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43일간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쳤던 아프간 선교봉사단원들이 마침내 9월 2일 되돌아오게 됨에 따라, 아쉽게 두 명이 희생되었으나 스물 한 명이 생환하여 한국인 인질사태는 한편으론 쓴맛을 머금은 채, 그러나 다행스럽게 막을 내렸다. 이번 납치억류사건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적지 않은 것을 잃었다.

첫째, 두 명의 귀한 젊은이를 잃었다. 우리는 아프간 단기 선교봉사 후 앞으로 아프리카 선교까지 계획한 배형규 목사를 잃었고 젊은이 심성민 씨를 잃었다. 이들은 보통 젊은이들이 가기 싫어하는 위험한 지역에 봉사를 하러 간 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가진 용기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고귀한 봉사의 정신을 지닌 이들의 생명이 자기들을 도우러 온 사람들을 몰라보는 야만적인 탈레반에 의하여 희생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희생과 봉사정신을 지닌 두 귀한 젊은 인재를 잃었다.

둘째, 한국교회는 아프간이라는 선교지역을 잃었다. 한국정부가 탈레반과 인질석방 조건으로 아프간 선교 중지를 약속해 준 것이다. 아프간은 위험지역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접근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선교가 가능한 지역이 이제는 들어가면 불법이 되어 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지역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세계를 이슬람화하겠다면서 자기 지역에서는 선교하지 말라는 근본주의 이슬람의 정복주의 정책에 정부가 휘말린 결과다.

셋째,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국민들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 주었다. 초창기에는 한국교회는 암흑 속에 있던 우리 사회에 근대의 여명으로 다가와 신분제도, 여성차별제도를 타파하고 봉건적 사회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반공의 보루가 됨으로써 한국을 민주주의의 기틀에 올려놓는 데 큰 공헌을 하며 주도적 종교의 지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양적팽창 위주의 선교정책은 전시(展示)주의적이었다. 여기다 교파 분열과 각종 비리에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어 도덕성 상실을 사회에 노출함으로써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그리하여 90년대 이후로 성장의 정체에 직면하였다. 이번에는 무분별한 해외선교에 대한 한국사회의 비난이 터져나온 것이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스물 한 명의 인명을 돌아오게 하면서 탈레반에게 많은 것을 내어 주었다. 정부는 “납치는 적을 압박하는 데 돈 안드는 전략”이라고 하는 테러집단인 탈레반과 공식적인 협상을 벌였다. 그리하여 국제사회에서 납치살해단체와 협상했다는 선례를 남겼다. 탈레반은 한국인 두 명 살해에 대해 아무런 사과가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 외국 선교사들을 납치하고 살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것은 아프간에서 선교하는 다른 나라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정부는 ‘테러집단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룰을 깼다. 이것은 9.11 사태 이후 전세계의 반테러정책에 어긋나는 일이다.

로이터 통신과 알자지라 방송 등 여러 외신은 한국정부가 탈레반에게 2천만 달러(약 187억 원)의 몸값을 지불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국정부는 처음부터 올해 안으로 철군하겠다고 선언하였고 협상에서는 앞으로는 한국 선교사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추가 약속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혼란에 빠져 있는 아프간 현지인들의 어려움을 도외시하고 이들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독일인들이 납치되자 탈레반과 일체의 협상을 거부한 독일정부가 취한 태도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정부가 이러한 큰 양보를 한 것은 많은 인명이 달려 있는 것이어서 부득이했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법단체 및 테러세력에 너무나 소박하고 아마추어적인 접근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신앙적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를 결과적으로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애굽 바로왕의 강퍅함을 그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셨듯이, 하나님은 탈레반의 야만성과 사악함을 그 분의 주권을 위하여 사용하실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깊이 자기반성을 하면서 보다 성숙하는 기회를 삼아야 할 것이다.

첫째, 새로운 내면화와 자기갱신과 충전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각종 양적성장 위주 및 전시주의 정책에서부터 선교사 및 선교봉사단원을 보내는 데 있어서 현장을 보다 면밀히 조사하고, 연구하고, 준비하는 보다 내실적인 방향으로 돌이켜야 한다.

둘째,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선교의 열정이 식어서는 안되고 선교정책이 내실화하는 방향으로 심화되어야 한다.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봉사가 세간에서 말하듯이 “비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의 철없는 행동”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선교봉사단의 동기와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셋째, 전문가적인 시각을 가지고 선교를 보아야 한다. 이슬람선교의 경우 이들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이들의 관점에서 이들의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현지인의 거부감을 최소화해야 한다. 21세기에 문제의 종교로 등장한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선교전략과 전문화가 요청된다.

넷째, 선교지역에서 통일성 없는 교파경쟁적인 선교를 지양해야 한다. 개교회 내지 교파 확장 선교를 지양해야 한다. 자기 교회 내지 자기 교파 이름 아래 선교사를 묶어 놓는 선교를 탈피해야 한다. 해외 선교사들이 아무리 한국 기독교의 이름으로 선교를 하려고 해도 선교비를 보내는 선교본부에서 막아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교파주의적이고 전시(展示)주의적 선교라는 것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선교사위기관리기구’ 및 ‘세계봉사연합기구’가 만들어져 개교회적으로, 개교파적으로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유기적이고 통합적으로 선교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절실하다.

한국교회는 지난 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접근한 서구문화 우월적이고 정복주의적 선교방식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현지인을 배우고, 섬기고, 복음으로 변화시키며, 현지인이 주도하게 하는 현지인 중심의 문화적 선교방식으로 접근하는 패러다임 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