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회주의 역사신학자로서 탁월한 명성을 떨친 19세기 역사신학자 윌리엄 커닝햄 박사(William Cunningham, 1805-1861)의 명저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을 연재할 수 있는 영광을 갖게 하신 크리스천투데이와 편집장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장로회주의 정신을 찾기가 매우 힘든 현실에서, 성경에 근거한 장로회주의 사상과 정치원리를 깊이 교훈해 줄 역사신학에 바로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 윌리엄 커닝햄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19세기 스코틀랜드 교회의 상황은 일반적으로 허약하고 잠들어 있었으며 죽어 있는 상태였다. 물론 사방에 흩어진 남은 자들이 곳곳에 존재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노력은 18세기 초 스코틀랜드 전역에 번진 온건주의와 세속주의의 물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성직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온건파들의 종교는 복음적 메시지들과 열정에 의해 수반되는 도덕성엔 무관심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에 불과했다. 그 당시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직에 대한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상황이, 목사 후보생들 안수식 때 설교자가 한 비아냥거림의 풍자다.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지금 거룩한 성직에 따로 부름을 받아 세움을 입은 자들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무리하게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직 때가 안 됐는데도 무엇 때문에 일찍 죽고자 하십니까? 여러분이 자각하고 있듯 주일학교 모임과 기도회 및 성경공부반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어리석은 몇몇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젊은 형제여, 나는 그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들에 빠져들지 않기를 진정으로 주의하시기를 조언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1800년대 스코틀랜드 교회의 실태였다. 그러나 1840년대에 오면서 영적 변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특별히 이 일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 두 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한다. 그 짧은 세월 안에서 이처럼 새롭고 보다 나은 교회를 세우는 시발점을 낳게 한 세 가지 사건들이 벌어졌었다.

그 첫째는 훗날 온 나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 아이들이 출생한 것이다. 1804년 제임스 부캐넌(James Buchanan), 1805년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 1806년 캔들리시(R. S. Candlish), 1807년 제임스 배너먼(James Bannerman), 1808년 제임스 베그(James Begg)가 각각 태어난 것이다.

두 번째 주목할 만한 사건도 즉각 벌어졌다. 그것은 1809년 파이프주 외진 곳에 있는 킬마니(Kilmany)교구 교회 목사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의 회심이었다. 그는 그 교회에서 7년간 사역하며, 수학과 과학을 잘 공부한 세속적인 야망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한때 목사관을 번질나게 드나든 경건한 교구 신도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목사님은 이러저러한 일들로 매우 분주하시군요, 그런데 내가 올 때 목사님이 주일에 연구실에 계신 것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오, 그것은 토요일 저녁 한두 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라고 대답했던 그가, 주님을 깊이 만나는 영적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는 전혀 다른 목사가 되었다. 찰머스는 3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신약성경을 연구하였다. 그의 성경은 이제 언제나 그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손에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를 누구도 본 적이 없게 됐다(참고로 내년 2월 셋째 주에 있을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제31기 정기 세미나에서는 토마스 찰머스 박사의 생애와 사역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이 영적 변혁 운동의 시작을 만든 세 번째 사건은 1811년 한 권의 책이 출판된 것이었다. 그것은 토마스 맥크리 박사가 쓴 존 녹스의 전기였다. 이 책은 스코틀랜드 전역에 이 개혁자의 활동을 소생시켜 주었다. 맥크리 박사는 이 책을 낸 후 1819년에는 녹스의 후계자인 앤드류 멜빌의 전기도 썼다. 이 두 권의 책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로 알려졌다. 호머의 영웅들이 수많은 모방자들의 심령에 불을 지폈듯, 맥크리 박사의 전기집 출판물들도 이 영적 두 거장의 본을 따르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 거룩한 야망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1815년 찰머스는 그의 한적한 킬마니 교구 교회를 떠나, 수천 명의 교구민들이 있는 글래스고 지역으로 옮겼다. 그는 타오르는 달변과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갔다. 그의 어떤 설교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글래스고 지식층들의 입을 다물게 했을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영국 전체의 사람들을 섬광의 빛으로 정복해 나갔다. 그는 복음주의 운동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소망으로 가득 찬 메시지를 명하고, 모든 위기 상황에서도 승리를 가져다 주는 적극적인 추진력을 지니신 분이었다."

찰머스 박사는 1823년에 성 앤드류스대학의 도덕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가 1828년 학교를 떠날 때까지,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300명이었다. 그 후 그는 생애 가장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에든버러의 신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토마스 찰머스 박사가 스코틀랜드 수도 중앙에 있는 신학 강단에 도착한 사건만큼 그 시대에 더 의미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오기 5년 전 이미 에든버러 신학 강단의 학생들에게는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다. 그러나 교수들 중 어느 누구도 찰머스 박사가 오기 전까지 그 성령의 부어 주심의 은혜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학생들을 주도적으로 이끈 자가 없었다.

그러나 찰머스 박사의 도착은 이미 일어난 영적 역사에 더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힘이었다. 찰머스 박사가 첫 강의를 마쳤을 때(1시간 15분 강의), 그것은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징조였다. 신적 진리를 묵상함에 있어,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강한 어필이 있었다.

