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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2:1-4) 

성경에 장절은 없었다. 

성경을 저작한 작가들은 장절을 구분하지 않았고 그런 의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성경에 장절이 최초로 구분되어진 것은 1551년 제네바에서 출판된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판입니다. 구약은 오래 전부터 문단은 구분해서 읽었지만, 장절 구분을 숫자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12 세기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장절을 구분하여 읽는 것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또 인용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 반작용이 만만치 않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신자는 가능한 원래 성경이 저작된 그대로 장절을 구분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대에 인위적으로 구분된 장절에 따라 그 의미를 부분적으로 나눠 해석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럼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의도했던 바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본문이 바로 그 대표적 예인데도 거의 대부분이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본문이 포함된 마가복음 2장 1-12절은 신자들이 익히 들어 잘 아는 내용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의 치유를 받게 하려고 친구들이 침상에 메워가지고 왔지만 사람들이 많아 도무지 주님께 나아갈 수 없어서 지붕을 뚫고 내렸습니다. 참으로 본받아야 될 대단한 믿음입니다. 주님도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4절) 말씀 한마디로 완전히 고쳐주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한다고 믿음에는 반드시 신자 쪽의 의지적 결단과 헌신과 실행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갈급하게 찾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선적으로 만나주십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가 순전하고 올바르게 이어지는 것에 최우선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분과 떨어지거나 멀어지지 않도록 무시로 말씀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이런 해석과 적용은 분명히 옳습니다. 문제는 본문을 새로운 장으로 구별해 놓으니까 앞의 구절과 독립된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자와 그 친구들이 굳건한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갔다는 사실에만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장절 구분 없이 죽 이어서 살펴볼 때에 얻을 수 있는 의미와 은혜와 많이 동떨어집니다.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수일 후에 일어난 일

본문은 "수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수일 전에 어떤 일이 있은 후에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각기 별개 사건처럼 보이는 앞뒤의 두 사건이 그 내용상 연결되는 맥락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시간적 순서를 밝히려는 의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일 후"라는 것은 비교적 짧은 시간밖에 경과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갔다"라고 합니다. 그럼 동일한 장소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입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이라면 구태여 비슷한 시간과 동일한 장소를 배경으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바로 이어서 기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두 사건에는 분명 연결된 고리가 있으니 그것을 찾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라고 봐야 합니다.  

수일 전에 주님은 불치병인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막1:42,43)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45절)고 말합니다.  

기적적인 치유를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치료를 받은 자가 떠벌리는 바람에 주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주도적 능동적 선교 여행을 못하시고 소극적 수동적으로 사람들이 당신께 나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수 일이 흐른 것입니다. 

본문 2장 1절 초반은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일 간 조용히 한적한 곳에 계시다가 주님이 주도적 적극적으로 뭔가를 작정하시고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다시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저런 불편함, 부작용, 폐해 등이 생긴다할지라도 그보다 더 중요하고 꼭 행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비밀로 부치라고 한 진짜 이유

가버나움에선 당연히 주님이 다시 오셨다는 소문이 나고 사람들은 더 반갑게 맞이했을 것입니다. 곧바로 몰려든 사람들로 주님이 계신 집이 완전히 둘러싸이고 입구 문마저 막혀 용신 즉, 몸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문둥병 환자의 떠벌림이 아주 큰 작용을 한 것입니다. 또 중풍병자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다시 주도적으로 행하신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마4:2)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한창 말씀을 전했고 용신도 못할 정도로 모인 가버나움 사람들은 그 복음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건하고 조용했던 분위기를 갑자기 깨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천장에서 침상에 누인 환자가 내려왔습니다. 자연히 복음전파는 중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수일 전에 문둥병자더러 그 치유를 비밀에 부치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단순히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표면적 이유일 뿐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환자들이 모여들면 당신께서 정작 행하셔야 할 복음 전파가 방해 받을 것을 더 염려했던 것입니다. 마가가 "수일 후에"라는 말로 두 사건을 연결시킴으로써 독자들이 깨닫기를 바랐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적극적 능동적 믿음은 우리 모두 반드시 본받아야 합니다. 어떤 현실적 고난과 훼방이 있어도 신자는 주님께로 최대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역으로 따지면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림으로써 주님의 복음 전파가 중간에 끊겼습니다. 거기다 중풍도 중병이긴 하지만 다른 불치병 환자들도 있었을 것인데 일종의 새치기를 한 꼴입니다. 아무리 은혜가 갈급했고 또 고의성은 없었어도 결과적으로는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힌 셈입니다.   

