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40대에 경비 일을 시작해서 벌써 50대 중반이 된 한 경비원이 있다. 경력 17년차 베테랑 경비원이다. 그래도 경비원들 사이에서는 '젊은이'로 통한다. 남들에게 속 시원히 틀어놓지 못할 설움도 많다.

어느 날 강남에 있는 어느 아파트 경비실로 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BMW 좀 빼 주세요!" 경비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승용차 키에서 BMW 마크를 찾았다. 비좁게 주차된 차 사이에서 BMW 차량을 간신히 빼냈다. 그리고는 운전대를 차 주인에게 넘겨준다. 주인이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갈 때까지 경비원은 경비실 밖에 서 있다가 인사하고 들어온다.

언젠가는 60대 남성 주민에게 가슴팍을 네 번이나 맞았다.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유는 '좋은 자리에 내 차를 대라'는 요구를 빨리 못 들어줬다는 게다. 물론 '바쁜 시간대라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어디 아파트 주민의 갑질이 그뿐인 줄 아는가? 조카뻘 되는 남성이 주차금지 구역에 주차하려고 했다. '그곳에는 주차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자 "평생 경비나 해쳐먹어라"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다른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아침부터 20대 여성 주민이 "내 택배 안 왔느냐"고 닥달했다. 택배는 저녁에야 도착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여성 주민이 경비업체에 불만을 제기한 게다. '택배를 숨겨놨다가 나중에야 알려줬다'는 게다. 결국 해명도 제대로 못 해보고 억울하게 해고당하고 말았다.

세상에는 정말 색다른 사람이 많다. 이렇게 안하무인의 위인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프고, 사람들은 신음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득실거리기에 고통으로 신음한다. 이런 태도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지옥이 엿보인다.

우리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한다.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동등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업신여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멸시한다.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잘난 체 한다. 큰 교회 목회자가 작은 교회 목회자 앞에서 은근히 잘난 체한다. 대형교회 성도가 개척교회 성도를 우습게 여긴다. 서글프게도 이론과 현실이 다르고, 이상과 실제가 엄연히 다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인간은 누구나 '대접받으려는 욕구'가 있다. 누군가 나를 대우해 주고, 대접해 줄 때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색다른 제안을 하신다. '대접 하려는 욕구'를 따라 살라는 게다. 누구나 이기적인 욕구를 따라 살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타적 욕구를 따라 살라고 하신다. 그러니 색다른 삶이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면 된다. 칭찬받기를 원한다면, 칭찬하면 된다.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면 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려를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 된다. 이게 천국 시민의 삶이고,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이다.

내가 누군가를 존중하면 상대방도 나를 존중한다. 누군가 나를 존중해주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그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롬 12:10)", 남이 나를 대접해주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잘 대접하면 된다. 남을 귀하게 여기는 자가 결국 귀하게 여김을 받게 된다. 부메랑 효과이다.

세상에 '무시당해도 될 만큼' 가치 없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길 만큼' 잘나고 대단한 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자이거늘, 나 하나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대속제물로 희생시켰건만, 사람들은 자꾸 소유나 세상적인 지위의 유무나 높낮이를 갖고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려 든다.

그런데 아는가? 세상에 차별받아도 될 만큼 너그러운 사람은 없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예수님은 어린아이나 여자, 가난한 자나 못 배운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에게는 접근금지의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셨다. 그들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색다른 분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제자인 우리도 '색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과 같은 '색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순 없을까?

천국 백성들은 '차별하고 가르는 문화' 속에서 '포용과 수용과 하나 됨'을 이룬다. 십자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화평'을 가져왔다.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둘이 '하나'가 됐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배타적이고, 터부시하는 세상에서 서로 끌어안고, 함께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문화를 만든다. 왕따를 시키는 세상에서 왕따당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품어준다.

그러나 정작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을 보면 가슴 아프다(약 2:1-4). 믿음을 가졌으니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눈빛이 달라진다. 관심이 다르다. 그런데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별 관심도 없다.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차별하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복음은 '존재가치'를 따라 사람들을 대하라고 한다. 그런데 교회마저 자꾸 '소유가치'를 따라 대한다. 사람의 외모, 능력, 소유, 사회적인 지위를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차별하려 든다. 더 이상 세상적인 가치와 원리를 추종하지 말고,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불행한 게 있다.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세상의 가치와 문화'에 너무 익숙하게 빠져 있었다. 복음이 내 안에 들어왔지만, 복음으로 내 안에 있는 '영적 독소'를 빼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익숙한 문화와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차별'과 '가름'이 합당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차별하고 가르는 문화에 끌려가고 있다.

우리의 연약함과 복음에서 벗어난 삶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대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접근해 가자. 복음이 요청하는 소리에 귀를 더 기울이자. 그래서 색다른 삶을 보고 사람들이 천국을 볼 수 있게 하고, 복음이 효과적으로 들려지도록 해야 한다.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