1828년 11월 6일, 추운 아침에 강의를 듣고 벤치에 모여든 학생들 가운데, 찰머스가 메말라버린 킬마니 교구에서 온건주의자로 사역하던 그 기간에 태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윌리엄 커닝햄과 제임스 배너먼이었다. 잊지 못할 그날의 감격을 가진 학생들 중 하나였던 윌리엄은 당시 "우리의 시온에 은총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소망에 푹 빠지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 그 정한 날이 다가오는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윌리엄 커닝햄은 1805년 장사를 하는 해밀턴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런데 부친이 일찍 죽자, 그의 모친은 레스마하고(Lesmahagow)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베르윅주에 있는 던스(Dunse)로 옮겼다. 그의 모친은 언약도 페단(Peden)의 후손이었다. 사람들은 윌리엄 커닝햄이 그의 조상 알렉산더 페단의 대중을 이끄는 지도력과 두려워할 줄 모르는 기질을 물려받았음을 발견했다.

1820년 커닝햄은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함으로써 목회사역을 위한 준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첫 3년 동안 영적인 것보다는 문학작품들에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란 배경이 종교적으로 온건주의가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3년차 공부를 마치기 전, 그에게 영적 필요성을 깊이 자각하는 계기가 찾아 왔다.

그리하여 그는 에든버러의 온건주의파 설교자가 와서 설교해 주기를 갈망했다. 버림받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될지를 가르쳐 주는 설교자를 앙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경건한 목사 로버트 고든(Robert Gordon)의 설교를 듣기까지 그러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윌리엄은 복음의 자유로움에 들어선 것이다. 다음 방학을 맞이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는, 던스의 목사인 그의 숙부와 식사 자리를 함께했다.

식탁에서 복음적인 설교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태도로 몰아붙이는 논쟁이 벌어졌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숙부는 깊은 자제력을 가지고, 커닝햄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 대신 다음과 같이 온화하게 말했다: "나는 에든버러에 있는 모든 온건파 목사들에 대하여 고시와 설교 실습을 검증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나는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치는 것을 배울 수 없었다!" 여기서 엄청난 전환점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커닝햄은 선배들에게서 물려받은 그의 신조를 버리고, 복음을 변호하고 선포하는 자로 나섰다.

커닝햄의 미래 인생은 이미 그의 학창시절 증명됐다. 그의 거대한 연구 욕심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어떤 주제이든 피상적 지식으로 만족한 적이 없다. 에든버러에서의 첫 6년 동안, 그는 530권의 책을 소화했다. 팸플릿이나 잡지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숫자이다. 커닝햄은 학생들의 토론 모임에서도 어떤 대적자들과도 능히 맞서는 자였다. 당시 뜨겁게 달아오른 주제, '가톨릭 노예 해방(Catholic Emancipation)' 문제를 다룬 토론장에서 청중의 강한 주목을 받았다.

커닝햄은 1828년 말 복음 설교자로 인허를 받았고 1년 후에 은퇴를 앞둔 노인 목사가 목회하고 있는 그린녹교회 부목사로 청빙받았다. 그의 전기 작가는 '분주한 클라이드의 요동치는 어촌 교회'라고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교회는 책들을 읽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잘못 골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마치 학교로 보내듯 그 어촌교회로 가게 했다. 사실 그곳에서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에 할 위대한 일들을 위하여 준비하는 놀라운 시간들이 있었다."

학창 시절 커닝햄의 동창생이었던 J. J. 보너(Bonar)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서쪽 지방에서 일어난 돌발적 부흥주의를 직면했을 때였다. 그것은 처음엔 감상주의적 알미니안주의로 나타났지만, 그 후 잘못된 펠라기우스주의로 발전된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커닝햄이 그린녹에 청빙된 것이었다."

사실 그린녹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편적 구속 신학과 보편적 사죄 신학으로 귀결시킨 덤바톤주 Row 교회 목사인 존 캄벨로 인하여 큰 소용돌이에 젖어 있었다. 동시에 방언과 병 고치는 은사를 소유한 자들의 집회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 목사는 수없이 많이 곤경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커닝햄은 장로들이 예견했던 것처럼 자신의 임무에 변함이 없었다. 그 논쟁은 그의 모든 잠재적인 능력을 다 발휘하게 하였다.

