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교수.
(Photo : ) ▲김충렬 교수.

 

 

제58장 꿈과 상징(2)

꿈은 무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전제된다. 무의식을 잘 알아야 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꿈의 특성이 중요시된다. 꿈은 무의식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상징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이것은 상징이 무의식을 표현하는 중요한 언어라는데 기초한다. 물론 꿈에서도 의식적인 차원의 논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상징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상징의 해석에 따라 꿈이 다르게 되는 원리이다.

1. 상징의 기능

상징은 무의식의 언어로서 꿈과 동일한 것, 즉 무의식과 동일한 것으로 말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무의식, 꿈 그리고 상징이 거의 동일한 존재와 특성으로 일치를 이룬다. 상징의 존재적 특성으로서 정적 및 동적 측면이 있다. 상징이 표현할 기회를 잃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다는 것은 상징의 정적 측면을 시사한다. 또한 상징은 움직이는 동적인 존재이다. 상징은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발휘하여 정신에서 일정 역할을 하고야 만다.

1) 양면적인 성격의 기능

일반적으로 상징의 역할은 양면성을 지닌다. 긍정적인 것 및 부정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때로 상징은 파괴력을 가진 '그림자'를 정신에서 형성하기도 한다. 상징의 어두운 성격은 어떤 상황에서는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성격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이것이 억압될 때는 귀신으로 둔갑되는 수가 있다.

융은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이는 상징의 동적인 특성인 동시에 상징의 개인적인 측면이기도 하다. 또 다른 상징의 집단적인 측면도 있다. 집단적이란 사회의 시대정신이나 현대인들의 정신세계에 관련되는 측면이다. 상징이 어두운 그림자를 산출할 수 있다는 시각에서 우리 사회로 말하면 지하에 존재하는 묻혀진 생각들과도 같은 것이다.

융은 상징의 집단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상징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것은 집단적 형태일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융은 상징이 시대를 거쳐 오면서 나타난 어두운 역사적 사건에서 그 실체를 찾는다. 현대는 정신분열 등 끔직한 원시성을 드러냄으로 인하여 이 지하세계가 어느 정도 문이 열린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현대인은 '합리주의'라는 미명아래 정신의 이런 상징성이 갖는 에너지와 그 힘을 억누르고 파괴해 온 결과 엄청난 전쟁을 겪고 참혹한 경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상징의 신비성을 소홀히 한 결과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에서 지하세계에 해당하는 무의식의 상징성이 의식으로 표출된 형태와 동일한 형태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징은 동적인 특성 때문에 무의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못한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뚫고 나오려 한다. 이는 집단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때로 그림자로 변형되는 상징력이 합리주의라는 의식을 뚫고 나와 그 파괴력을 발휘한 것에 비유되는 것이다.

현대 합리주의의 발달은 '미신'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이득을 가져왔으나 정신의 중요한 요소인 무의식의 특성, 즉 신화성 내지는 비합리성을 상실함으로써 정신의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로 도덕적이며 정신적은 많은 전통들은 와해 및 붕괴되었고 그 붕괴에 대한 대가는 정신적인 분열이나 방황으로 치루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를 우리는 원시사회에 문명이 침입한 결과에서 본다. 원시사회의 사람들은 문명이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될 때 생의 의미를 잃었고, 사회조직은 붕괴되며,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인류학자들이 이 측면을 관찰했다. 그것은 오늘의 문명사회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분석자가 정신의 상징을 해석할 책임과 그 상징이 나타나는 꿈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는 기능

상징은 의식과 무의식의 동화와 통합하는 기능을 지닌다. 상징은 인간의 본능적인 특성과 인간의 의식이 사회를 일관되게 통합시키는 정신의 유형이다. 그것은 상징적 연관성이 공급하는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상징은 심오한 정동적인 에너지를 갖고 이를 방출하려 하지만, 문명인에게는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요 체험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문명인의 발전된 의식은 본능과 무의식의 보조적인 참여가 동화될 수 있는 방법자체를 박탈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물질과 심리의 연계성이 전혀 없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는 물질의 성질을 기술하면서도 그것은 이제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것이며 우리의 정신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있다. 이것은 옛날의 물질상이 옛날과 너무 다르다는데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태모(太母, Great Mother)는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大地)라는 심오한 정서적 의미를 포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영혼이던 것이 지금은 지능(知能)과 동일시되어 만물의 아버지(Father of all)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것은 인간의 제약된 자아사고에 기인한다.

