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Photo : ) ▲이경섭 목사.

 

 

하나님은 불택자(아직 택함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남용하는 것에 대해선 괘념치 않으시지만, 택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취해 방심에 빠지는 것에 대해선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선지자 사도들을 짖는 개(사 56:10), 파숫군(시 130:6), 목자(겔 34:2, 벧전 5:4)로 지칭한 것은, 그들의 사명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경계시키는 데 있음을 말합니다.

그 경고가 때론 부드럽고 때론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목적은 한결같이 택자들을 방심에서 건져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경고는 칭의유보자들의 주장처럼 칭의를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나온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 간음죄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실수 같은 것을 막기 위해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하신 계명 준수의 요구에도 언제나 경고의 의미가 함의돼 있습니다. 율법은 '언약 백성의 표징(히8: 10)', '죄의 자각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선생(갈 3:24)'의 역할도 하지만, 계명 준수의 여부에 따른 축복과 징계의 언약은-소위 '율법의 제3용도'로서의-방종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칼빈주의 교회가 엄격한 권징을 실시해 온 것은 율법의 제3용도에 충실한 결과였습니다.

이런 율법의 다양한 요구들에 직면해 있는 이신칭의론자들을 향해, 칭의유보자들이 율법폐기론자나 무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청교도들의 주일 엄수, 열정적인 선교와 구제, 엄격한 자기 통제력은 계명 준수의 열매들이었습니다. 특히 청교도들이 가진 두 가지 성경적 개념이 그들의 삶을 제어하고 정제(精製)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첫째, 물질에 대한 성경적 개념이 사치와 방종을 막았습니다. 부(富)는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인식과, 물질에 대한 청지기적 인식이 겸비함과 절제력을 낳았습니다. 또 이것이 물질이 지나치게 개인의 사적인 용도와 사치에 남용되는 것을 막고, 교회와 공동체의 선에 기여하도록 했습니다(딤전 6:17-19, 엡 4:9-11).

두 번째가 이신칭의의 근간인 예정 교리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위해 부름을 받고(살전 4:7-8), 선한 일을 위해 구원 예정을 받았다(엡 1:4-6 ; 2:8-10, 딛 2:14)는 자각이, 그들로 방종과 나태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었습니다.

동양의 '팔자소관 타령'이 사람들을 무기력한 숙명론에 빠뜨렸다면, 기독교의 예정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악을 제어하고 선한 삶을 꾸리도록 독려했습니다. 거룩과 축복에로의 소명을 받은 선민은 함부로 삶을 방임, 낭비할 수 없다는 자각이 근신(勤愼)과 근면을 북돋았습니다. 예정론을 숙명론이니 방종과 타락을 부추기는 원흉이라느니 하며 비난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의 기저에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대한 호소가 자리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계명 준수의 동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들이 계명을 지켜야 할 이유를 구원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 때문임을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우리는 예수님의 율법 준수 의미와 우리 그것과의 차이를 인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율법 준수의 모범자로 삼고, 그들의 제자됨의 표지를 그의 삶을 흉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 준수에 있어, 그리스도와 우리의 지향점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가 우리를 대신한 대행적 준수였다면(마 3:15), 우리의 율법준수의 동기는 율법 준수를 대행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경 전체를 축약한, 소위 쉐마(the Shema) 라고 하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의 전제가, 마음의 할례(신 30:6), 곧 의로 거듭나게 해 주심에 있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생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회개의 경고 역시 구원에서 떨어질까 하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일생 단 한번으로 족한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와는 구분됨-의롭다 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목욕한) 자는 온전케 되었으니, 다시 의롭다함을 받을(목욕할) 필요가 없고 발만 씻으면 된다고 했습니다(요 13:10).