그럼에도 주목할 사항은 주님이 그들을 전혀 꾸중하지 않고 싫은 내색도 비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믿음을 보시고 군말 없이 완벽하게 치유해주었습니다.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권능을 여실히 베풀어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모습이든 주님 앞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은혜를 바라보며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불치병은 죄의 형벌(?)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성경을 좀 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고 생뚱맞은 말씀부터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죄 사함을 베푼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참람 죄에 해당됩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인지라 주님에 대해 아주 생소했으므로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고 반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대놓고 거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그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8절) 그들 마음의 생각까지 아시는 주님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심과 반발을 해소하려고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까닭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2:9,10) 

죄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이 그대로 이뤄졌는지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증험을 아무도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자라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사람들 눈앞에서 반드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거짓말인지 판명 됩니다. 

무엇보다도 죄 사함을 주는 것은 물론 중풍병자를 말씀 한마디로 낫게 하는 것, 둘 다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절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또 그렇게 선포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닙니다. 거기다 유대인들은 중풍 같은 불치병이 생긴 것은 선조나 본인의 지은 죄가 크고 많아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그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당신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그 질병도 함께 낫는 모습을 그들 앞에 보여주어서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사실 처음부터 당시의 정황과 서기관들의 생각까지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칠 능력을 충분히 소지했기에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반발할 것을 다 알고서 잠시 기다린 후에 완전하게 치유해주었던 것입니다. 당신께서 죄 사함의 권세는 물론 그 형벌로 보이는 불치병을 치료하는 능력도 함께 갖춘 완전한 메시아임을 보여줌으로써 더 이상 입도 벙긋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으로 따져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치유에 앞서 선포한 것은 바로 메시아의 신분과 자격과 권능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죄를 사해주러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중풍 같은 불치병을 말씀 한 마디로, 아니 초현대식 기기를 동원해서도 고칠 능력은 지금까지도 갖지 못합니다. 거기다 인간인 주제에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감히 선포할 만한 믿음을,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을 가진 인간은 더더욱 없습니다. 이단 교주나 정신 이상자가 아닌 다음에는 말입니다. 
  
치유보다 구원이 먼저다.
  
주님의 그 선포는 당신의 메시아 사역의 핵심과 본질이 "죄 사함을 주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힌 말씀입니다. 치유보다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되풀이해서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이 사건에서 반드시 주지해야 할 더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중풍병자가 치료받지 않았어도 주님의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그 간단한 한마디로 구원은 완전하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완료된 동작으로 말씀하셨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고, 무엇보다 그 병자를 긍휼히 여기셨고, 나아가 유대인들의 반발까지 미리 예상하셨기에 중풍은 어차피, 아니 당연히 치료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중풍병자에 대한 주님의 주된, 아니 절대적인 관심은 오직 죄에서 구원해주려는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죄 때문에 중풍 병이 생겼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성경이 말하는,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다루시는 원리가 결코 아닙니다. 족장 시대 사람이었던 욥이 겪은 그 큰 불행이 그의 죄 때문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이 중풍을 고쳐주시면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기복주의 신앙관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꼴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죄를 온전히 사함받기 위해선 반드시 치유도 완전히 이뤄져야 한다는 오해를 발생시킬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로만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과 "실제로 병을 고쳐 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운지 먼저 물어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에 완벽하게 고쳐줌으로써 오직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이 죄 사함을 과거형으로 먼저 선포했기에 그 말씀으로 치료 전에 이미 구원은 완벽하게 이뤄졌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주고 안 주고는 구원과 별개의 일입니다. 그런 현실적 축복은 오직 주님의 주권에 딸린 일입니다. 그 중풍병자에게 치료로 구원이 확정되고 보장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 치료되는 축복까지 함께 받은 것입니다. 