우리의 아버지 상에(이미지)에 표현된 강렬한 정동적인 에너지는 지적 사막의 모래로 사라졌다. 이것은 마치 물질과 영혼이 격리되어 동양과 서양의 각기 다른 상징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세계의 원리를 서방에서 말하는 있는 것은 남성이며, 영혼 또는 심혼(spirit)이라 부르거나 물질주의를 중요시하는 공산주의의 개념과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모른다는 것이 현대인의 문제이다.

상징의 기능상실은 현대인에게 정신의 조화상실로 드러난다. 융은 현대인의 상징에 대한 무지(無知)와 무관심을 지적한다. 그것은 인간 정신세계의 조화를 상실하므로 인해 우주에서 고립되는 결과인 것이다. 융은 그 근본원인을 자연현상과의 무의식 동일성을 알지 못하는 현대인의 상징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찾는다. 그것은 물질에 내포된 상징적 의미를 상실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제 천둥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고, 번개는 복수의 화살이 아닌 것과 같다. 영혼을 가진 강(江), 인간의 생명원리인 나무, 지혜의 화신(化身)인 뱀, 괴물의 집인 산 속의 동굴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의 언어를 상실함으로 인하여 인간의 영혼이 자연과의 교감이 중단됨을 의미한다. 자연과의 교감이 중단되어 인간의 정신은 조화를 상실해간다.

인간의 영혼과 자연과의 대화는 단절을 지향할 뿐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자연의 바위, 식물, 동물들이 인간에게 말하는 음성을 이제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다. 이것은 정신세계에 막대한 손실임에 틀림없다. 인간과 자연과의 접촉을 사라지게 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2) 의식과 무의식을 관련시키는 기능

꿈의 상징은 의식과 무의식의 연관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정신의 본래의 특질, 즉 본능과 특이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언어로 상징된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데, 꿈은 합리성을 초월한 비합리적 언어, 신비한 상징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난점을 갖게 만들었는데 상징은 부득불 합리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의식작용인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 합리와 비합리를 나타내야 하는 불연속성의 관계가 인간의 정신계를 격리 및 고립시키는 요인이다. 이는 현대적 언어가 원시적 장애물, 즉 그 대상과 관련지어진 신비스런 관계를 벗어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자연히 합리의 언어도 그 위력을 상실해간다.

인간은 신비스런 신화의 세계나 미신을 말끔히 청소한 것처럼 보인다. 귀신과는 다른 대상을 주문을 외어 불러낸다거나 어떤 마술의 공식, 늑대사람, 숲의 정령, 태고의 원시림에 살았던 기괴한 것들, 마녀나 마법사 등은 모두 미신적인 것이기에 그 신성성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의 정신에서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제거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내적세계, 그것에 대한 원망충족이 허구가 아닌 원시성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여러 징후들을 발견한다. 동양의 4(四)는 죽음을, 서양의 13은 꺼리는 숫자로 아직도 남아있다. 비합리적인 편견과 투사, 그리고 현대 지식인이 이해하지 못할 소아적인 환상은 여전히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원시적인 경향과 유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현상들이다. 인류는 정신발달에 그 혼합성, 즉 오랜 세월에 정신발달 과정에서 습득한 특성들로 혼합된 것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들이다. 상징은 여기에서 산출되며 상징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혼합체는 상징을 산출하는 그릇이며 이해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상징은 또한 그런 측면에서 주의 깊게 검토되어야 하고 다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상징력은 오늘날도 사라지지 않은 채로 현대인의 삶에 공존하며 정신에서 나타나고 있다. 회의(懷疑)와 과학적 확신이 낳은 편견, 시대착오적인 습관들, 완고한 오해, 맹목적인 무지들이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은 상징을 산출하는 주체인지 모른다. 아마도 이는 심리학자들이 연구 및 해석해야 할 책임과 과제일 것이다.    

