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개혁교회 목회자이자 호주 제3공간(Third Space) 책임자인 데이비드 로버트슨(David Robertson) 목사는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 ‘그리스도를 떠난 기독교를 말하는 대통령들은 충분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칼럼 내용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슬로건이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으로 대체되고,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바이든 대통령으로 권략이 이양되면서 언론(특히 서구)은 더욱 고착화됐다.

트럼프가 퇴임하면서 한 연설과 바이든이 취임하면서 한 연설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전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후자는 마치 산 위에서 21세기 설교를 하는 것처럼 칭송을 받았다.

“모든 미국인들은 국회의사당에 대한 공격에 경악했다. 정치적 폭력은 우리가 미국인으로서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공격이다.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공동의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하고, 당리당략을 뛰어넘어 공동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이는 바이든의 ‘통합’ 발언으로 읽히지만, 사실 트럼프로부터 나온 말이다. 난 트럼프와 바이든의 연설을 읽으며 2개 연설의 본질이 얼마나 유사한지 폭로했다. ‘Won't Get Swinded Again’의 ‘더 후’(The Who)가 한 말 중 “옛 상사와 같은 새 상사를 만나다”란 말이 있다.

특히 내게 충격을 준 것은 종교, 특히 기독교가 두 진영 모두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만 빼면, 그것은 훨씬 더 시민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의 경우, 일종의 시민적 ‘기독교’ 미국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바이든의 경우, 시민적 ‘기독교’ 미국 진보주의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의 가톨릭 신앙, 즉 진보적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을 기뻐하며 이를 감추지 않았다.

‘더 오스트레일리언’의 폴 켈리 기자는 바이든의 연설에 종교적 이미지와 열정을 이용한 많은 이들의 전형이었다. 그는 “이것은 미국의 영혼, 웅장한 웅변, 은혜와 겸손의 신성한 연설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의 언어는 대통령과 사제의 언어였다”고 칭송했다.

다른 이들도 똑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CNN은 “바이든 대통령이 통수권자일 뿐 아니라 ‘아빠와 같이 친근한’ 대표자이기도 했다”며 “오늘 취임식은 교회 예배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나은 천사와 같은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다.

신문과 방송의 또 다른 헤드라인은 “바이든은 모세다…. 세상의 빛…. 세상의 희망… 우리는 바이든을 신뢰한다”고 했다.

이 시민 종교에서, 신앙은 미국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미국에 대한 이 신념과 지속적인 국가적 신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미국인으로서 사랑하는 공통의 대상은 무엇인가? 우리를 미국인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알 것 같다. 기회, 안보, 자유, 존엄성, 존경, 명예, 그리고 진실이다.”

그 믿음은 미국에 대한 종교적 헌신과도 같이 이어진다.

“수 세기 동안의 일과 기도가 우리를 오늘날에 이르게 했다. 우리의 유산은 무엇이까? 우리 아이들이 뭐라고 할까? 내 시대가 끝나면 내 마음 속에 알려 달라. 미국, 미국,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다.”

나는 이러한 것들 중 일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기독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가 두렵다.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도, 민주주의를 지지하려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체물로서 이를 찬양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이것이 어떤 정치적 계파에서 왔든지 말이다.

이 신성모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아멘과 아우먼’이라고 무지하게 기도하는 의원이든, 취임 기도에서 ‘우리 공동체 신앙의 강력한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기도하는 실버스터 비먼 목사이든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공동체 신앙의’라는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우연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의 기도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미국의 시민 종교는 기독교가 없는 종교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가치를 공유하는 ‘당신의 개인적 예수’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 행정부를 환영하며 이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는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거나 그의 주권이나 우리의 약점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양당이 언급하는 미국의 ‘신앙’은 미국이 가장 위대하고 최고라고 믿는 것이다. 그 다음은 행운에 의존하는 것이다!

바이든의 연설은 통합을 위한 웅변적인 요청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징후는 좋지 않다. 바이든은 자신의 가톨릭 신앙(그리고 자신이 따르겠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곧바로 자신의 행정부가 해외 낙태를 지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이는 미국의 원조 자금과 연계해 낙태를 촉진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그는 정치가 아닌 과학을 기반을 한 정책을 펼치겠다고 말하면서도 과학(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페미니스트 운동)에 반대했고, 취임 첫날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기초한 차별의 예방과 퇴치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통령 펜 한 자루를 이용해 여성 스포츠를 파과하고, 여성의 안전한 공간을 허물었다. 이와 관련, 아비게일 슈라이버 작가는 “우리 딸들을 유혹하는 트랜스젠더 열풍은 여자 아이들에게 새로운 유리 천장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가치관은 그가 새로운 트랜스젠더 보건부 차관보를 임명한 데서 더욱 두드려졌다. 그의 부서는 ‘코로나 세이프 오르기스’(Covid safe orgies)에 대한 지침을 내렸다.

그의 말은 통합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정체성 정치라는 위험한 게임을 하는 깨어 있는 대통령의 행동이었다. 슬프게도 이 게임은 너무 많은 교인들이 기꺼이 동참하는 게임이다.

바이든이 인용한 시편 30편 5절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말씀은 전혀 맥락과 맞지 않다. 그 노래에서 우리가 기뻐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찬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찾는 것은 그분의 은혜이다. 그래야 우리의 울부짖음이 춤으로 바뀔 수 있고, 슬픔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변할 수 있다.

미국이 다시 위대하게 되려면, 혹은 ‘더 좋게’ 되려면, 민족주의 버전이나 진보주의 버전이 아닌 (과거에 종종 그러했듯이) 성경적 기독교의 진정한 부활이 필요하다.

만약 그렇다면, 양 진영은 시편 33장 12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말씀에 훨씬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거나 미국을 더 좋게 만다는 것에 대한 자랑 대신, 겸손과 회개, 그리고 미국 공동체의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삶을 내려놓을 때 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모든 국적을 가진 기독교인, 특히 미국의 형제와 자매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힘과 위안을 얻어야 한다.

특히 시편 33편 20절이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