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나는 선한 것이 없어 하고 절망하고 좌절한 영혼을 향해서 신앙 안에서 자유를 얻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나는 절대 변할 수 없을 것이야 라고 생각 하는 영혼을 향해서 변화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이 거듭난 사람의 삶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5-17절은 세 가지 근거를 통해서 우리가 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새로운 속성이 내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새롭고도, 다른 삶이 열려진 것을 의미 합니다.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우리에게 새로운 속성이 있다는 것은 예전에는 결코 생각지 못하던 것들을 생각하고 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일,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일 등입니다.

1. 우리가 변할 수 있는 근거는 생각을 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오직 한 가지 육체의 소욕만을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는 보는 시야가 달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다르게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Sail Boat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별로 크지도 않은데 그것으로 태평양을 건넙니다.

그것은 바로 연료가 없이 갈수 있는 장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돛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돛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로 역풍이 분다고 해도 그 바람을 타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갈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돛의 모양이 삼각입니다.

아무리 역풍이라 해도 그 돛의 방향만 잘 돌리면 오히려 순풍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는 이 생각의 방향만 잘 바꾼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교회 계단을 청소를 하면서 혼자 하소연을 합니다. “이놈의 원수 같은 팔자. 남편 하나 제대로 못 만나서 이리 궁상떨며 사는 고 휴~~” 그것을 목사님이 듣고 대화를 나눕니다.

자매님! 지금 닦고 계신 데가 뭐지요? 그야 교회 본당으로 가는 계단이지요. 그런지요. 본당으로 가는 계단. 그럼 사람들이 그 계단을 통해서 뭐 하러 본당에 가지요? 그야 예배드리러 가겠지요. 네~~예배드리면서 누구를 만나지요? 하나님을 만나지요. 네 맞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러가는 길목을 청소 한다는 것이 그게 청소부가 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천사가 하는 일일까요?

그제야 그 자매님이 생각을 합니다. 그야 천사가 하는 일이겠죠? 네 맞습니다. 자매님은 바로 천사입니다. 그러자 그 자매님 얼굴이 환히 펴지면서~~그럼 제가 남편 잘 만났네요~~그러더랍니다. 생각을 바꾸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2. 두 번째로 생각을 바꾸게 되면 삶의 모습도 달라짐으로 변할 수가 있습니다.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자 이 구절의 시제를 보세요. 미래형이 아닙니다. 바로 현재 형이며 현재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에 잡혀 있는 순간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영의 생각을 하면 사는 것이고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그중심이 자기 자신에 있고, 사람에게 있고, 정욕에 있으며 자기 자랑과 육체의 욕망에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 움직입니다. 오늘 보면 저마다 별것도 아닌 것, 내 놓을 것도 아닌 자존심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그것 때문에 사랑도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바른 생활 바른 대인관계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무엇인지? 그것 뚝 떼어버리고 살면 참 좋으련만, 육체에 속한 사람은 이것을 절대 끊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사람을 보면 참 답답합니다. 이런 거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닌데 그 많은 욕심, 이것 때문에 시달립니다. 많은 고통을 받고 삽니다.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사람은 두려움에 빠지게 되고 좌절과 금심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 자살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의 상태를 오늘 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즐깁니다. 복종을 즐겨 합니다. 왜냐하면 복종하는 사람은 복종케 한 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되든 안 되든 하라시는 대로 하면 결과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한국에서 나오는 통계를 보면 중매결혼이 연애결혼보다 이혼율이 더 적다고 합니다. 연애결혼의 부담은 모든 책임을 본인들이 다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불같이 뜨거운 감정이 사라지고 현실에 부닥쳤을 때 잘 적응이 되지 못하면 그냥 깨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현재 한국의 이혼율은 OECD국가 중 3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 동의하에 시작부터 중매로 하신 분들은 어려울 때 같이 상의 도하고 도움도 받아서 문제를 잘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진리대로 살려고 하면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된 삶의 모습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변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과 다른 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내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면 하나님과는 원수 관계가 되고 맙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었을 때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사업이 어렵게 되지는 않겠는가? 혹은 자신이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걱정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토속신앙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토속 신앙에서는 신을 잘 달래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는 개념 때문에 생기는 착각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예쁜 이름 다 놔두고~~개똥이~~이렇게 짓습니다. 쌀도 사러가는 것 아니고~~팔러 간다고 합니다. 맛있는 거 먹을 때 마다 미안해서 고수레·~합니다.

옛날 고씨(高氏) 성을 가진 지주가 있었는데, 마음이 후덕하여 소작인의 가정 사정을 참작하여 소작료를 감하여 주거나 면제해주었으므로, 그 지방의 농민들은 그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그 지방의 농민들은 물론 다른 지방의 사람들까지, 언제 어디서든 음식물이 생기면 먼저 고마운 고 씨에게 감사의 뜻으로 “고씨례(高氏禮)” 하고 음식을 조금씩 던졌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근방을 다스리는 지신(地神)이나 수신(水神)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무사히 행사를 치르게 해달라는 기원의 뜻이 들어 있는 동시에, 근처의 잡귀들에게 너희들도 먹고 물러가라는, 잡귀 추방의 주술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여간 이러한 잘못된 신관으로 오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영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생활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히려 자신이 하는 사업이나 활동하는 분야에서 오히려 두각을 나타내고 더 번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다른 관계를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신뢰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됨으로 자연히 우리의 삶이 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들에 나가서 무엇을 심으려고 할 때에 우리 손에 돌가루만 있다면 아무리 열심히 땅을 파고 심고 물을 주고 땀을 흘린다고 해도 아무것도 결실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른 손에 옥수수 종자 쥐어 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심음으로 해서 다른 종류의 삶을 살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세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돌가루를 가지고 열심히 심고 있습니다. 물어보면~~우리는 그렇게 살아 왔고, 그렇게 살야야 되요. 라고 합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다 그렇게 산다고 우리가 그것을 따라 산다면 결국은 무엇을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공허와 사망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 심는다면 무엇을 볼 수가 있습니까? 성장과 구별된 삶일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선택의 기회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 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우리의 새로운 속성이 있기 때문이고 이 새로운 속성은 새로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때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대신 성령의 소욕을 따르게 선택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