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정작 많은 생각 가운데, 자신의 삶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복음을 전하며, 사명을 잃지 않도록 해야하는데, 삶에 대한 고찰이 없으면 위험합니다. 그것이 최근 명성교회 세습, 그리고 이른바 한국교회의 현주소 같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들에 걸쳐 20대부터 생각해온 목회철학과 자기 다짐을 여러분과 나누고 있습니다. 4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제가 20대의 다짐을 놓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 철학과 다짐은 크게 두 가지 배경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첫째로 교회 분쟁과 아픔 사이에서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목회철학과 자기 다짐은 저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를 떠나지 않도록 해주었습니다.

둘째로 제 목회 현장에서였습니다. 직분이 어떤 상황이건 반복해서 작성하고 다듬었던 자기 다짐은 제 비전과 야망을 혼동하지 않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자기 다짐 마지막 부분인 '삶'에 대해 2주간에 걸쳐 나누려 합니다. 특히 첫 시간으로, 목회자에게 있어 예배자로서의 삶을 나누겠습니다.

한 가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면에서 전해지는 제 결심이 결코 정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답은 오직 말씀밖에 없습니다. 단지 이 생각과 나눔이 여러분과 공유되며, 한 청년으로 시작된 결심, 그리고 현재 목회하는 한 사람이 맡겨주신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생각과 몸부림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저와 여러분 모두 다시 한 번 허리띠를 동여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달꿈예술학교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유한승 목사.
달꿈예술학교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유한승 목사.

◈예배자로서의 삶

1. 예배의 형식을 때로는 파괴하라. 내가 은혜받은 것을 강제로 주입시키는 예배를 하지 말고, 성도들의 관점에 초점을 맞춰서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 예배 형식을 완성시키기 위해 매년 고민합니다. 그리고 내년에 조금씩 바꾸어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습관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좋은 제도와 프로그램도 감동이 되지 못하고 긴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공적 예배에 있어 성도들이 느슨해졌다면, 가끔 그 형식을 파괴함으로 예배드릴수 있어야 합니다.

청년부 예배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한 청년이 공연을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올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미 오랜 기간 교회를 나오지 못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 날 그 청년을 위해 예배 형식을 포기했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모두 움직였습니다. 비록 40분 대신 3분의 설교가 되었지만, 20분의 찬양은 없었지만, 그 마음 그대로가 예배였습니다. 지금은 그 친구는 청년부 회장이 되어 있습니다.

2. 기본적인 예배 형식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 예배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 필요하다.

: 그렇다고 무조건적 형식의 파괴를 시도하면, 예배의 중심 정신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가진 목회철학이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적인 신앙의 고백과 형식과 잘 혼합되어 균형이 갖춰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는 크게 세 가지 세션으로 나뉘어져있습니다. '부르심, 드림, 나눔'입니다. 부르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는 내 마음대로 교회를 선택하고, 내 상황이 변했다고 여기저기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우리 의지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한 나를 선택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의 예배를 통해, 그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시간과 장소를 정해 순종하는 것이 바로 공적 예배이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앞 순서에는 부르심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의 기도만 있습니다.

두 번째는 '드림'입니다. 부르심이 있었다면, 이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찬양은 이 시간에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찬양은 예배 전의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릴 때, 바로 하나님은 그날 소중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 말씀을 주시면 바로 설교가 이어지지 않고, 말씀 뒤에 봉헌이 있습니다. 또 성가대 찬양이 이어집니다.

세 번째는 '나눔'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말씀-봉헌-찬양 뒤 가장 마지막 시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보다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목사가 드러남이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예배는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호흡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숨쉬는 것이다. 따라서 들숨과 날숨이 번갈아 가야 한다. 예배에서 들숨과 날숨은 드림과 받음이다. 말씀을 받는다면 찬양을 드리고, 말씀을 받으면 기도를 드리는 등의 반복이 중요하다.

4. 찬양은 인도자의 의지대로 선곡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성도들이 함께 부르고 싶은 고백들을 모아서 선곡하라. 공동체의 예배이기 때문이다.

: 공적 예배의 예배인도자는 혼자 기도하고 좋아하는 찬양을 부르는 '노래방'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정신을 누구보다 잘 인지해야 하고, 한 명 한 명의 아픔과 기도제목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성도들에게 직접 찬양을 선곡하도록 하는 것도 큰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한 달에 한번 성도들이 직접 선택한 찬양과 이유, 그리고 기도 제목을 공예배 시간에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5. 예배는 인도자 혼자 드리는 것이 아니요, 성도들도 모두 함께 드리는 것이다. 인도자는 모두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예배는 말 그대로 우리 모두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예배에 초대받으신 VIP이십니다. 성도들이 뒷자리에 앉아있다 해서, 예배자가 아님을 늘 주지시켜야 합니다. 기둥 뒤에 숨는다고 하나님이 못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6. 설교자가 모든 예배 순서를 인도하지 말라. 설교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순서에 적합한 성도들을 세우라. 각각 순서를 맡은 성도들을 세워서 공동체 예배의 의미와 예배는 모두 드리는 것임을 알게 하라.

