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를 피상적으로 읽으면 단지 젊은이들에게 인생이 헛됨을 알려주는 정도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 깊이를 알게 되면 왜 이러한 책이 성경에 포함돼 있는지, 왜 이 책을 지혜서라고 하는지, 왜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하는지 잘 알게 된다. 늙은 후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너무 늦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자꾸만 자살하고 삶의 의미를 모른채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을 보는데 이럴 때 이런 책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생각해 본다.
아무쪼록 이 책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이들에게 인생이 얼마나 공허하고 덧없는 것을 알게 하는데 도움을 줘 참되신 주님을 찾게 되기를, 성경의 귀중함과 성경만이 진리(전 12:10)임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8. 10. 20.
저자 유동근
전도서 1장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라는 이 책의 원래 명칭은 전도서가 아니라 <집회를 소집한 사람>이다. 히브리어로는 ‘코헬렛트’이며 ‘집회를 소집한 사람’, 혹은 ‘소집자’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1절의 ‘다윗의 아들’이나 ‘예루살렘 왕’, ‘지혜를 많이 얻었다’는 표현을 볼 때 솔로몬이 틀림없다고 확정한다. 솔로몬은 많은 실패를 체험하고 나서 인생의 후반부에 하나님 앞에서 오랫동안 화평을 잃고 실패한 체험을 회상하며, 이 전도서를 쓸 때는 자신의 이름인 ‘평강의 왕’ 즉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집회를 소집한 사람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전도자’란 소집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사람들을 소집해서 그의 체험, 곧 실패한 경험을 들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전도서라는 성경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전도서가 왜 성경에 포함돼야 하는지 의심한다. 왜냐하면 이 책 속에는 사람의 불평이 들어 있고 염세적인 관념과 숙명론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 성경의 여러 책들과 모순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서를 정경 안에 넣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도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고 또 읽기도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잘 읽으면, 또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갖는다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전도서의 중점은 해 아래서 세상적인 학문, 지식, 부, 오락, 향락, 명성, 지위 등 많은 것들을 얻는다 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허무하고 공허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솔로몬을 선택해서 전도서를 쓰게 하셨는가? 솔로몬은 절대자로서 왕의 체험을 했고, 부귀영화를 누렸고 또 심오한 지혜를 가졌고 그 지혜를 의지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렸지만, 후반부에 자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면서 많은 부패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세상의 모든 헛된 체험을 한 뒤에 그는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한 권의 책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전도서다.
전도서를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솔로몬밖에 없다. 그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고,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렸다. 그렇지만 결국 나중에 그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엇인가를 솔로몬보다 잘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전도서 뒤에 있는 책은 아가서이다. 인생은 너무나 공허하다고 말한 것이 전도서라면 아가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받아들인 성도들이 주님으로 인해 즐거움을 찾았을 때의 ‘노래 중의 노래’다. 결국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는 전도서를 썼을 뿐 아니라 아가서를 써서 주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쁘고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기록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 아가서의 저자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절)”. 그는 헛되다는 말을 계속한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다. 이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하벨’인데 원문에는 ‘불다’는 뜻이 있다. 아담이 가인을 낳고 흥분하여 ‘얻었다’는 뜻의 이름을 지었지만 그는 기대했던 뱀의 머리를 깰 자(창 3:15)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후 얻은 둘째아들은 헛되다는 의미의 아벨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어떤 성경 해석자는 이 하벨 또는 아벨이라는 말을 어린 아이가 불어서 만드는 비눗방울 같은 공기방울로 비유했다. 이 세상의 모든 허영, 재물, 죄의 즐거움, 정욕, 쾌락 등은 다 비눗방울처럼, 무지개처럼 처음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허무한 것이 돼 버린다는 뜻이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사람들은 해 아래서 많은 수고를 한다.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나름대로 유익한 일들을 한다고 열심이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해 아래서 수고를 했는데, 그런 수고가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는 하나님 없이 행한 인간의 모든 생활이나 활동이 다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 ‘유익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남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생이 수고하고 열심히 살아도 나중에 끝날 때 보니까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사람들은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렇게 산다. 욕심을 마음껏 부리면서 산다. 그런데 결국 그런 사람들도 다 사라지는 것이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땅은 계속 그대로 있다. 