여기서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은, 한 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재차 의롭다 함을 받을 필요가 없고, 잘못할 때마다 일상적인 회개로 족하다는 뜻입니다. 칭의를 종말까지 유보시킨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한번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는 안 되고 종말 때까지 반복적으로 계속 의롭다 함을 받아야(계속 목욕을 해야) 합니다. 이는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 13:1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상적인 회개의 발로는, 하나님 사랑을 남용하고 저버린데 대한 애통함입니다. 비유컨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탕자가 아버지께 불효한 것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애석입니다(눅 15:18-21). 이는 자기의 양심과 율법의 직시에서  나온 끝없는 자책과 죄의식과 다른,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이 되라는 권면 역시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정죄받을까 율법의 종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6년간의 노예계약이 끝나는 안식년에, 자유의 선언을 받은 종이, 자원하여 종이 되는 귀 뚫린 종처럼(신 15:16-17),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을 선언 받은 성도가 은혜에 감읍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의 종(servant for love)' 개념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그리스도가 베풀어주신 사랑이 감사하여 스스로의 자유를 반납하고 기꺼이 그의 종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약 4:7)', '깨어 마귀의 공격을 피하라(엡 5:8, 딤후 2:26)'는 경계의 말씀 역시 정확한 이해력이 요청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귀에 대한 경계는 마귀에게서 해방된 자들에게만 해당되며,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무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칭의가 종말 때까지 유보된 자들에게는 부득불 종말 때까지 의가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게 되고, 그렇게 의가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는 한 그들은 율법의 저주(사망) 아래 묶여 있습니다(롬 5:23, 고전 15:56).

그렇게 사망 아래 묶여 있는 자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가 그들을 장악하여 종으로 삼고 있습니다(히 2:14). 따라서 그들을 향해 '마귀를 대적하라'고 경고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칭의유보자들은 사람들을 향해 최후의 칭의를 쟁취할 때까지 칭의의 방해자 마귀와의 전투를 계속하라고 독려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마귀의 장악 아래 있는 자들에게 그러한 경계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하여 그들의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마귀에 대한 그들의 전투는 비윤리적인 것과의 전투이기에, 성경적 개념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칭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최대 방해물은 비도덕이고, 마귀의 주된 사역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비윤리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귀의 공격 목표와 그의 주된 사역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구속사적(救贖事的)인 것이라 말합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이 마귀를 궤멸시킨 것은 십자가의 구속(救贖)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계 12:11)'.

다시 말하지만 마귀가 사람을 장악하는 길은, 흔히 생각하듯 사람들을 비윤리적이고 타락된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지 못하게 하여, 율법의 정죄(사망) 아래 두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귀로 하여금 사람에게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길 역시, 마귀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망을 그에게서 없이 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죄값으로 삼아 율법이 더 이상 그에게서 사망을 요구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어 사망이 폐하여진 자만이(딤후 1:10)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이렇게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만이 마귀와의 전투가 가능해집니다. 이신칭의를 받지 못해 사망 아래서 마귀의 지배를 받는 자가 마귀를 대적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칭의유보자들이여! 마귀와 대적하고 싶으면 먼저 이신칭의를 입어 마귀의 세력권인 사망에서 벗어나십시오.

마지막으로, 이제껏 나열한 경고들을 충실히 이행했다 하더라도, 방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할애비 사랑에 듬뿍 취한 어린 손주가 버릇없이 상투잡이를 하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 도취된 성도도 부지불식간에 방심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심이 때론 칭의유보자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방종과 타락으로 비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까지 공의의 잣대를 들이대며 방종과 타락이라고 몰아세우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신앙이 미적분 공식처럼 그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정 그렇게 엄격주의로 나온다면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럼 당신네는 과연 의롭다 함을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계명을 실천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종말 때까지 중단 없이 지속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입니다.

나아가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의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도 묻고 싶습니다. '과연 당신의 순종은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에까지 미치는가?', '마음으로도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가?', '당신을 해치려는 원수를 위해 복을 빌며,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돌려 되는가?', '나병환자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성자 다미엔(다미안) 같이,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으신 손양원 목사님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예수님처럼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가?'

너무 기준이 높다고요? 본래 율법의 기준이 예까지, 예수님이 행한 순종까지입니다.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면 실격입니다. 그럼 기준을 좀 낮추어 제시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수입 중 얼마를 선교와 구제에 봉헌하며, 하루에 기도와 선행은 얼마나 하고, 지상 명령인 전도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가?'

여기에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칭의는 물 건너갔습니다. 어떡하렵니까? 그래도 이신칭의를 붙들지 않으시겠습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