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학의 보수와 진보’는 각 진영에 속한 신학자들에게 그 신학의 정체성을 묻는 기획 인터뷰다. 각 인터뷰는 서로에게 ‘지피’(知彼)이자 ‘지기’(知己)가 될 것이다. 개념상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보수·복음주의 신학은 보수신학으로, 진보·자유주의 신학은 진보신학으로 통칭했다.

지난 두 번에 걸쳐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박형용 박사, 총신대학교 총장 정일웅 박사 등 보수신학자들을 인터뷰했다. 이젠 진보신학을 살펴볼 차례다. 전(前) 한신대 총장 주재용 박사(78)를 10일, 그가 소장으로 있는 서울 동자동 경건과신학연구소에서 만났다. 주 박사는 한신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문제연구위원 등을 지낸 대표적 진보신학자다.

주 박사는 먼저 집고 넘어갈 게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대개 진보신학을 자유주의신학으로 이해하지만 이 둘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게 주 박사의 지적이다.

“한국의 진보신학은 자유주의신학이 아니다. 자유주의신학은 18세기 말 칸트에 영향을 받은, 인간의 이성을 지극히 강조한 일종의 극단적 신학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방대한 ‘교리 조항’으로 대치시켰던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반대했음에도, 성경에 나타난 기적까지 합리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엄밀히 말해 한국에는 이런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진보신학은 무엇인가.

“신정통주의다. 극단적 자유주의신학에 반기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했던, 칼 바르트나 에밀 부룬너 등의 신학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결코 극단적이지 않으며,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다원주의적이지도 않다.

신학은 항상 새롭게, 현재적으로 기술돼야 한다. 신학사상은 가변적이다.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은 시대적, 사상적 배경 하에서 재해석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다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진보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자유주의’ 비판은 보수 신학과의 대립에서 얻은 오명
당시 ‘급진적’이라던 성경 해석, 지금은 통합측도 지지


-보수 교계에서는 한국의 진보 신학을 보통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비판한다.

“과거 보수 신학과의 대립 속에서 얻게 된 오명이다. 장로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적 분위기에서 진보신학자들의 ‘성서 고등비평’ 등은 급진적 신학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축자영감설, 축자무오설을 믿고 있던 한국교회는 당시 세계적 신학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서비평주의자들을 무조건 자유주의신학자들로 매도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 장로교 신학을 주도했던 박형룡 박사는 그의 책 ‘근대기독교 신학난제선평: 학파편’에서 소위 정통신학 이외의 모든 신학을 자유주의신학 범주에 넣었다. 여기에는 칼 바르트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신학은 자유주의신학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축자무오설은 성경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성경을 교리로 우상화하는 것이다. 진보신학자들은 이것을 비판했다. 신학연구는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점에서 ‘급진적’이라는 말을 듣게 됐나.

“가령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가 아니라는 해석 등이다. 당시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비롯한 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모세가 그 저자라 해서 ‘모세오경’이라 불렀는데 진보신학자들은 이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모세만이 아닌 여러 저자가 존재하고, 그들이 기록한 문서가 다섯 권으로 합해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JDEP 문서설’이다. 이러한 해석이 당시에는 비판을 받았지만 지금은 예장 통합의 신학자들조차 이것을 지지한다.

또 하나의 대표적 사건이 1934년 있었던 ‘아빙돈 단권 성경 주석’ 사건이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자들이 개신교 선교 50주년을 기념해, 당시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출판사였던 아빙돈의 ‘아빙돈 단권 성경 주석’을 번역한 일이 있었다. 이 책은 다소 진보적인 고등비평을 수용했지만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경 주석서였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가 이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 책을 이단서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소속 목사들을 심문하면서 그들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일부는 사과했지만 송창근, 김재준 박사 등이 이를 거절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고백 부분도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진보신학자들은 이 부분이 유독 마태복음에만 실렸고 특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베드로라는 것에서, 후대 로마 가톨릭이 이것을 임의로 성경에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수장인, 베드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여성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성경 해석을 시도했다.”



진보 신학, 성경의 언어 되살리기 위해 필요

-그런 진보신학은 왜 필요한가.

“성경의 언어를 되살리기 위함이다. 누구나 성경을 읽지만 누구나 은혜를 받는 건 아니다. 성경의 언어가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가려면 소위 ‘동일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처한 지금 이곳의 상황이 성경의 상황과 같다고 느낄 때 그는 비로소 성경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읽기란 과거를 통해 오늘을 보는 것이 아닌, 오늘의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나는 이것을 성경의 역사화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은 각각의 역사 속에서 그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결코 시대와 역사를 떠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군가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간다면, 그것은 그가 십자가 사건에서 지금의 자신과 연결되는 어떤 고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고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동일한 십자가 사건에서 아무런 신앙적 의미도 찾을 수 없다. 그에게 그것은 그저 과거에 있었던 객관적 사실에 불과하다. 성경을 단순히 믿으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보신학의 역할이라 한다면, 성경과 오늘의 개인을 잇는, 고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역사를 통해 볼 때, 기독교 신학은 항상 대화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와 세계 사이에서 일어난 대화였다. 따라서 신학은 이중으로 발전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신앙공동체의 내적 표현과, 교회가 존재한 그 시대의 사상적 반영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언제나 새로운, 신(新)신학이어야 한다. 시대는 늘 새롭게 변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도 책으로서의 성경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강조했다.

