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한국 교회의 조직 중 감리교회의 그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감리교회는 한국에서 장로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선교하였지만, 그 정치제도가 장로교회와 다르기 때문에 교회 창립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 북감리교회는 1897년 서울 구역회(Seoul Circuit)를 설치함으로써 교회 조직을 시작하였다. 이 구역회는 한국 선교회(The Korea Mission)의 산하 조직으로 있다 1901년에 세 개의 지방으로 분류되었다. 즉 인천을 중심한 서지방회, 평양을 중심한 북지방회, 서울을 중심한 남지방회이다. 이 지방회의 분립은 1905년 6월에 한국선교연회(年會: The Korea Mission Conference)로 그 조직이 확대되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을 경과하면서 이듬해인 1908년 3월에 정동교회에서 감리교회의 완전한 조직인 ‘한국연회’(The Korean Annual Conference)가 창설되었다. 이 연회는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해리스(M. C. Harris)가 주재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주한 미국 선교사들은 모두 본국 교회로부터 한국 감리교회 연회로 이명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한편 미국 남감리회는 1897년 9월에 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당시는 중국연회에 속하였으나, 12월에 한국선교회로 독립하여, 1914년에 한국연회로 조직됐다. 1918년 맥머리(W. F. McMurry) 감독이 한국에 주재하면서 그 해 10월 개성에서 정식으로 ‘한국연회’가 출범하였다.

남·북 감리교회는 오랫동안 각각의 조직을 운영하다 1930년에야 비로소 ‘조선감리교의 합동과 조직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2월 2일부터 12일까지 조선감리교회 창립총회를 협성신학교에서 개최하였다. 이 때, 남·북 감리교회가 하나로 통합되어 ‘기독교조선감리회’가 됐다. 제1대 통리사로 양주삼(梁柱三) 목사가 추대되었다. 장로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남·북 장로회가 합동하여 선교하고 1907년 한 장로교회를 이룬 데 반해, 감리교회는 30년대에 와서야 때늦은 통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와 더불어 한국에서 개신교로서는 두 번째의 큰 교단이 하나된 것은 에큐메니컬 정신의 또 다른 구현이었다.

다음은 성결교회(聖潔敎會)를 살펴보자. 이 교회는 장로교회나 감리교회처럼 세계적인 기구의 교회가 아니었고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로 약칭)가 ‘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가 그 모체다. 동양선교회는 1901년 동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표로 일본 동경에 왔던 카우만(C. E. Cowman)과 킬보른(E. A. Kilbourne) 두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선교 단체다. 카우만은 미국 오하이오 출신의 전기 기술자로 1894년 9월 시카고의 무디(D. L. Moody) 교회에서 있었던 선교집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고 선교사로 나갈 결심을 굳혔다. 그는 곧 무디성경학교에 등록하고 수업을 받은 후 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1년 그는 아내와 더불어 어느 교회의 소속이나 후원도 없이 유일한 재산인 부인의 피아노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고 도우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부인과 함께 동경에 도착했다. 방 한 칸을 얻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걸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02년 카우만은 전에 직장 동료였던 킬보른에게 함께 선교하기를 권해, 그를 동경으로 불렀다. 킬보른은 친구 카우만의 전도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에 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다. 킬보른이 동경에 오자 이들은 자기들이 공부한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를 본 따, 성서학원을 개설하고 전도자를 양성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처음, 그들은 교파를 형성할 의향이 없었으므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아무 교회나 가라고 권했으나 차차 추종자들이 늘어나자 어쩔 수 없이 1904년 11월 전도관(교회)과 성서학원을 한데 묶어 동경에서 ‘동양선교회’를 창설하였다. 이 때 이 선교회의 목적을 ‘동양 모든 나라에 순복음(full gospel)을 전하고자 함이라’ 천명하였다.

일본 각지에서 열성 있는 젊은이들이 성서학원에 와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한국에서 김상준(金相濬), 정빈(鄭彬) 두 사람이 와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성서학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1907년 5월 현재 성결교회 본부가 위치한 서울 무교동에 기와집 한 채를 사고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걸고 전도를 본격화하였다. 이들은 일본 동양선교회에 성서학원 설립을 요청하였는데, 마침 1908년 8월 동양선교회의 후원자 한 사람이 4천 달러를 희사하였다. 이에 따라 카우만이 서울에 와서 한국의 상황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그 후 여러 사람이 서울 선교회를 위해 헌금을 해 주어 무교동에 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11년 3월 성서학원이 무교동 전도관에서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이듬해 5월 충정로에 새 교사를 건축하고 이전하였다.

1910년 12월 동양선교회 지부를 서울에 세우고 ‘만국사도성경연합’ 명의로 파송된 영국인 존 토마스(J. Thomas) 목사가 초대감독으로 내한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활동하다가 부인이 병들자 귀국하였다. 1920년 킬보른이 한국에 제2대 감독으로 내한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교파 의식 없이 전도하였으나, 추종자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21년 전도관을 교회체제로 전환하면서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성결교회가 목사를 독자적으로 안수한 것은 1914년 7월이다. 총회가 조직되면서 1922년부터 교단지 「활천」(活泉)을 창간하였으며 1929년 2월 성결교회 제1회 연회를 개최하였다. 1932년 봉천과 하얼빈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외지까지 선교구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1936년 ‘대한기독교 하나님의 교회’가 성결교회에서 분립해 나가는 아픔도 겪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