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21장은 책으로 말하면 부록처럼 덧붙은 내용인 점이다. 20장에서 전체의 결론을 매듭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장도 아주 소중하고 귀한 말씀이다.
일곱 명의 제자에게 나타나신 주님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한 번만 나타내셔서 믿기 어렵게 하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충분히 믿을 수 있도록 여러 번 나타내셨다. 여기 또 한 번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14절 말씀에 의하면 이것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른 공관복음과 서신서 등을 참조하면 열두 번 정도 나타나셨다. 1)막달라 마리아에게(막 16:9, 요 20:11-18), 2) 여인들에게(마 28:9-10), 3)엠마오의 두 제자에게(눅 24:13-3), 4) 시몬에게(눅 24:34, 고전 15:5), 5)도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요 20:19-25), 6)도마 있을 때 제자들에게(요 20:26-29), 7) 디베랴 바다에서 일곱 제자들에게(요 21:1-4), 8)갈릴리 산에서 제자들에게(마 28:16-20), 9)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고전 15:7), 10)주님의 동생 야고보에게(고전 15:7), 11)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서 11제자에게(행 1:4-9), 12) 승천 후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행 9:3-7), 이외에도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나신 것이 있을 것이다(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행 1:3 참조).
(2절)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 기록하면서, '다른 두 제자'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모두 일곱 명이 모여 있었다. 나다나엘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바돌로매이다(마 10:3).
(3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들이 주님을 만나기 전의 직업은 어부였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했다. 이제 제자들 일곱 명이 모인 자리에서 언제나 행동이 빠르고 주도적인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나섰다. 고기라도 잡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는 분명 뒤로 물러선 일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기에 그의 본분은 전도였지, 어부가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대로 직분을 떠나 성공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여섯 명은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선다. 이처럼 베드로는 리더형이다. 그런데 그들은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4-6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님이 새벽녘에 나타나셨다. 그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우리 성경에는 '얘들아'라고 부르셨지만 헬라어 원문으로는 '여러분들, 거기 고기가 있습니까?'라고 했다. 즉 자연스러운 어투로 그들에게 말을 거신 것이다. 주님은 뒤로 물러간 자들이라 해도, 부드럽고 은혜롭게 대하시며 회복시키신다. 주님은 그분을 섬기는 자들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 필요를 돌보신다. 매우 친근하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말이다. 그들은 맥빠진 말로 없다고 이야기하자, 주님은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니 놀랍게도 수많은 물고기가 올라온 것이다. 153마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기가 심히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7절)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가난한 제자들
그때 요한은 베드로에게 그분이 주님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던 초기에 이런 일이 한 번 있었다(눅 5:4). 그러기에 요한은 쉽게 주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베드로는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들었다. 요한은 베드로가 가장 주님을 알면 기뻐할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기에 그에게 말했고, 예상대로 베드로는 사랑하는 주님께 1분이라도 빨리 나아가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베드로는 순식간에 움직였다. 겉옷을 두르고(주님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바다로 뛰어들었다.
당시 제자들은 가난했다. 주님을 3년간 따라다녔어도, 여전히 먹을 것이 없었다.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늘날 전세계 그리스도인의 초석이 된 사람들은 바로 이처럼 가난하고 별로 배우지 못한 어부들이었다. 주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용해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신 것이다. 수많은 학자, 의사들, 대통령들,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 플라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영지주의 이단도 있었던 때에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썼고, 이 글들에 의해 소위 고차원적인 지식들이 다 굴복된다. 주님이 요한 같은 사람을 사용하셨다면 여러분도 충분히 사용하실 수 있다.
각기 다른 성품과 은사
또 한 가지 기묘한 것은 요한 사도의 기록을 통해서 제자들의 서로 다른 성품이 은연 중에 나타났지만, 이들은 서로 잘 연합했다는 사실이다(요 20:3-4). 베드로와 다른 제자(요한)가 무덤으로 갔을 때 둘의 행동은 확연히 달랐다. 요한은 자기를 밝히지 않아서 항상 '다른 제자' 혹은 '사랑하는 제자'로 표현했다. 요한은 더 빨리 달렸지만, 정작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구푸려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뒤따라갔던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이처럼 성품이 달랐다. 다시 21장 7절로 돌아가자. 요한이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단연 요한이다. 그러나 요한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 후에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처럼 베드로는 행동파이다. 그러니까 겟세마네에서도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쳤다. 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할 망정, 치고 보는 것이다. 생각이 섬세하고 예민한 요한이 먼저 알지만, 행동은 베드로가 먼저이다. 그래서 그는 리더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짧은 서신인 베드로전후서만 썼다. 하지만 요한을 보라. 요한은 섬세한 사람이다. 요한복음 같은 심오한 책을 썼다. 학자들은 지금도 이 책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지만 아직도 다 알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는 또한 요한 일이삼서와 계시록도 썼는데, 그 심오함 때문에 수많은 이단이 생겨났으며 수없이 많은 다른 해석들이 나왔다. 누가 더 좋다고 말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므로 주님이 지으신 여러분의 기질대로 주께 영광을 돌리기 바란다.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저 사람은 틀렸다,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그러하기 때문에 좋고, 그 사람은 저러하기 때문에 또 좋은 것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은 교회의 원리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각양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들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주님이 하시고 싶은 많은 역사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당신의 뜻대로 창조하셨다.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을 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고 각각 다르다. 하지만 각각의 지체들에게는 다 특징이 있고 그들은 나름대로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각자 주님이 주신 은사들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여 자기의 달란트를 교회에 공급할 때 교회는 부요해 질 수 있다. 다양한 은사자들이 서로 존중 받는 가운데 기능을 발휘할 때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지 정말 기대가 된다. 그럴 때 온 세계에 불이 붙을 것이다.