새로운 신학으로 항상 개혁된 교회만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과거 우리에게 전해준 신학은 선교사들의 신학이지 우리의 신학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전해 준 신학을 참고로 이 땅의 삶과 상황에 맞는 우리의 신학을 창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신학은 살아 있는 신학이 된다.”

진보와 보수는 각자의 역할 분명… 존재 이유 지켜야
한상렬 목사의 일방적 북한 두둔, 평화통일의 길 될 수 없어


-보수신학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진보신학을 한다고 해서 보수신학을 우습게 보거나 그것을 나쁜 것으로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 서로 관점이 다를 뿐이다. 진보신학이 보수신학에 없는 것을 갖고 있다면 그건 보수신학 역시 마찬가지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전도와 교회 성장이다. 일반적으로 전도열은 진보보다 보수가 더 강하다. 보수의 신학은 즉각적 어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은 힘을 얻는다. 다만 극단적 보수, 극단적 진보에는 반대한다. 무엇이든 극단으로 치우치면 반드시 그 폐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보수의 전도열을 말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한국에서 진보신학을 대표하는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교회 성장과 관련된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 나는 기장의 존재 이유가 교회 성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 성장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독재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까지 기장이 걸어온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다시금 발견하고 오늘날 기장의 위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교회 성장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교인 수의 증가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에는 반대한다. 교인 수의 증가는 선교의 결과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기장이 교회 성장을 위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남한에서 독재는 사라졌고, 민주화도 큰 진보를 이뤘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진보신학, 진보교회의 동력은 다했다고 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다른 유형의 독재가 있고, 비민주주의적인 것도 많이 있다. 민주화는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결코 완성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사회는 여전히 부패해 있다. 척결해야 할 많은 사회악들이 존재한다. 인터넷에만 들어가도 쉽게 그런 뉴스들을 접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부분에서 진보신학이 말하는 사회구원을 설명하고 싶다. 보수의 개인구원과 진보의 사회구원, 이것 역시 관점과 역할의 차이다. 흔히 보수는 개인의 구원이 완성되면 그들이 모인 이 사회 역시 구원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유토피아적 이상에 불과하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진보가 말하는 사회구원은, 사회 구조의 개선을 뜻한다. 예를 들어보겠다. 지금의 세법 하에서는 기업이 정당하게 이익을 얻을 수 없다. 어느 정도 탈세를 해야 이익이 되는 구조인데, 그러자면 정치권에 자금을 대야 한다. 일종의 탈세 무마용이다. 이 자금을 끊으면 세무조사가 들어온다. 개개인의 변화만으론 선을 이룩할 수 없는 구조다. 이런 구조를 뜯어 고치자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크리스천이다.”

-진보신학의 사회참여를 말하면서 통일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최근 한상렬 목사의 무단방북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통일하자는 데 진보 보수가 따로 없다. 문제는 통일을 하되 그것이 어떤 통일이냐, 예컨대 흡수통일이냐 평화통일이냐 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입장은 평화통일이다. 한상렬 목사처럼 일방적으로 북한을 두둔하는 건, 북한에 의한 흡수통일이라면 몰라도 평화통일의 길은 될 수 없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신학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어디서나, 언제든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신학은 없다. 남산을 제3한강교에서 보는 것하고 북한산에서 보는 것하고 그 모양이 같을 수 없다. 한 사람이 제3한강교와 북한산에서 동시에 남산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보수신학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신학이라면 진보신학은 그 반대라 할 수 있는데, 이 둘을 섞어서 내려오면서 동시에 올라간다고 할 수도 없다. 각자 고유의 관점과 영역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는 태도다. 진보와 보수신학자들은 가능한 많은 신학적 대화와 건전한 논쟁을 해야 한다”

-2013년 한국에서의 WCC 총회를 앞두고, WCC를 반대하는 보수신학자들의 목소리가 크다.

“반대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WCC를 두고 논란이 되는 많은 것들은 실상 오해에서 비롯됐다. WCC의 신학은 결코 자유주의신학이 아니다. WCC는 지금도 성경의 말씀에 따라 교파를 초월해 세계의 평화와 일치에 앞장서고 있다. 예장 합동과 예장 통합이 갈라질 때도 이 WCC 가입 건이 원인을 제공했지만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고, 또 인간의 결정은 잘못될 수 있다. 총회 결정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맞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론 보수진영이 WCC 총회를 조용히 지켜보면서 정말 WCC의 신학이 잘못된 것인지 차분히 확인했으면 좋겠다. WCC 총회는 세계에 한국과 한국교회를 알리는 절호의 기회다.”

주재용 박사는

한신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길대학교에서 교회사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한신대에서 교수, 학장, 총장을 차례로 역임했고, 한국기독교학회 총무, 한국교회사학회장,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총무 및 회장, 한국신학연구소소장, 동북아신학교협의회 총무 및 회장, NCCK신학문제연구위원,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이사 등을 지냈다. 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경건과신학연구소 소장, 한국교회사 연구원 이사, 전국교수공제회 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