7. 기도회를 인도할 때, 주문을 외우듯이 하지 말라. 가장 연약한 자의 기도를 도울 수 있는 인도자가 돼야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 기도회가 하나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 '기도회'를 검색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연관검색어에 '기도회 인도 방법'이 있었습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 인도 방법'이 뜹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 검색어 중 TOP 3 안에도 언제나 '몇월 몇일 찬양 인도'에 대한 검색어가 생깁니다. 이는 곧 한국교회 기도 인도자, 찬양 인도자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공동체가 드려야 할 찬양을 고민하는 인도자가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는 기도인도가 아니라, 남들이 하는 기도회 인도를 그냥 따라하고 답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도회나 찬양 인도가 성당 중앙에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회처럼 좋은 스타일일 수는 있으나, 정말 연약한 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기도회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기도회를 하나님이 들으실리가 만무합니다.

8. 어떤 인도를 하건 자기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눈물이 날때는 잠시 호흡을 멈추고 가다듬어라. 그렇지 않으면 찬양 인도자, 기도 인도자, 말씀 인도자가 아니라, 자기 기도 시간, 자기 찬양 시간이 되고 만다.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일부러 감정 유도를 하지 말라. 기도는 감정이 아니다. 철저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관계의 시간이다.

: 울기만 하면, 소리치기만 하면, 뛰기만 하면 좋은 기도회나 찬양 시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국은 찬양은 공연처럼, 기도회는 울어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침묵의 힘이 사라졌습니다. 읊조리는 찬양의 감동이 사라졌습니다. 찬양 인도나 기도 인도나, 모두 감동을 끌어내야 성공한 것이란 인식이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화려해졌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 공허감이 청년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삶으로 돌아가 느낍니다. '연극이 끝 난뒤의 공허감'이 그들을 지배합니다.

9. 어떤 인도를 하든 은혜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라. 맡겨진 것을 그저 끝까지 잘 감당하라. 내게 맡겨진 것을 잘 감당하면, 은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 순서를 맡은 자신을 통해 반드시 뭔가 일어나야 하는 욕심쟁이 마술사 시몬처럼 될 것이다.

: 인도자들은 착각합니다. 오늘 모인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가 주는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니 더 기술적인 면을 연마하는 찬양팀, 더 실력이 좋은 사람을 찾는 찬양팀, 더 많은 연습시간은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말씀과 삶은 사라진 찬양팀, 그리고 이들이 준비하는 대규모 찬양집회가 넘치고, 그런 인도자가 될수록 결국 탈선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은혜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 인도자이든 기도 인도자이든 어떤 인도자이든, 화려함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10. 공동체의 예배 인도자는 당일 설교자가 준비한 메시지와 동질성을 갖기 위해 그가 묵상하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모르면 그 주간의 주제, 그 달의 주제를 묵상하며 말씀을 스스로 보고 맞춰가야 한다.

: 예배 인도자, 찬양 인도자, 기도회 인도자가, 주어진 말씀을 모르고 인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자기 자랑을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인도자들은 주어진 말씀 안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미 설교의 목회철학과 자기다짐에서, 순서설교를 하는 의미와, 주제설교가 필요한 의미 등을 나눈 바 있습니다. 미리 주제를 정하지 않고, 주어진 말씀 앞에서 온 공동체가 그 말씀을 지금 이 순간 주신 의미를 깨달아가기 때문에, 공동체의 예배 인도자도 함께 그 말씀을 묵상할 때 공동체 예배는 힘이 생깁니다.

11. 공동체의 예배 인도자는 자신의 순서를 부각시키려고 하면 안 된다. 모든 순서는 하나의 예배의 교집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오래 전 봤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큰 집회였습니다. 그런데 젊은 찬양단이 뜨겁게 찬양을 하고 나서, 설교 시간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물어봤더니, 딱 찬양만 하고 다른 곳에 가서 또 찬양을 한다는 것입니다. 워낙 유명하니 하루에 두 번 찬양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집회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정말 뜨겁게 설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유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순서가 끝났기 때문에, 워낙 바쁘셔서 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얼마 전 바로 그런 광경을 또 목격했습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이런 현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분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예배란 찬양입니까?", "당신에게 예배는 자기 순서만 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정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은 시몬입니까?"

