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기독일보가 주최하고 UBM교회가 주관해 열린 ‘구약에서 길을 찾다’ 에세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최재환 학생(게이트웨이신학교 M.Div.)의 글 <이스라엘신학 정립의 필요성과 유용성에 관하여>를 네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이스라엘신학으로 인한 유용성

최재환 학생(게이트웨이신학교, M.Div. 과정)
최재환 학생(게이트웨이신학교, M.Div. 과정)

둘째,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 이 언약의 목적은 선택 받은 민족 이스라엘이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출 19:5-6). 이것은 주께 속한 다른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구분한다(출 19:5). “거룩한 백성”은 그 거룩함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으로 구별된 나라를 뜻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된다면 이스라엘은 열방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마지막 표현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형태의 나라가 될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권력과 묵인에 의존하는 정치인들이 아닌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의존하는 제사장들이 다스리는 나라, 섬기는 나라가 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임무 이자 세계 민족들 중에서 그들만의 구별된 특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통치권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셋째,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방향 정립에 대하여 하나님의 첫 백성에게 빚지고 있음을 밝히며, 우리가 이스라엘의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스라엘이 장차 해야할 역할과 관련시켜 그것을 설명한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1:12). 하나님께서 자신의 첫 백성과 함께 하시는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에 대해서 계속 언급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11:25). 바울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9). 하나님의 계획 성취에의 참여가 지향하는 미래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정립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백성인 유대민족을 통하여 세상 모든 민족은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창조 안에 감추인 계획안에서 유대인들에게 부여된 독특한 역할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유대교와 이스라엘은 반기독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과 분리되어 있는 듯한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있는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스라엘이 교회를 지탱시키는 거룩한 뿌리이며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라는 그 원래의 목적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의 장엄한 속성들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자 이자 피조물과 역사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의 구원 역사가 일정한 순환과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 주셨다. 비록 그들이 역사 속에서 때로는 언약을 위반함으로써 하나님과 소원해지기도 하고, 나라를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고, 홀로코스트라는 대학살을 경험하는 등 복잡하고 암울한 역사를 거치면서 결국 반 기독교적인 유대교의 형태를 띄게 되었지만 이것이 역사 속에서 그들의 종착역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의 언약에 대한 역사적 실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 분의 구속 계획을 실행하셨다는 사실이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신학은 잃어버렸던 그들의 순수한 신앙을 되찾게 도와줄 것이다. 이 신학을 통해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계약과 약속의 효용성을 다시금 확인하여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재확증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에 참여하는 선택된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 이스라엘에게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다시 헌신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 계획, 즉 언젠가는 자신의 온전한 회복과 함께 모든 열방들까지도 하나님의 의로운 주권 아래 하나로 묶어줄 본연의 임무를 재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다시 회복하게 될 이스라엘의 사역은 모든 창조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그분이 자신과의 완전한 교제를 회복하고 싶어 하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신실한 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와 중재를 감당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잃어버렸던 첫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광을 다시 한 번 누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방법을 온 세계에 전하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과 기능을 해야하는지 보여주는 이상적인 모델로써 다시 한 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이 둘이 상응하는 것을 항상 불완전하게 이해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신 것과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인식하시는 수준까지 명쾌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비밀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거듭 계시하였으나 성서 가운데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숨겨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애초에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시대별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방식은, 하나님에 관한 논의를 하기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된 선의 모델로 삼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만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보다 개인적인 차원의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삶에 근거하여 만들어낸 매우 단순하면서도 이상적인 모델만 지향해 나가는 신앙생활을 해나간다는 것은, 전체적인 신앙생활이란 측면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축소하고 동시에 매우 한정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영향들로 인해서, 현재 교회 안에서 각종 문제들이 안 밖으로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개인적인 구원과 축복을 받는 것에만 치중하고, 공동체적인 선이나 이웃 사랑에는 관심이 없고, 마치 하나님의 정의를 잃어버린 무미건조한 기독교 종교인의 양산만이 이루어지는듯한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복의 본질인 창조 원형으로의 회복이 필요한 시기이다. 잘못된 기독교 신앙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방향설정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스라엘신학은 하나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먼저 이스라엘신학 안에는 야웨 하나님의 주요 목적이었던 정의에 대한 일반적인 헌신과 공약이 내재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의 전통을 헬라 철학의 위대한 고전적 전통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정의는 분명히 유대적이고 야웨적인 관심사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끊임없이 정의보다는 질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헬라 전승 속에는 그 어느 것도 분배적 정의를 향한 야웨의 열정에 비견될만한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정의가 결여된, 질서를 중요시하는 헬레니즘적 요소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헤브라이즘에 기초한 야웨적 열정의 회복이다. 이 야웨적 열정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미래의 열방 즉 온 나라들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는 기대의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열정의 회복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요소를 회복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중재자들을 통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대리인들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그 대리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때로는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무슨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지를 알아야지만 행동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마음과 의지가 약해서 본래의 의무를 알게되었을지라도 좀처럼 바로 이행하지 않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현재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교회 내에서는 말씀의 실천을 부르짖으나 교회 밖에서는 그 실천이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신학을 통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임무 수행이라는 측면에서의 회복도 이끌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개인 및 지체 그리고 공동체로서,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구원의 도구로서 가까이는 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나아가 온 열방을 회복시킬 수 있는 귀한 존재로써 쓰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대리적 사명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