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의 삶 코스 대표)
(Photo : )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의 삶 코스 대표)

한국교회 성령론 논쟁의 핵심

 

장로교에서는 종래의 부흥운동의 성령론인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과 새로 소개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 간의 갈등과 마찰이 시작되었다. 한 예를 들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장로교 신학자 중의 한 인물인 박윤선이 지닌 성령론의 변화에 대해 김길성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원래 박윤선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유학하여 수학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의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노선은 워필드(B. B. Warfield)의 주장을 따라 은사중지론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 후 박윤선이 한국에 돌아와 보니 목회적 상황은 방언, 신유 등 성령의 은사적 현상들이 지배적이었고, 그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김길성, "우리 시대를 위한 개혁주의 구원론"). 다시 말하면, 그가 다시 옛 부흥운동의 성령론을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윤선의 성령론은 1980년 이래 또한 차영배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확실히 바뀌게 되었다고 김영한은 평하였다(김영한, "개혁신학의 성령론"). 다시 말해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으로부터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성령론으로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이 점에 대해 차영배는, 박윤선의 성령론이 변화된 것은 곧 이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성령론이 전통적으로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하였다(차영배 외, 『박윤선 신학과 한국신학』)

이처럼 한국교회 성령론 논쟁의 핵심에는 성령의 은사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은사의 지속성 문제를 허용할지 여부에 따라 성령세례에 대한 정의가 또한 명백히 달라지는 것이고, 또 그것이 달라지면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을 받아들일지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성령의 은사 문제만이 아니었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한국교회에 개혁주의신학을 뿌리 내리기 위해서 오순절적인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통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신학적 과제라고 본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방언 문제는 재래적 영성과의 갈등으로 인해 우선 1930년대부터 계속 혹평을 받아온 주제였다. 그러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오순절주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한국교회 내에 큰 영향을 줌에 따라 방언에 대한 찬반양론 논쟁은 점화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국교회 내에 타 교단에 맞서서 오순절주의를 신학적으로 변증할만한 필력(筆力)을 갖춘 인물을 찾기 힘들었고, 또 한국교회 신학의 주류를 이끌고 있는 개혁신학자들의 세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방언에 대한 냉혹한 비판은 신학자들의 강단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시기에는 오순절교단이 아닌 타 교단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방언 때문에 교회생활에 큰 제약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한편, 대표적인 한국의 오순절주의 교단인 하나님의성회는 1960년대에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다가, 1970년대부터는 장로교, 감리교 그리고 성결교회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오순절교단의 성장에 따라 한국교회의 방언에 대한 인식도 점차 긍정적으로 변해왔는데,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전 세계에서 최대의 단일교회로 소개된 바 있는 하나님의성회 소속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가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전통에 따라 방언에 대한 강조를 오순절신앙의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도 있다.

한국 신학계에서의 성령론 논쟁은 주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지속성 여부의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방언에 대한 부정적 비판을 위해 신학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주로 워필드(B. B. Warfield), 개핀(Richard Gaffin) 그리고 후케마(Anthony Hoekema) 등의 인물 등이 보여준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영향이었다. 1980년대에는 박형룡의 노선을 따라 국내 신학자 중에 신성종, 김해연 등이 성령 은사의 중단성에 입각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입장에서 방언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그런가 하면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성령론, 즉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노선에 서있던 차영배, 안영복 등은 자기들의 성령세례론 입장이 방언을 동반한 오순절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변증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노선이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과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성령론 전통을 충실히 따른 것임을 역설하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개혁주의 내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경향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은 방언을 성령 받은 일차적인 증거로 보는 전통 오순절주의 성령론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20세기 초 전통 오순절주의의 태동보다도 훨씬 앞선 전통을 지닌 19세기 개혁파 자체적인 성령운동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1980년대 한국교회 성령론 논쟁 당시에서, 중생 이후의 은혜의 단계를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오순절파라고 단정한 것은 오순절주의에 대한 너무 막연한 시각이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