중풍 병이 나음으로써 즉, 그에게 가해진 하나님의 형벌이 제거됨으로써 구원이 달성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과 주권적 시혜(施惠)로만 이뤄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의 길과 유대인들의 알고 있는 구원의 길의 차이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은 의도적으로 먼저 "죄 사함의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본문이 별개 사건이라면?

이제 본문을 장절이 구분된 상태로 끊어서 읽은 것과 그런 구분 없이 죽 이어 읽는 두 경우의 해석과 적용을 비교해 봅시다. 본문을 앞선 장과는 완전 별개로 떼어서 읽으면 적극적으로 믿어서 은혜를 받아내어야 한다는 뜻만 강조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의 순수하고 온전한 관계를 신자가 적극적으로 유지 발전 성숙시켜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문제는 적극적 믿음을 강조하고 또 그래야만 하나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근거와 보장으로 본문이 잘못 인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 믿음은 거의 언제나 현실적 축복이나 치유가 그 믿음의 최종 목표가 됩니다. 또 그러면 쉽게 광신적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반드시 적극적으로 얻어내야 할 것이 있으니까 능동적으로 자기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 지향하는 목표지점은 이 땅에서의 안일과 형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자들에겐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다는 그 특권과 신분에 대한 감사는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그런 인식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뜨겁게 믿어서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니까 아직 자기가 바라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필연적으로 자신은 많이 부족한 신자로 스스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어 있지 않다는 자괴감만 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는 아주 약해지거나 거의 실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또 믿음이 예수님과의 순전하고 올바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라는 근본 의미를 모르거나 등한시 합니다.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 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늘의 생명책에 자신이 이름이 이미 기록되어 있기에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풍성하고도 오묘한 의미와 은총을 전혀 누리지 못합니다. 아니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뜨겁고 열성적 믿음을 동원해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싸움만 평생을 두고 지루하게 행합니다. 어떻게 하든 현실적 복을 더 많이 받아내는 믿음이 강하고 좋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주님이 불치병을 기적적으로 치유해주지 않는 경우가 더 일상적인데도 오직 기적만을 신앙으로 쟁취할 목표가 됩니다. 기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고,  질병을 치유해주지 않는 훨씬 더 자주 있는 경우에 대해선 더더욱 그래야 함에도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만 쌓아갑니다. 고난이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자신의 삶과 영성에 실현하면 더 큰 은혜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일은 완전히 뒷전입니다. 오직 종교적 열성만 잔뜩 들고 나와 주님께 잘 보이려고만 노력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이 정성과 열심을 보여서 그 신의 복을 받거나 최소한 저주는 막아보려는 행태와 똑 같습니다.  

본문을 연결해서 읽으면?

