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시편을 읽다 보면 기도자가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저주하는 시편이 나옵니다. 시편 109편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노래’라고 이름이 붙어 있는 이 시편에서 기도자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악담의 기도’를 퍼붓습니다. “그가 살 날을 짧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폐허가 된 집에서 마저 쫓겨나서, 밥을 빌어먹게 하십시오. 빚쟁이가 그 재산을 모두 가져 가고,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재산을 모두 약탈하게 하십시오”(8~11절).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와 유사한 기도들이 시편 안에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예언서에서도 이 같은 기도를 가끔 만납니다(참고. 예레미야 18:21~22).

성경에서 이 같은 기도문을 만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혹감을 느낍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 같은 기도문을 대하는 순간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4)고 말씀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롬12:19a). 이같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 동안 크게 두 가지의 제안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제안은 저주 시편을 무시하자는 제안입니다. 원수에게 악담을 퍼붓고 저주하는 기도는 영적으로 미숙한 시기에 미성숙한 사람들이 드린 기도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가르침을 아는 우리로서는 무시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둘째 제안은 구약 시대의 하나님 이해와 신약 시대의 하나님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이 같은 차이가 생겼다고 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 징벌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으로 이해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사랑의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제안은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만, 더 많은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첫 번째 제안은 구약성경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듭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구약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제거하자는 제안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는데, 첫 번째 제안은 그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구약은 미숙한 종교성이 만들어낸 책이 아닙니다. 두 번째 제안의 배경이 되는 신학적 도식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징벌의 하나님’(Punitive God)으로 이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의 인물들이 모두 그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김영봉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과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수학하고 캐나다 McMaster University에서 신약성서연구로 Ph.D. 학위를 받았다. 현재 와싱톤한인교회(www.kumcgw.org) 담임목사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저주 시편을 ‘하나의 기도’로 보는 데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습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정직한 기도는 때로 마음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는 과정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기도 생활을 통해 그리고 교우들의 기도 생활을 관찰하면서 ‘정직한 기도’의 중요성을 번번이 확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관계가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 앞에서 진짜 감정을 속이고 짐짓 믿음 좋은 사람인 양 연극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고, 거짓 감정 뒤에 숨는 겁니다. 그와 같은 기도는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자신을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사무칠 때, 하나님 앞에서 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놓는 정직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해 보일 때, 하나님을 향하여 따지고 항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문과 의혹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쏟아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하나님 앞에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관계는 피상적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께 대한 분노가 축적됩니다. 그것이 결국 믿음을 죽게 만듭니다.

둘째, 저주 기도를 ‘하나의 기도’로 본다는 말은 그것이 ‘기도의 과정’의 한 지점에서 드려진 기도라는 사실을 고려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109편의 기도는 다윗의 기도 생활 중에 한 시점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사무칠 때 하나님 앞에 토로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윗이 드린 기도의 전부가 아니었으며, 다윗이 드린 기도의 최종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두고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는 점차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악한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정직한 기도는 내면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원한과 증오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입을 열자마자 쓰디쓴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쏟아 놓고 나면 격한 감정이 가라앉고 차츰 하나님 앞에서 냉정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구해야 옳은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한번의 기도로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같은 문제를 두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진실하게 기도하면, 기도의 색깔과 톤이 점차로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동일한 내용의 기도제목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죽은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실하게 원수를 위해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신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와 축복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를 힙입어 용서하기 어려움 문제를 아주 쉽게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한과 증오의 밤을 지낸 후에 비로소 진실한 용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저자는 예레미야처럼 저주 기도의 터널을 거쳐야만 용서와 사랑의 목적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주 기도가 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성경본문은 표준새번역에서 인용했다.

연합감리교회 교우들의 신앙증진 및 일선에서 수고하는 목회자들의 사역을 위해 섬기며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연합감리교인으로서의 연대감을 느끼며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돕는 [섬기는 사람들] 3, 4월호에 실린 글을 연합감리교회 공보부의 허락을 받아 개제합니다.-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