(8절)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 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오십 간은 100야드쯤 되는 거리이다. 베드로 외의 다른 제자들은 뛰어 내리지 않았기에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기 때문에 주님이시라고 하자 천천히 배를 타고 갈 수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성격이 좋다. 베드로의 마음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으로 가득했다. 사실 그는 조금 움츠러든 상태였다. 전도를 하러 가야 하는데, 고기나 잡으러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불이 들어 있었다. 메시지를 두 시간 전해도 그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보다는 이런 성격이 좋다고 느낀다. 나중에 어떻게 될 망정, 일단 타오르고 보는 것이 좋다. 그 속이 살아있기에, 몇 마디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 헌신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이 나는 정말 좋다.
(9-11절) "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9절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제자들을 보살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시는 주이시다. 진실로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섬기는 자들, 따르는 자들을 주님은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다. 10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다. 주님이 도와주셔서 잡은 것이다. 모든 공급은 주님으로부터임을 잊지 말자! 물고기가 많이 잡혔지만,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다. 주님은 알맞은 양만 그물에 잡히게 하셨다. 그분은 만유의 주시다.
(12-14절)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주님은 잠깐만 보고 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말씀도 하시고 음식도 차려 먹이시면서 오랜 시간 함께 계셨다(눅 24:36-43).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다르다. 그러면서도 같다. 손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다. 만져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음식도 드신다. 이런 비밀한 몸을 입으신 분이 주님이시며 이분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시다.
주님은 제자들을 삼 년 반이나 가르치셨다. 하지만 주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 증거를 보았음에도, 고기나 잡으러 간 제자들을 볼 때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는가? 그런데 주님은 이런 상황에 있는 그들을 현재 상황에서 돌보신다. 꾸짖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켜 온전한 상태로 이끌어 주신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은 놀라운 사람들이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 같은 사역자들에게 귀감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제자들을 돌보시는 주님
우리 주님은 이렇게 자기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멀리 떠나간 제자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셨다. 마태복음 6장 말씀을 그들은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그럼에도 그들은 먹을 것을 염려하는 수준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떡과 물고기를 예비하심으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보여주신다. 이들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 놀라운 주님에 대해 잊어버렸다. 자기들이 고기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제자들이 밤새도록 못 잡던 물고기를 말씀 한 마디로 잡게 하시더니 이제 떡도 있고 생선도 구워져 있다. 주님은 당신이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다시금 알려주신다. 이때 제자들은 '아!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구나' 믿게 된다. 우리는 주님이 도와주시지 안으면 잘 믿지 못한다. 여러분이 정말 진실하게 따른다면 주님이 도와주신다. 그리고 돌보신다.
또한 우리가 이 구절에서 놀라운 것은, 그 순간 물고기 수를 센 점이다. 153마리를 기록했다는 것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여러 의미를 부여한다. 먼저, 153마리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단지 '많다'고 하지 않고 153마리를 세었다는 것은 주님이 도와주시고 은혜를 주신 한 가지 한 가지를 우리로 하여금 헤아리도록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각각의 일에서 우리를 도와주신 것을 기억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도로 구체적으로 헤아리도록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그분의 사명을 받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복시키시는 주님
그러면 베드로와 일곱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생계 문제이다. 어떻게 살아나가는가, how to live, how to survive, 이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다. 이 부분이 근본적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다음 걸음을 뗄 수가 없다. 이것이 이들에게 1차적 필요이다. 이 부분에 있어 그들의 입을 막아야 그 다음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에게도 이 일곱 제자처럼 절박하고 긴급하게 마음속으로 '나는 이것이 부족하다'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들과 같이 경제력이, 어떤 사람은 건강이 부족하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있다.
베드로는 수제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위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녀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기가 꺾여버렸다. 이제 누가 베드로의 말을 듣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그를 일으키려면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 복구시켜야 한다. 이제 주님은 다른 사람 아닌 베드로를 불러 세 번 물으신다. 이는 주님께서 그의 리더십을 회복시켜주시는 순간이다. 다른 제자들이 다 듣는 데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 앞에는 타오르는 숯불이 피워져 있다. 이 숯불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타올랐던, 그 앞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숯불과 같은 단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