이것은 땅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적으로 이 땅도 다 불타버리고 끝나는 날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과 비교할 때 사람들은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면서 계속 바뀌지만, 땅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읊었던 시조처럼 말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것도 같은 말이다. 산천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없어진 것이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인생의 무상함을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바람이 부는 것, 그리고 모든 강물 등 이 자연계가 그대로 존재하면서 흘러가는 것을 들어서 말했다.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솔로몬의 눈에 이 만물은 다 피곤하게 보인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우리나라 옛 노래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느니라.’ 나는 일반 사람들보다 많은 나라를 다녀봤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아름다운 곳이라는 곳을 많이 봤다. 물론 관광을 하러 다닌 것은 아니고 교회를 위해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지만, 예를 들어 프랑스에 가면 그 나라의 성도들이 에펠탑, 박물관 등에 데리고 가기 때문에 아름다운 곳을 가 볼 기회가 많았다. 말레이시아를 갔을 때 보았던 아름다운 곳이 기억이 나고, 스리랑카에서도 ‘벤또따’라는 아주 아름다운 곳에 가 보았다. 이 세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 많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아내가 생각이 난다. 아내를 데리고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기묘한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하룻밤을 지나고 다시 보면 눈이 완전히 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하게 ‘여기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생각을 했을까’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던 경관들이 금방 빛이 바래고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그렇다. 그러므로 눈은 아무리 보아도 족함이 없다. 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나 노래도 마찬가지다. 몇번 듣고 나면 다음에는 그렇게 좋지 않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처음 볼 때, 처음 들을 때는 조금 좋지만 계속될 때 별로 좋은 것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한 것인데 이는 우리의 체험에서도 사실이다.
유동근 목사는
대전고, 충남대·대학원
Pacific Theological Seminary(Th.M, D.D)
온누리선교교회 담임목사, 美 퍼시픽 신학교 교수
국제선교신학원(IMC) 학장
現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연합총회 총회장
Fuller Theological Seminary D.Min GM Course
저서: 모세오경, 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서신서, 요한계시록 등 강해서(총 20권)
저자는 1991년부터 몇몇 동역자들과 함께 몽골,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네팔, 미얀마, 에디오피아, 잠비아, 이태리,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프랑스, 독일 등 해외 선교를 주로 해온 선교사이며 복음전도자다. 위에서 소개되는 선교일기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지금도 매년 저자와 그 일행은 일년에 한 번 이상 세워진 교회들을 순방하며 진리의 말씀을 공급하고, 교회들을 굳게 세우며 전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이들에게 인생이 얼마나 공허하고 덧없는 것을 알게 하는데 도움을 줘 참되신 주님을 찾게 되기를, 성경의 귀중함과 성경만이 진리(전 12:10)임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8. 10. 20.
저자 유동근
전도서 1장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라는 이 책의 원래 명칭은 전도서가 아니라 <집회를 소집한 사람>이다. 히브리어로는 ‘코헬렛트’이며 ‘집회를 소집한 사람’, 혹은 ‘소집자’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1절의 ‘다윗의 아들’이나 ‘예루살렘 왕’, ‘지혜를 많이 얻었다’는 표현을 볼 때 솔로몬이 틀림없다고 확정한다. 솔로몬은 많은 실패를 체험하고 나서 인생의 후반부에 하나님 앞에서 오랫동안 화평을 잃고 실패한 체험을 회상하며, 이 전도서를 쓸 때는 자신의 이름인 ‘평강의 왕’ 즉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집회를 소집한 사람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전도자’란 소집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사람들을 소집해서 그의 체험, 곧 실패한 경험을 들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전도서라는 성경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전도서가 왜 성경에 포함돼야 하는지 의심한다. 왜냐하면 이 책 속에는 사람의 불평이 들어 있고 염세적인 관념과 숙명론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 성경의 여러 책들과 모순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서를 정경 안에 넣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도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고 또 읽기도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잘 읽으면, 또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갖는다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전도서의 중점은 해 아래서 세상적인 학문, 지식, 부, 오락, 향락, 명성, 지위 등 많은 것들을 얻는다 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허무하고 공허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솔로몬을 선택해서 전도서를 쓰게 하셨는가? 솔로몬은 절대자로서 왕의 체험을 했고, 부귀영화를 누렸고 또 심오한 지혜를 가졌고 그 지혜를 의지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렸지만, 후반부에 자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면서 많은 부패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세상의 모든 헛된 체험을 한 뒤에 그는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한 권의 책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전도서다.