4) 꿈의 표현으로서의 기능

꿈에서 상징의 역할은 특이하다. 꿈에서의 상(像)은 상징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때 상징은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추측하여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 분석심리학의 원칙 중의 하나이다. 꿈의 상징성에 대한 고대적인 사고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곧바로 반박을 불러일으켰지만, 꿈이 뭔가 의미심장하기에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제 인간 오성에 평범한 것이 되었다.

일찍이 우리는 이집트와 갈데아의 해몽가들에 대해서 들은 것들이 있다. 파라오 왕의 꿈을 해석한 요셉(창세기 40장)에 대해,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의 꿈(다니엘4장)에 대해 알고 있으며, 또한《꿈의 해몽서》를 쓴 아르테미도로스(Artemidoros)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모든 시대와 민족의 문헌들은 신이 보낸 예언적인 꿈, 재난을 예고하거나 치유력이 있는 꿈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현대적인 사고로는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신이 꿈을 만든다거나 꿈이 예언자처럼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해준다고 생각하기에는 힘들지만, 그것을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고대 그리스적인 견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꿈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혼의 어떤 부분에서 생겨나 다음날을 준비하고 다음날의 사건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내려온 바에 의하면, 신이나 악마는 잠든 사람에게 상징적인 언어로 말하며, 꿈 해석자는 수수께끼의 언어를 번역해야 했다. 이것은 꿈이 언뜻 보기에는 모순에 가득 차고 무의미한 일련의 상이지만, 그것이 번역될 경우 하나의 명료한 의미를 드러내는 정신의 자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꿈에서 상징은 인간의 근원적인 정신을 인간의 진보된, 분화된 의식 속으로 운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보된, 분화된 정신은 그리고 의식은 근원적인 정신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정신분화의 과정에서 유일하게 알 수 있었던 근원적인 정신이 내동댕이쳐진 상태이다. 따라서 심각한 자기반성의 체험이 없이는 이에 대한 심각성은 더해 간다.

먼 옛날에는 근원적인 정신이 인간의 인격에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로 통일된 전체를 이루었다. 이제 원시적 특성들을 담고 있는 무의식의 이해에 눈을 떠야 할 때가 되었다. 무의식은 근원적인 정신의 일부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꿈의 상징을 통하여 분화된 정신, 즉 의식에 전달하고 있다. 그 원시적 특성들이란 정신이 발전하면서 그 자체로부터 떨쳐버린 환상, 공상, 고태적인 사고형태, 기본적인 본능 등을 말한다. 무의식은 상징을 통하여 이를 돌려주려고 한다.

이런 상징의 역할을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무의식적 상징이 출현하면 자학이나 공포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상징의 원형적 특성에 관련된다. 상징의 원형적 특성들은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 대단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에너지는 실로 무의식적 원형의 특성인 것이다.

때로 무의식의 상징 특성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정신에서 이 특성이 억압되면 자칫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들을 억압하면 할수록 신경증의 형태로서 인격전체에 더욱 확산되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의 상징은 정신에 에너지를 제공한다. 꿈의 상징이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말은 움직이는 동력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너지 자체를 증명할 수는 없으나 움직이는 자체가 곧 에너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마치 흘러내리는 물은 에너지에 의한 것과 같다. 상징도 정신에 무언가를 표현함으로서 그 에너지를 발휘한다. 꿈에서의 상징은 주로 근본적인 무의식적 특성을 나타내어 정신에 활력소를 제공한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회상과 관련시킬 수 있다.

