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까지 우리는 두 가지 속성 사이에 끼어서 방황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옛 속성은 우리를 죄악 된 삶으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고 새로운 속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소욕을 일으키고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속사람은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치 우리의 힘으로는 중력의 법칙을 이길 수 없듯이.(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절규함으로 7장이 막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답은 바로 8장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이러한 곤경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으며, 승리 하며, 소망을 가지고 확신 가운데 안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이 슨 "천로 역정"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극찬해서 이걸 성경 다음으로 가는 책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절망의 도시를 떠나 천국을 향해서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다 좁은 문에 들어서면서 선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곧게 난 좁은 길로만 가라는 권유와 함께 해석자의집을 안내 해 줍니다. 그는 그곳에서 여태껏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아서 온통 먼지투성인 방에 인도가 됩니다. 해석자는 잠시 그곳을 둘러보더니 하인을 불러 청소를 하라고 시킵니다.

하인이 방을 청소하기 시작 했을 때 그저 빗자루를 가지고 먼지를 열심히 쓰니까 그 먼지가 일어 나가지고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뽀얗게 일어납니다. 쓸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방이 어지러워지고, 또 더러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찌나 먼지가 많이 일어나는지 크리스천은 거의 질식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자 해석자는 옆에 서 있던 한 소녀에게 “ 물을 이리로 가져다가 뿌려 보아라”하고 이릅니다. 그 소녀가 물을 뿌렸을 때 먼지는 가라앉아서 마침내 방은 깨끗이 청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의 순례자인 그리스도인이 해석자에게 묻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

그는 말하기를 이 객실은 복음의 은혜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화되지 않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먼지는 인간의 원죄를 의미하며 또 모든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내면의 부패를 의미 합니다. 처음 이방을 쓸기 시작한 사람은 율법입니다. 그 다음 물을 갖다 뿌려준 소녀는 복음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라고 설명을 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노력으로 그 무엇을 바로 해 보려 하고, 또 어떤 큰 일 해보려고 몸부림치고 애를 써보십시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먼지만 납니다. 점점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여러분은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성령!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성령의 역사 안에서만 깨끗하게 모든 율법과 죄와 허무함과 불의함으로부터 참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바로 이런 것에 대한 해답을 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몇 번에 걸쳐서 8장이 담고 있는 진리의 핵심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8장은 마치 미국이라는 나라를 사모하면서 이민을 오는 사람이 항구에 우뚝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면서 아~~내가 자유의 나라에 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는 것처럼 이 로마서 8장이 바로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변하게 할 수 있으신 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할 1-4절은 우리는 자유롭게 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Life Of Liberty

우리는 종종 우리자신에 대해서 실망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형편없어. 나에게는 선한 게 없군. I am No Good' 스스로를 정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하서 아니면 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자책하며 자신을 차버리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생각이 들 때에 어떻게 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지나갑니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질 때까지 무시 합니다.

저는 이런 스타일 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 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반응은 그래 나 별로 좋지 못해 하면서 마치 돼지가 그 우리에서 뻐띵기듯이 허우적댑니다. 그러면서 나는 형편없어 그러니 이 형편없음을 끝까지 느껴 보자 하는 것입니다. 나뿐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형편없음을 느껴봐라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러면 이러한 느낌을 올바로 다루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무시도, 거기에 빠져 버리는 것도 아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를 발견 하는 것입니다. 오늘 1-4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 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이러한 절망감과 좌절감을 가질 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우리에 대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를 내고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Wrath)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103 13-14절에 보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악 가운데 씨름하고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서 이 싸움에서 자유롭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양이 무리를 이탈해서 길을 헤매다가 가시덤불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할 때 목자가 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와서 화내며, 발로 차버리겠습니까? 아니지요 덤불에서 다치지 않게 끌어내서 구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방황하다가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발견하면 찾아서 발로 차버릴 것으로 생각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 성령의법을 통해서 생명을 얻었으면 우리는 이러한 정죄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 힘듭니까? 그것은 무서운 하나님, 화나계신 하나님 - 두려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화내고 있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서운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전화를 걸어서 친분을 쌓으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잠시 곁길로 갔다고 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속히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럼 거기서 해결 방법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해결책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