반면에 장절 구분 없이 1,2장을 죽 이어서 해석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현실적 축복이 아니라 오직 천국 복음을 전하며 죄 사함을 주시려 오셨다는 사실이 절대적 전제가 됩니다. 주님이 문둥병자에게 엄히 경계하사 불치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까닭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귀찮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직 치료만 받으러 오는 것은 사절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오늘날에도 오직 그런 목적으로 나오는 자는 주님이 만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히 유감스럽게도 작금 오히려 그런 자들만으로 교회가 가득 차있습니다. 상당수 목사들과 교회들이 질병, 사업실패, 학업부진 등의 현실적 고난들은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다 해결 받는다는 식으로 불신자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바로 앞선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별개 사건으로 해석했고 또 문둥병자에게 주님이 비밀로 붙이라고 당부한 이유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문둥병자가 기적적으로 병 나은 것을 떠벌림으로써 오히려 주님께 더 많은 이가 몰려왔듯이, 교회도 그렇게 하여서 교인 숫자를 늘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라도 교회에 일단 많이 나오면 좋지 않으냐 반발할 계제가 절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은 다 물리치고 오직 복음을 전하러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단 한 명의 죄인에게라도 십자가 죄 사함의 은혜가 온전히 흘러들어가게 만드는 통로가 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 봐야 아무런 실질적 도움이 목사와 교회에게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유대인들 생각처럼 죄 사함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반드시 현실적 축복의 형태로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오류이자 탐욕입니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쟁취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그 나라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문제나 환난이 있어서 그것을 해결 받으려 기도할 때만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통치를 항상 받고 있어야 합니다. 그분과 교제 동행하며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이 때로는 질병과 고난으로 이끌 수 있는데도 오직 그것에서 벗어나게만 해달라고 하면 주님의 뜻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엄격히 말해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동원해서라도 완악하고도 끈질기게 하나님 나라를 탈출하겠다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달파서 적극적으로 모든 난관을 뚫고 주님의 손을 붙든다고 주님이 그 적극성과 능동성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깊은 곳의 순전성과 진정성부터 검증하시고 당신만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과 섭리에 따라 고칠 자만 고쳐주십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관심은 죄 사함을 베푸는데 중점적 우선적으로 가있습니다. 질병이 낫지 않아도 죄 사함을 주시는 데는 아무 장애가 없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가장 시급하게 절대적으로 구할 것은 바로 죄 사함입니다. 적극적 능동적으로 쟁취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입장권입니다. 

역으로 말해 참 신자라면 자신의 죄에 대해, 자기 영혼의 가난함과 비참함에 대해 적극적 능동적인 참회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때만이 아니라 구원 후에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혹시라도 자신에게 주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지게 만들 만한 죄를 범했는지 또는 영적 나태함이 있는지 항상 적극적 능동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진짜로 절실한 치유는 죄에서 사함 받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미혹된 영혼이 성령님이 좌정하는 하나님의 전이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육체의 질병이든, 현실의 형통이든 오직 주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뤄질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적극적 능동적으로 구할 것은 자신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계획 즉,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인 것입니다. 

성경을 죽 이어서 읽으면 이 중풍병자의 기사에서 가장 중심 되는 구절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가 됩니다. 주님이 의도적으로 먼저 강조했기에 신자도 마땅히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면 현실에서 도무지 용신할 수 없을 만큼 주님과 나 사이에 다른 방해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도 주님은 나의 바로 곁에 계신다는 확신과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원 받아 천국 영광을 소지하고 있는데 세상의 고난들이 불편하기는 해도 그로 인해 두려울 것 하나 없어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장절을 구분해서 본문만 따로 읽으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구절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용신할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이 멀게 혹은 이해가 안 되게 보이면 지붕마저 뚫는 즉, 적극적 능동적으로 자기 의지로 믿음 생활을 뜨겁게만 하려고 합니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 살다시피 하고 심지어 교회 근처에 이사 와서 새벽 제단을 천일까지 쌓으면 어떤 문제도 다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그러지 않으면 믿음이 약하거나 바친 기도의 양이 부족하다는 이상한 가르침이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장에서 문둥병자는 주님의 당부를 어기고 떠벌리는 바람에 주님이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이 장에선 중풍병자가 천장을 뚫고 내려오는 바람에 주님이 도를 전하는 것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둘 다 야단치지 않으시고 전혀 괘념조차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당신의 구세주 되심을 더 완벽하게 모든 이들 앞에 증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에서 후대 성경 독자로 깨닫게 하고 싶었던 사항은 하나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더러 알게 하려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당신께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롬1:2)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아니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이 과연 무엇입니까? 적극적으로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당신께서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까? 이젠 어느 것이 정답인지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 참 신자라면 실제로 그 정답에 걸맞게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숨어서 조용히, 그것도 나중에는 생명까지 바치며 믿었습니다. 이 땅에서 형통과는 전혀 무관했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의 죄도 과거 시제로 완전히 사해주었고 또 부활마저 과거시제로 이미 연합시켜 주었다는 엄연한 사실 하나 뿐이었지 않습니까?   

[출처: 박진호 목사 홈페이지 http://whyjesuson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