결국 그런 예배 문화는 현재 수많은 찬양팀이 자기 찬양 시간에는 온갖 화려함을 뽐내다, 그 순서만 끝나면 지쳐서 가장 뒷줄에서 졸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에는 하나도 집중하지 않고 졸던 사람이, 자신이 맡은 기도회 시간에는 열변을 토하는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드리는 예배의 태도를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할 것을 알고는 계십니까?" 참된 예배는, 내 순서 너머 다른 사람의 순서에 무릎 꿇고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12. 예배 때 졸고 있는 성도들도 사랑의 눈길로 쳐다보라.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용서하라. 그러나 예배 후 꼭 기도하라. ​예배드리는 소중한 시간을 깨우쳐 달라고 홀로 기도하라.

: 연약한 육신으로 졸 수 있고, 집중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세상 친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성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기도하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3. 때로는 말로 하는 설교 대신 성도들과 함께 성경을 소리내 읽는 시간을 가져라. 그냥 주님의 설교를 들으라. 성경을 함께 읽고 듣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해도, 옳은 것을 포기해선 안 된다. 목사는 때로 욕을 먹더라도 바른 것을 제시해야 한다.

: '오직! 말씀!'의 힘을 잃어버리면 종교개혁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언젠가 이해인 수녀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개신교회는 설교가 너무 너무 좋다고. 찬양도 너무 너무 좋다"고요. 그런데 뭔가 그 의미가 반어적이었습니다.

찬양과 기도 인도 방법이 화려해진 것처럼,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동을 주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을 신학교에서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성도들이 '오직 말씀' 자체가 가진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통독이 중요하다고 알려지면서, 성경을 2배속 3배속으로 해서 통독합니다. 수백 번 읽었다는 게 자랑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그 사이 숨겨진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이 삶에 적용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말씀을 서로 소리내 정독하던 그 힘이 사라졌습니다.

고민 끝에 우리 교회는, 수요일에 목사와 성도들이 오직 말씀을 창세기부터 3장씩 소리내 정독하며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정독하고 묵상한 뒤, 찬양하고 기도하는 베레스 웃사의 예배를 매달 첫 주 수요일에 드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 시간에 참 많은 것들을 깨닫고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매 3년마다 봉헌물을 가난한 자들과 레위인에게 나누었던 것을 깨닫고, 셋째 주 봉헌물을 나누게 된 것도 바로 말씀 정독의 힘입니다.

14. 때로는 말로 하는 설교 대신 다른 것으로 설교를 대신하라. 찬양이든 성극이든 뮤지컬이든 미술전시회든, 목사의 설교 대신 다른 것으로 주님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설교만을 통해 은혜받기는 쉬운 세상이지만, 설교가 사라지는 순간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삶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연상시킬 수 있도록 설교 대신 다양한 것들로 주님의 메시지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 성도들이 다양한 것을 통해 묵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림을 보고도, 음악을 듣고도, 자연을 보고도, 사람을 보면서도, 스포츠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방법과 마음 등을 다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장소에 갇히고, 스타일에 굳어지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5. 그러나 반드시 모든 설교를 대체하는 프로그램 뒤에는 그에 맞는 말씀을 제시해야 한다. 결국에 기억에 남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설교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이유는, 바로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성경을 소리내 낭독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했던 것처럼, 말씀 외의 것들은 성경 메시지가 가진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그것을 넘어서서는 안 됩니다.

16. 은혜를 위해 때로 형식을 파괴하는 것은 필요하나, 의미 없는 형식의 파괴는 내용까지 잊게 만든다.

: 그래서 결론적으로, 바로 그 형식을 파괴했던 목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17. 예배 잘 인도하는 사람 되려 하지 말고,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 먼저 되어라.

: 저는 많은 꿈이 있지만, 그 중에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진짜 예배 잘 드리는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설교해도 그 설교자의 눈빛 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싶어서요. 누가 찬양인도를 해도 열심히 찬양합니다. 박자를 놓쳐도요.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예배 잘 드린다는 칭찬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잘 압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자라나는 아이들이 다 보고, 예배가 무엇인지 배운다는 것을요.

18. 예배가 끝나는 순간 당신의 진짜 예배가 시작됨을 잊지 말라. 하나님은 그때부터 진짜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진짜 은혜 또한, 세상에서 드리는 살아있는 재물이 된 당신의 삶에 달려있다.

: 예배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는 매 순간이 사실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관심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는 순종으로 시작해, 하나님 앞에 결단함으로 진짜 본격적인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19.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는 교인의 시선으로 감시하지만, 예배가 끝나는 순간 시작되는 진짜 예배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삶의 예배'를 관찰하고 감시함을 잊지 말아라.그러므로 삶이 늘 기뻐야 한다. 늘 감사해야 한다. 예배는 기쁨과 감사이기 때문이다.

: 예배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를 보시지만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곧바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불평, 불만,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욕심, 전쟁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함, 항상 기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로 우리를 보고 참된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 세상 속의 예배는 늘 드림이다.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께 부분적 헌물을 바쳤다면, 나머지 돈과 재능으로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것이 진짜 예배다.

