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Roma, 라틴어: Imperium Romanum)은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시작한 B.C. 27년부터 몰락까지의 로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로마 제국의 끝은 A.D.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 1453년 비잔틴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B.C. 753년 성립된 도시국가 로마는 왕정을 거쳐 공화정을 도입,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이자 해운국이었던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가 됩니다. 이후 넓어진 영토로 인해 로마의 공화정은 더 이상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게 되고, 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로마의 군 통수권과 정치적 권력을 한 사람의 손에 맡기는 독재관(Dictator)과 군사령관(Imperator)에 취임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카이사르의 암살사건은 로마가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가는 길을 닦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바로 이어진 내전 끝에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최종 승자로 남아 존엄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존칭을 받고 사실상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군사적인 재능이 없고 병사들의 신망도 크지 않아 임페라토르 라는 칭호가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낼 것을 염려하였고, 공화정이 무너지고 황제가 등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여론을 달래려는 의도에서 '제1시민' 이라는 의미인 Princeps 라는 호칭을 만들어 사용했고, 이것이 후에 퍼져 황제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로마 최초의 황제 탄생입니다.

이후 로마의 정치체제는 멸망할 때까지 제정으로 굳어집니다. 이후 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과거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의 영토들인 헬라반도와 소아시아반도, 그리고 시리아, 이집트, 유대, 지중해 서부의 북 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 지금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있는 에스파냐, 프랑스지역인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현재 영국 영토인 브리타니아와 라인강 서쪽의 독일땅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루마니아가 된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습니다.

이러한 영토확장은 로마제국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으나, 로마 제국의 시민들과 시민권 미소유자 사이에는 상당한 빈부격차가 있었다. 여기에서 가난한 계층을 의미하는 플로레타리아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로마 제국은 고전 지중해 세계의 보편 문화권이 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건축, 법, 정치 등은 후에 서구 세계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1세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이상 로마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자신의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습니다. 이중 서쪽의 로마제국을 가리켜 서로마 제국이라 하고, 동쪽의 로마제국은 동로마제국, 후의 비잔틴제국이 됩니다.

서로마 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는 에스파냐와 아프리카 북부, 북쪽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본국 로마를 포함한 영역이었으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방위선은 무너져, 변경은 그들의 땅이 되어갔습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이민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황제의 위에서 퇴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이런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과 서로마제국의 멸망 등은 후에 교회를 동서로 분열하는 서곡이 되었습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나폴리 만의 루쿨라눔(Lucullanum)에 유배되었으며, 그의 최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511년까지는 살아남았습니다. 로물루스를 떨어트린 뒤 오도아케르는 비잔틴제국의 섭정이 되어 서로마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오도아케르는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게르만족의 일파입니다. 스칸디나비아에 남은 일파는기트족으로 불렸고, 남하한 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일부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3세기 경에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