꿈의 상징은 어린 시절의 회상이나 다른 개인경험을 떠오르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적인 정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만약 유아기 시절의 기억이 회상되었다면 상징의 에너지가 발휘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상징의 과정은 대체로 기억에 빈틈이 생긴 것을 상징이 일깨워 줌으로써 어린 시절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때로 어린 시절의 회상은 단순한 기억회상으로만 아니라 원시적 심상을 복원시키는 에너지 제공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기억의 때에는 원시적 심성의 상실에 관계된 증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2. 상징을 해석할 때 유의점

상징은 그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종류가 다양한 만큼 그 표식도 다양하다. 이 다양한 상징에 대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한 번에 알기는 어렵다. 상징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춘다하더라고 그 경험과 적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상징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상징의 의미파악을 위한 몇 가지 주의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1) 상징의 표출되는 의도와 관련성을 구분

꿈에서 표출되는 상징은 그 의도와 관련성을 구분해야 한다. 꿈에서 상징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꿈을 해석하는 작업의 일환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꿈에서의 상징과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체험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련성을 구분해야 한다. 표출된 상징이 개인적인 체험과 관계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의식적 지식으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위해 꿈에 의해 선택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꿈에서 상징의 구분은 상징의 해석에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상징의 해석으로 인해서 꿈이 주는 메세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의 4(四)자라는 숫자가 나타난 꿈을 꾼 사람이 있다면 꿈꾼 사람이 그 숫자의 불길한 성질을 습관적으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그 꿈이 단지 사람들이 아직도 미신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것은 해석에 큰 차이를 초래한다. 꿈을 꾼 사람이 미신적인 사람이면 이 4(四)는 그 마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호텔에 가면 이 4(四)를 피하려 한다거나 4(四)로 명시된 어떤 것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별다른 미신의 뜻을 갖지 않는 사람은 악의가 들어 있다거나 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더 합리적인 사람은 그것이 가지고 있던 의미를 벗겨버릴 수 있는데, 이느 단어의 이미지로서 뿐이다. 단어와 이미지의 특성은 차이가 있다. 단지 그 단어에 대한 이미지만 있을 경우 그것은 단어의 이미지일 뿐 아무런 효과는 없다.

그러나 정동의 임무를 띠고 나타난 상징이라면 그 이미지는 정신적 에너지, 즉 신성력을 얻게 된다. 그것은 동적인 것이 되어 어떤 결과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개 원형론에서 나타나는 상징의 형태들이다.    

2) 원형의 상징에서 유의점

원형의 상징은 일정한 형태가 없다. 상징이 원형의 표현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원형에 있어서 단어사용은 그 개념을 파악한다거나 핵심을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기술하기 위하여 단어가 이용된다.

그런 점에서 원형의 상징은 기계적으로 배운다거나 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그런 도식이 아니다. 상징은 일정한 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유동적이고 생명의 다양성과 같은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다만 정동이라는 교량이 의해서 살아있는 개체에 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이면서 상(像)이다. 이것은 원형과 관련된 상징은 기계적이고 일반적인 것보다는 개인적과 관련시켜 해석 및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원형의 상징이 인위적으로 해석하는데 주의를 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신앙이 독실한 기독교인이 꿈에 십자가를 보았다면, 대체로 기독교라는 제한성을 갖는다. 십자가 그 이상을 보아야 할 강력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한에서는, 오직 기독교적 연관성에만 해석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물론 특수한 기독교적 의미를 고려해야 할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십자가의 상징은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일률적인 경우가 된다면 십자가의 상징은 단지 말에 불과하여 신성력이 박탈됨으로써 그 생명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3) 상징의 원형적 표현에서 감정적 색조의 이해

상징이 원형의 표현에서는 감정적 색조를 이해해야 한다. 원형은 그 특성상 감정적 색조를 띠게 되기에 동일한 이미지라도 표현의 색조가 다른 것과 같다. 실제로 꿈에서 태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원형상은 대개 그런 색조를 갖고 있다.

