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통계를 들지 않더라도 현대 교회가 각종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위기들은 교회 지도자들과 또 그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도 대다수가 동감할 것이다. 미국의 한인 신학교육이 처해 있는 문제는 무엇이며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본지는 미드웨스턴침례신학교(mbts.edu)의 박성진 학장과 이 문제를 놓고 두 번째 대담을 진행했다. 지난 대담이 신학교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신학교에서 이뤄지는 원어 교육에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대담 보기- 위기 속 한인교회 위한 신학교육의 돌파구를 찾아라>
미드웨스턴은 미국 지도의 정중앙에 있는 미주리 주, 캔사스 시티에 있다. 미주리 주는 백인이 83%, 흑인이 11%에 아시안은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전형적인 미국 중서부 지역이다. 미국 한복판 백인 지역에 있는 미국 신학교에서 아시아부 학장을 맡아 한국과 아시아의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박 학장은 미국 최대 교단인 남침례회(SBC) 6대 신학교의 학장들 가운데 유일한 한인이기도 하다. 그는 달라스신학교에서 신구약학으로 Th.M. 학위를 받았고 히브리유니언칼리지에서 고대근동학과 비교셈족언어학으로 M.Phil.과 Ph.D.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구약학 복음주의 학술지인 JESOT(Journal for the Evangelical Study of the Old Testament)의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각종 학술지에 이스라엘과 우가릿 종교와 구약 해석학, 그리고 맛소라 학파의 강세 관련 논문을 주로 기고하고 있는 신진학자다.
-성경 원어 교육이 왜 중요하다고 보는가?
목회자에게 있어 영적, 도덕적, 지적 자질은 매우 중요하다. 이중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저는 목회자의 지적 자질 문제에 대해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에게 지적인 자질이 부족하다고 함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신학교육은 주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핵심은 무엇보다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함양하는 중심에는 원어 교육이 자리잡고 있다. 신학교는 학생들이 신구약 각 권의 석의적 논의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역사적, 문화적, 문학적, 복음적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바로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원어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좋은 목회자는 바른 주석가여야 한다.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기사다. 한 캐나다인이 영어로 번역된 김소월의 시를 읽다가 마음에 전혀 와 닿지 않아 한국어로 이해하고 싶어 한국어를 공부하러 왔다. 그 외국인이 몇 년 후에 김소월의 시를 한국어로 읽었을 때 마음에 다가오는 감동은 정말 엄청난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번역된 한국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과 원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언어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의 단계를 뛰어넘어 언어 행위 저변에 흐르는 의식과 세계관, 그리고 문화를 공유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원어 교육을 통해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사람들과 소통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정황 속에서 문화의 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이 바른 성경 해석의 출발점이다.
-요즘 신학교육은 목회에 직접 적용되는 실천적 과목이 늘고 원어 과목은 줄어드는 추세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보는가?
최근에 우리 학교 박사 과정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성적증명서를 보면 이전과는 달리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초급 단계만 이수했을 뿐 중급과 고급 단계까지 공부한 학생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도 히브리어나 헬라어 수업을 줄이고, 대신 실천신학 과목을 늘리는 추세인데,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식 실용주의가 신학 교육에 준 영향일 수도 있다. 실천신학은 매우 중요한 분야이지만 실제적 사역의 근거 역시 바른 성경 해석에서 나온다. 토대를 견고하게 하지 않고 기둥을 쌓는 것은 사상누각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한인 신학교육에서 원어 교육을 빼면 목회자의 질적 향상은 요원하다.
-원어 교육이 부실할 경우 목회 현장에서 발생할 만한 문제는?
원어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 목회 현장에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한다. 다른 주석가나 설교자의 의견을 참고해서 설교를 할 수는 있어도 원어를 바탕으로 하는 본인 자신의 견해는 제시할 수 없다. 원어 교육의 목적은 제대로 된 번역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올바른 해석을 위한 전제다. 언어는 통합적인 체계이기에 단지 문법만을 배웠다고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다. 예로, 우리말에 “쓰다,” “기술하다,” “서술하다,” “진술하다”란 단어들을 보면 이들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달리 사용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원어에서 단어의 의미가 각 상황에 따라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모르면, 해석에 큰 오류가 생긴다. 예로, 헬라어로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형제 간의 사랑은 필레오라고 알고 있지만, D. A. 카슨은 신약에서 이 두 단어의 의미는 서로 교차된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구절에 필레오도 사용되며, 형제 간의 사랑을 말하는 구절에 아가페도 등장한다는 말이다. 이는 그 당시에 이 두 단어의 의미의 범주가 많이 중첩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가페가 하나님의 사랑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면 본문 해석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원어를 공부하면 목회자들은 바른 해석을 위한 기초에 선 것이다. 이는 개인 말씀 묵상 때뿐만 아니라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도, 설교를 준비할 때도 매우 유익하다.
-원어를 배우는 것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배운 원어를 실제 목회에 적용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또 요즘은 원어를 배우지 않아도 성경의 원 뜻을 가르쳐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나 주석들을 접하기 쉽다.
