여 있지 않다는 기독교의 본질적 개념을 회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 교회의 ‘위기’는 한국교회가 진정한 기독교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했지만 기독교는 그저 우리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종교는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1907년의 대부흥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경계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민족주의에 갇힐 수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을 민족사적 사명에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낼 때 교회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한국 교회는 다음 세대의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앞으로 이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위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대개 한국교회가 이제는 선교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투자하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에는 여전히 인색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학생들을 잘 훈련시키고 육성할 수 있는 재원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동현 : 두 분의 지적과 같이 기독교인임을 자청하는 이들, 특히 젊은이들 중에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심이 깊은 차세대 지도자를 기르지 못한다면 기독교가 사회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기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청년들을 신앙 안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입시전쟁이라는 현실과 타협합니다. 최대한 학업에 지장이 없는 한도에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청년사역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방법을 몰라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먼저 학부모와 학생 모두에게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의 토대 위에서 공부에 매진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면 아이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도전에 지혜롭게 응전하는 교회 돼야

-천편일률적 집회나 행사보다는 교회가 사회의 아픔을 적극 껴안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 사회 곳곳에서 신앙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 부흥을 감당할 후세대를 양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는 사회 안에서 리더십을 잃고 각종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도전들에 대한 대처도 필요할 듯 합니다.

박종화 : 맞는 말이지만 세상에서 어떤 도전을 하더라도 교회가 이에 당황하고 충격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안티 기독교의 공격이든 기독교 반대 움직임이든 어떤 도전이라도 환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토인비는 “역사를 이끄는 두 수레바퀴는 도전과 응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대한 도전에 응전하면서 교회 역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무조건 도전을 막으려고 애씁니다. 중요한 것은 도전이 아니라 이에 대한 ‘응전’입니다. 예를 들어, 도올이 구약을 폐지하자고 주장한다면 구약이 왜 필요한지 깊이있게 재점검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찮은 도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다양한 도전에 대한 준비가 덜 됐다는 반증입니다.

교회 지도자들부터 세계를 알고 자신의 전문 분야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다양한 학문과 사유를 통해 세상의 도전에 놀라서 중심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도전을 기초를 더 튼튼히 다지는 기회로 삼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이동현 : 저 역시 박 목사님의 지적처럼 비전문가들이 기독교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막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기독교에 반하는 움직임이 일어날 때마다 무조건 비난하고 이를 막으려고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기독교의 폐쇄성이 안티 기독교를 양산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너무 경직된 나머지 사회로부터 이른바 ‘왕따’ 당하는 신세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비전문가들이 기독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친다면 기독교에서는 “정통은 이런 것이다”하고 설명해 주면 될 것입니다. 반대세력들의 공격을 오히려 정통 기독교를 알리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부흥은 하나님으로부터, 겸손과 신실한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2007년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박종화 : 한국교회는 2007년을 맞아 1907년의 부흥을 기념함과 동시에 지난 1백년 동안 우리가 선배들의 정신을 잘 이어왔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이 역사적 반성이 없이는 어떤 운동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과거를 통한 반성을 충분히 했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7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데 다가올 2008년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10년 후 1백년 후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1907년이 1백주년을 맞았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철저하게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동현 : 박 목사님께서 지적해 주신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부흥을 너무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흥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땅에 다시 부흥을 허락하신다면 그 부흥은 어떤 형태가 될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대부흥은 몇 명의 부흥사가 이룰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 땅의 영혼들 안에 끓어 넘치는 갈망이 있어야 하고 그 갈망을 하나로 묶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몇 번의 집회로 성령의 불이 지펴질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1907년의 대부흥은 어디까지나 밑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2007년에 대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난다면 분명 그것 역시 위로부터의 운동이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운동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민족과 이 시대를 위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자들, 그들의 뜨거움이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하나로 연합될 때 이 땅을 흔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승구 : 저 역시 부흥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가 나왔지만 1907년의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였습니다. 부흥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버리길 바랍니다.

대신 주께서 은혜로 주신 1907년의 부흥을 감사하는 운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시대의 기독교 정신으로 회귀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야지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여러가지 폐단만 발생할 것입니다. 각 시대마다 은혜를 조작하고 부흥을 인위적으로 일궈내려고 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문제가 발생한 적도 많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이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경계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가 진정한 기독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1백년 전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 은혜에 반응해 한국교회 부흥에 기여했던 우리의 선배들에게도 감사를 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잊고 우리가 부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이 생각하며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도 무시하고 우리의 선배들도 무색하게 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처럼 우리도 그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지향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