원형은 인간정신의 본질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것과는 그만큼 구분되고 있다. 그러나 원형상이라고 해도 신화적인 것과는 다르다. 신화는 인류의 희구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원형은 가감(加減)이 없는 본래의 '있는 그대로'의 특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가 인위적인 것이라면 원형은 정신의 깊은 심층으로서의 자연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형의 특수한 감정적 색조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 신화적인 개념과 혼동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원형의 감정적 색조는 신화적 개념의 혼합과는 다르다. 그 혼합은 자칫하면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살아있는 개체를 동일한 화학적 개체로 보는 것과 같은 경우가 된다.

원형과 관계된 개인의 특수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형이 왜, 그리고 어떤 형태로 살아있는 개인에게 의미가 있는지를 찾아내어야 비로소 생명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는 분석자가 원형과 관계된 상징의 의미, 원형의 신성력을 숙지 및 탐구해야해야만 할 과제인 것이다.

4) 원형의 상징과 생명력과의 관련성

원형의 상징은 대개 신성력을 지니는 것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원형으로 나타나는 상징들은 대개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생명력과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다. 이런 이유로 분석자가 만약 이런 원형과 관련된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즉 신성력을 체험해 본 적이 없다면 상징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 이 경우에 원형의 상징은 어떤 것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공허한 낱말에 불과할 수 있다.

때로 상징은 잘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공허성을 갖기도 한다. 상징의 공허성은 분석자에 관련된 원형의 형태만을 중요시하는 제한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다. 그 때문에 상징의 원형으로 인해 살아있는 개체의 관련성을 살려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분석자는 원형이 지니고 있는 상징의 체험성을 중요시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 원형들이란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일차적으로는 아니마, 아니무스, 현자, 태모, 등이며, 이차적으로는 성인, 현자, 예언자 그 밖의 경건한 신앙인들 그리고 세계의 모든 태모에 관한 것이다.

5) 상징에서 대극의 통합

꿈의 상징은 정신의 대극들을 화해 및 통합시킨다. 꿈에서의 상징은 정반대되는 정신적인 특성들, 소위 대극(對極)들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다. 서로 다른 특성들을 조화 및 화합시키려는 상징은 정신의 신비한 수단이며 가장 중요한 역할의 하나이다.

서로 다른 대극의 특성들이 공존하려면 반드시 이런 역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꿈에서 그렇게도 중요한 상징의 통합능력이다. 따라서 상징의 통합성은 순수한 언어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정신적 현실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원형을 구분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원형의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다른 원형의 특성을 해석해내지 못하고 잘못 교환하는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각기 원형이 가진 상징의 특성과 정동적인 가치를 꿈의 해석과정에서 전체적인 지적(知的)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것은 사고와 감정의 대립관계로 극단을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다.

사고와 감정이 정반대로 대립되어 있는 현상은 사고가 감정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위험성은 상호 정동적인 가치의 상실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만약 감정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으면 정신과 현상과 생명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놓칠 수가 있다.

꿈에서 상징의 유의점은 후술하게 될 꿈의 해석에서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꿈의 해석은 이런 상징의 제시를 위하여 간단한 실례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상징의 특성이나 기능은 사실상 연구보다는 경험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강하다. 상징을 이론적으로 공부했다고 해도 그것을 경험적으로 활용하여야 실제로 이해될 것이다. 상징은 경험적으로 이해될수록 그만큼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다.

상징에 대하여 눈을 열고 귀를 열어야 더 상세하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 이는 마치 꿈을 기록하는 과정과도 같다. 처음 꿈을 기록하려면 기억되는 부분이 적어서 별로 기록할 것이 없다. 그러나 점차 기록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이 더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된다. 환자도 자신의 꿈을 기록해 나가는 중에 스스로 놀라게 되는 이유이다. 이는 의식하는 만큼 발전하는 원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앞장에 이어서 꿈과 상징에 대해서 기술했다. 꿈은 무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전제된다고 했다. 무의식을 잘 알아야 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꿈의 특성이 중요시된다는 점에서다.

꿈은 무의식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상징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데, 이는 상징이 무의식을 표현하는 중요한 언어라는데 기초한 것이었다. 물론 꿈에서도 의식적인 차원의 논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상징으로 표현되는 것이기에 상징의 해석에 따라 꿈이 다르게 되는 원리로 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