마일스 반 펠트나 게리 프랙티코 교수는 빈도수가 높은 641개의 히브리 단어만 알면 구약 본문의 80%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학생들을 설득하지만, 해석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원어를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언어 공부에서 지름길이란 없다. 언어란 투자한 시간만큼 효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 공부하느냐에 따라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다. 초급 헬라어와 히브리어 문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그 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갈 수는 없다. 중급 과정에서 구문론(syntax), 의미론(semantics), 그리고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을 배우고 시대에 따른 단어나 구의 의미 변화를 배워야 해당 원어에 대한 맛을 본 것이다. 그 후에야 석의가 가능하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평생에 걸쳐 성경 연구에 사용할 수 있는 값진 재원이 생기는 것이다. 전 재산을 팔아 귀한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는 신약의 예화처럼 원어 연구의 귀함을 깨닫는 사람들은 시간을 투자해서 그 귀한 보화를 본인 몸에 체화시켜야 한다.
요즘에는 성경 연구에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많은 주석들이 많다. 하지만 원어 교육을 받고 이런 자료를 사용하는 것과 원어에 대한 지식이 없이 이런 자료를 사용하는 것은 자료 활용도에 있어 매우 차이가 난다. 원어 교육을 받으면 비평학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를 하게 되기에 시중에 나와있는 주석을 비판적,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대부분의 종교개혁가들과 청교도 신학자들은 원어에 탁월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렸을 때부터 원어를 학습해서 매우 능통했고, 칼빈 역시 원어에 능통한 매우 탁월한 주석가요, 신학자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원어를 공부하는 데 실제적인 조언을 준다면?
언어는 언어답게 공부하라는 것이다. 원어를 배우고 싶은 학생이 많아도, 너무 어려우면 도중에 좌절하고 포기한다. 이런 점에서 많은 신학교는 원어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 문법 위주로 배운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계속 사용하지 않는 이상, 수업 후 3개월이 채 되지 못해 전부 잊어버린다. 영어와 비슷하다. 문법은 필요하지만 문법 위주의 공부는 오히려 영어를 언어로 배우는 데에 장애가 된다. 특히 히브리어는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히브리어에는 다양한 강세가 존재한다. 이 강세들의 목적이 단지 어떤 음절을 강조하는 것뿐이라면 다양한 강세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다양한 강세는 히브리어를 어떻게 리듬을 살려 읽는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유대인도 이 강세에 맞추어 히브리어 본문을 읽는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한다. 신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칠 때는 읽는 훈련 위주로 해야 한다. 강세의 조절에 따른 리듬을 타며 정확하게 읽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특히 시 문학은 이렇게 읽어야 히브리어 본문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 후에 많은 본문을 읽는 가운데 발견되는 공통적인 문법적 특질을 공부해야 오래 기억에 남고 언어가 주는 음성학적, 음운론적, 운율적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한때 원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유명해진 원어연구소가 있다. 나도 미국에 오기 전에 이곳에서 3개월 정도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웠다. 주로 명사형이나 동사형 어미의 패러다임을 쉽게 외워서 어떠한 명사나 동사가 나오더라도 기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결과, 신학교에서 초급 헬라어와 히브리어 수업을 들었을 때, 미국 학생들은 나를 언어 천재로 착각할 정도로 감탄을 마지 않았다. 하지만 단계가 올라갈수록 언어학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기계적으로 암기한 패러다임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형태학적으로 분석이 가능했지만, 강세의 변화가 왜 생기고 강세 변화에 따른 모음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형태적 변화는 본문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고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였는데 말이다. 원어는 언어답게 배워야 언어로서의 고유한 특질을 파악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된다.
-성경 원어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성경번역선교회에서 사역을 한 적이 있어서 원어 공부에 관심이 많았다. 신학교에서 신구약 과목만 60학점 정도 들었을 정도로 원어와 해석학을 집중해서 공부했다. 하지만 서구의 방법론에 바탕을 둔 원어 공부는 문법적이고 해체적인 측면이 강해서 마치 해부해 모든 내부 기관을 본 후에 봉합한 개구리가 죽어있는, 한계성을 많이 느꼈다. 성경 말씀이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분석 과정을 거쳐 종합을 했는데도 살아나지 못한 채 죽어있는, 바로 그 절망감을 말이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종합적이 아니라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유기체적 방법론이다. 비유로 말하면, 개구리를 아는 방법은 해부하는 것만 아니고, 환경 가운데 두고 개구리는 무엇을 먹는지, 언제 자는지, 다른 동물들과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는 것도 있다. 성경의 언어를 셈족 언어라는 환경 속에 두고 이 언어가 어떻게 다른 셈족 언어와 반응을 했고 이스라엘 종교와 문화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히브리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대 성경의 저자들은 어떤 언어적, 문학적인 요소를 사용해서 히브리 문학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등을 연구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방법론을 통해 언어를 언어답게 배워야 함을 알게 되었고 보다 총체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