전도서를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솔로몬밖에 없다. 그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고,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렸다. 그렇지만 결국 나중에 그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엇인가를 솔로몬보다 잘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전도서 뒤에 있는 책은 아가서이다. 인생은 너무나 공허하다고 말한 것이 전도서라면 아가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받아들인 성도들이 주님으로 인해 즐거움을 찾았을 때의 ‘노래 중의 노래’다. 결국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는 전도서를 썼을 뿐 아니라 아가서를 써서 주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쁘고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기록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 아가서의 저자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절)”. 그는 헛되다는 말을 계속한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다. 이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하벨’인데 원문에는 ‘불다’는 뜻이 있다. 아담이 가인을 낳고 흥분하여 ‘얻었다’는 뜻의 이름을 지었지만 그는 기대했던 뱀의 머리를 깰 자(창 3:15)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후 얻은 둘째아들은 헛되다는 의미의 아벨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어떤 성경 해석자는 이 하벨 또는 아벨이라는 말을 어린 아이가 불어서 만드는 비눗방울 같은 공기방울로 비유했다. 이 세상의 모든 허영, 재물, 죄의 즐거움, 정욕, 쾌락 등은 다 비눗방울처럼, 무지개처럼 처음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허무한 것이 돼 버린다는 뜻이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사람들은 해 아래서 많은 수고를 한다.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나름대로 유익한 일들을 한다고 열심이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해 아래서 수고를 했는데, 그런 수고가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는 하나님 없이 행한 인간의 모든 생활이나 활동이 다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 ‘유익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남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생이 수고하고 열심히 살아도 나중에 끝날 때 보니까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사람들은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렇게 산다. 욕심을 마음껏 부리면서 산다. 그런데 결국 그런 사람들도 다 사라지는 것이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땅은 계속 그대로 있다. 이것은 땅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적으로 이 땅도 다 불타버리고 끝나는 날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과 비교할 때 사람들은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면서 계속 바뀌지만, 땅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읊었던 시조처럼 말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것도 같은 말이다. 산천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없어진 것이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인생의 무상함을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바람이 부는 것, 그리고 모든 강물 등 이 자연계가 그대로 존재하면서 흘러가는 것을 들어서 말했다.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솔로몬의 눈에 이 만물은 다 피곤하게 보인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우리나라 옛 노래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느니라.’ 나는 일반 사람들보다 많은 나라를 다녀봤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아름다운 곳이라는 곳을 많이 봤다. 물론 관광을 하러 다닌 것은 아니고 교회를 위해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지만, 예를 들어 프랑스에 가면 그 나라의 성도들이 에펠탑, 박물관 등에 데리고 가기 때문에 아름다운 곳을 가 볼 기회가 많았다. 말레이시아를 갔을 때 보았던 아름다운 곳이 기억이 나고, 스리랑카에서도 ‘벤또따’라는 아주 아름다운 곳에 가 보았다. 이 세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 많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아내가 생각이 난다. 아내를 데리고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기묘한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하룻밤을 지나고 다시 보면 눈이 완전히 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하게 ‘여기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생각을 했을까’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던 경관들이 금방 빛이 바래고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그렇다. 그러므로 눈은 아무리 보아도 족함이 없다. 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나 노래도 마찬가지다. 몇번 듣고 나면 다음에는 그렇게 좋지 않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처음 볼 때, 처음 들을 때는 조금 좋지만 계속될 때 별로 좋은 것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한 것인데 이는 우리의 체험에서도 사실이다.
유동근 목사는
대전고, 충남대·대학원
Pacific Theological Seminary(Th.M, D.D)
온누리선교교회 담임목사, 美 퍼시픽 신학교 교수
국제선교신학원(IMC) 학장
現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연합총회 총회장
Fuller Theological Seminary D.Min GM Course
저서: 모세오경, 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서신서, 요한계시록 등 강해서(총 20권)
저자는 1991년부터 몇몇 동역자들과 함께 몽골,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네팔, 미얀마, 에디오피아, 잠비아, 이태리,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프랑스, 독일 등 해외 선교를 주로 해온 선교사이며 복음전도자다. 위에서 소개되는 선교일기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지금도 매년 저자와 그 일행은 일년에 한 번 이상 세워진 교회들을 순방하며 진리의 말씀을 공급하고, 교회들을 굳게 세우며 전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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