: 교회 예배당 안에서 봉헌하는 것은 일부분을 떼어드리는 것입니다. 즉 약속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을 주님 뜻대로 사용하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 우리는 마치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믿음 좋다는 인식이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권사 장로 임직할 때 봉헌을 많이 해야 한다고, 그래야 본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봉헌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봉헌을 강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봉헌은 지켜야 하는 약속이지만, 인간이 강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예배당에 드리는 봉헌은 하나님 말씀 앞에 은혜를 받고,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께 그 일부를 떼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은 것이 더 큽니까? 드린 것이 더 큽니까? 당연히 남은 것이 큽니다. 그 남은 것은 그럼 '내 것'이고 드린 것은 '하나님 것'입니까? 그 해석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봉헌할 때, 우리는 남은 내 모든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배이고 봉헌입니다.

한 번은 저희 교회 권사님꼐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래도 헌금 설교를 한 번쯤 해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강조를 안하셔서... 호호." 그 순전한 마음이 너무 귀하고 아름다웠지만, 그래서 제가 답을 드렸습니다.

"권사님, 정말 필요하다면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 중에 봉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겠지요. 그때 봉헌의 참된 의미를 설교하면 되겠지요."

21. 세상 속에서 나를 드리는 구별된 예배자가 되면, 하나님도 나를 세상과 구별된 당신의 사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신다.

: 결국 우리 교회의 목적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삶의 예배를 위해, 오늘도 교회에 모이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아무리 크더라도, 세상이 변화받지 못하고 손가락질당한다면 그 교회는 썩은 교회입니다. 비록 교회 내부가 썩고 냄새난다 해도, 세상이 보고 변화받으면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2017 부활절 연합예배
▲김삼환 목사. 

◈그럼에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최근 안타까운 소식이 들립니다. 명성교회 이야기를 목사의 양심상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명성교회가 교회 자체를 위해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되물림한 것이 세습이 아니라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김삼환 목사님이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절대로 세습을 안하겠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단이 몇 년만에 바뀐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목회 철학과 점검이 없이 살면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김삼환 목사님께서 보시기에 아들이 아니면 그 교회 살릴 길이 없다 판단하셨다 하니, 그것이 참 슬픈 판단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이 교회 내부적으로 OK 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결이 과연 세상 사람들이 보고 그 교회가 '썩었다'며 변화받지 않을 도구가 되겠습니까? '아름답다'며 변화받을 도구가 되겠습니까? 어떤 도구냐에 따라, 하나님의 도구인지 사탄의 도구인지가 판가름됩니다. 안타깝지만 해답은 삼척동자도 압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위해 있는 것이지, 그 교회의 유지를 위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처럼 교회가 세상을 사랑해야지, 자기 교회만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직접 죽으신 것처럼! 당신 아들을 내어던진 것처럼! 교회는 자기 몸을 던지고!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교회가 썩고 죽어 사라진다 해도,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은 살아날 것입니다.

반면 우리 교회의 현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면, 이미 사명을 잃은 교회요 예수 없이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명성교회가 아무리 기도회로 뜨거운 교회요, 설교와 찬양이 살아있으며 대한민국 최대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 해도, 어느 교회보다 시설이 잘 갖춰져 안전하고 아름다운 교회라 해도, 썩은 냄새는 여기 정릉과 미아동까지 진동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욕을 하고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 된 것입니다.

김삼환 목사님, 지금까지 설교하신 청국장 같은 설교들은 기억나십니까? 뜨거운 기도회를 자랑하신 분들, 무엇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까? 봉헌하신 수많은 분들, 나머지 삶의 봉헌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드린 예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권합니다. 명성교회 성도 여러분, 아름답고 화려함, 눈속임에 속지 마세요. 개혁하세요. 교회를 버리지 말고, 기도하고 봉헌하세요.

세상의 방법대로 싸우고 다투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거룩한 개혁을 이끌어내세요. 그것은 말씀으로 여러분과 교회를 점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계 목사님들. 침묵하지 마세요. 출세와 권력욕이 내게 없는가 점검하세요. 여러분을 사용하시는 분은 교계의 어른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교단과 교회의 거대함과 화려함에 속아, 왕이신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버려지지 마세요. 목사님들의 사명은 '우리끼리'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목숨 거는 본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기도로 중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떠나세요. 소돔과 고모라에는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뒤돌아보는 미련에 아직도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세요.

그 사람에게 '떠나라' 하지 말고, 여러분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하세요. 그러나 내 모든 것을 잃더라도 지켜야 할 사명이 있다면, 혼자가 되더라도 지키세요. 반드시 주님이 여러분을 통해 새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세상을 향해 여러분의 몸을 내어던지는 삶 속의 예배자가 되는 것이지, 그 안에 갇혀 '이곳이 좋사오니' 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예배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유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