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아는 누구 딸?”

아이들이 깜찍하게 어렸을 때 예쁜 짓을 하면, 흔히 엄마나 아빠가 아이에게 묻는 말이다. 자기 딸 혹은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에게 혼동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지만, 오히려 난 묻는 말 대신 “너는 하나님의 딸”이라고 일러줬다.

22살 된 예쁜 딸을 교회 회중 앞에 세워놓고 두 손을 들고 선교사 파송 노래와 축복기도를 드리는 순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찢어지는 심정을 느낌은 어인 일 일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요셉과 마리아가 30여 년간 길러서 다시 하나님께 돌려보내는 장면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결혼 후 8개월쯤 되었을까. 시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제는 손자를 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남편과 나는 1개월간의 기도 중에 수태하는 기쁨을 얻었다. 하나님이 나의 태를 열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나와 남편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 입양이 되었던 것이다.

성아가 국민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부자동네라는 밀벨리에 남편의 학업일로 3년 간 거주한 적이 있었다. 부자 친구는 거의 토요일이면 이런저런 파티 때문에 외박하는 조건으로 성아를 초대했다. 우리는 주일을 지켜야 하는 관계로 성아를 토요일 밤에 친구 집에서 데려와야만 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성아가 원해서 외박을 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일 아침 일찍 데려오는 조건이었다. 성아는 한마디 거절하지 않고 따라 나섰지만, 엄마인 나로서는 딸애의 내심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냉정할 정도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을 한치 양보하지 않는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었다. 그 이유로 성아는 22년 평생 동안 주일예배를 놓친 적이 없다. 대학교에 가서 아이를 가르치면서 성아는 나에게 고백한적이 있다. 아빠 엄마께 감사한다고.

아이가 중학생 이었을 때의 일이다. 하교 후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엄마, 왜 나는 저축 통장이 없어? 친구들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데.” 그때 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성아를 대학교에 보내실 거야.”, ‘오케이’ 더 이상 질문이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아이를 보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나도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들어가면서 이곳 저곳에서 장학금을 받은 이유로 성아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훗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표현으로 성인이 되면 성아가 받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라는 말로 대학을 보냈다.

미국나이 만 18세, 성인이 되면서 성아는 집을 떠났다. 이제 딸아이에게는 더 이상 부모가 같이 할 수 없었다. 대신 하나님이 부모가 돼야 했다. 무엇을 살 때도, 무슨 생각을 할 때도, 어떤 행동을 할 때도, 먼저 하나님께 여쭤보는 사람이 되길 바랬다.

대학 4년 동안 1년에 두서너 차례씩 교회 청년과 짧은 선교여행을 떠나곤 했었다. 마리아가 예수를 육체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에 비교하면 2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짧은 기간이나마 성아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며, 나에게는 마리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김태임(김익곤 목사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