그는 작금의 현상들은 매우 치명적인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오류들을 다루는 그의 능력은 눈에 띄게 성공적이었다. 그의 방법은 순수한 복음을 적극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가 목적하듯 영혼의 회심을 추구했다. 그의 이러한 방법은 잘 먹혀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국가적으로는 대체로 복음주의 운동이 매년 강화되어 가고 있었다. 총회 석상에서 앤드류 톰슨 박사는 온건파들을 내리치는 방망이였다. 복음주의자들은 때로 '톰슨파'로 불렸는데, 이 모임이 증폭된 것이다. 그들은 1백 년 이상 누적된 부패의 고리들을 쓸어버리고, 교회를 이전의 순결한 교회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831년 2월 9일에 그들의 희망은 흔들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왕성하게 일해야 할 나이인 톰슨 박사가 갑자기 에든버러에 있는 자기 집 문 앞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척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삼상 14:6)'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듬해 총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개혁을 위해 최초의 집단 행동을 시도했다. 그것은 성직 임명권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문제는 목사가 교회에 정착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본래 스코틀랜드교회 헌법에 따르면, 교구 교회 성도 다수의 동의 없이는 교회에 부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앤 여왕이 18세기 초 성직임명권령을 발표하면서, 회중의 청빙은 형식적인 것이 되었고 성직임명권을 가진 페트론(Patrons, 영향력 있는 지주나 영주)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교회에 앉히기 위해 목사를 청빙할 권리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악한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될 것은 자명했다.

1832년에 가장 유능한 온건파 목사들이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 그 일은 얼마 못 가 정당한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이듬해 총회는 에든버러에 있는 매우 유서 깊은 탈보트교회당에서 개회됐다. 이 담벼락 안에는 한때 녹스의 목소리가 천둥소리로 들렸을 때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복음주의자들은 성직임명권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하여 온건파들 역시 최고의 연사들을 내세웠다. 그때 총회석상에 처음 등장하여 예리한 논객으로 활동한 사람은, 큰 키 때문에 사람들에게 금세 각인된 '그린녹의 커닝햄'이었다. 결국 그들의 싸움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으나,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을 뿐이었다.

1833년 여름 트리니티칼리지교회 강단이 비자 에든버러 시장의 도움으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834년 첫 주일, 커닝햄은 그린녹 교회에서 고별 설교를 하고 28세 때 앞으로 그에게 제공될 수 있는 가장 막대한 업무들 중 하나인 자리로 옮겨왔다.

1834년 총회에서 184대 139로 다수인 복음주의 진영 인사들이, 그 유명한 '거부권'을 통과시켰다. 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목사가 교회를 차지하는 부당함을 제지하는 법안이었다. 페트론(성직임명권자)들은 더 이상 회중이 원치 않는 목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앉힐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직임명권의 악법은 사라지게 됐다.

그 법안이 시행되던 1834년 여름, 가장 먼저 아우크라더(Auchterarder)교회가 비게 됐다. 그리고 페트론이 추천한 인사는 회중에 의해서 압도적으로 거부됐다. 따라서 노회는 위임식을 거부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페트론과 추천받은 자가 거부권 법안에 법적인 타당성을 도전하게 되었을 때 매우 심각한 문제로 번졌던 것이다. 결국 사회법정까지 가야 했다.

긴 예비심사 과정을 거친 1838년 초 법원의 판결은 페트론의 승리였다. 그리고 아우크라더 교회의 회중의 의지는 거부됐다. 이제 복음주의 진영이 주도권을 잡은 총회는 이 판결 수용을 거부했다. 그리고 선언하기를 비록 그들이 국가교회요 여러 면에서 국가와 협력하는 동맹관계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법과 충돌될 때 교회가 시민법에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천명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만이 머리요 법 수여자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접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지역에서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해에 의회가 아우크라더 교회에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게 됐을 때, 7월 23일에 킬사이스 교구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일으키신 권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역사는 금방 다른 교회들로 번졌다.

던디의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목사 교회도 그 중 하나였는데, 그 교회에서는 그해 가을 수많은 사람들이 큰 '두려움과 정적 가운데서' 복음을 듣게 됐다. 1840년에 스카이 지역에 부흥이 있었다. 그리고 타인과 탈바트, 콜레이스, 러스킨 및 그밖의 지역에서 연달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온건주의자들이나 시민법도 억제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로다'라고 엘리야는 외쳤다. 1839-40년에 하나님께서는 불로 응답하셨다.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17세기(대각성운동)를 떠올림 없이는 누구도 이 사실을 생각할 수 없다. 1638년 종교개혁이 선행되던 갈등에서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625년 이후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영의 부어 주심이었다. 그날 전 복음주의자들은 성벽을 기대고 싸움을 했었다. 그 후에 그들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교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이한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1840년 배너먼은 기록하기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눈과 이 지상을 덮고 있는 어둠 저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교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말들과 불병거들이 있음을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제3의 종교개혁이 벌어진 1839-40년의 부흥이 발생한 곳과 함께 깨닫는 교훈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하고 가야한다. 때대로 부흥과 종교개혁은 아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측면에서 그 말은 맞다. 부흥은 교회 안에 있는 삶의 내적 자각과 연관되어 있다. 그 결과로 영혼들이 더 많이 모이게 된다. 부흥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영향들은 무엇보다 내적인 것, 사람들의 심령과 영혼의 변화와 관련된다. 다른 한편 종교개혁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말씀의 규범에 따르지 아니하는 것들을 다 제거하는 일이다. 종교개혁은 교회 생활의 외부적 임무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부흥은 교회의 외적 변화가 수반됨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

18세기와 같이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강조점은 대체로 전도와 성결 문제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교회가 깨어나게 됨으로써, 그리고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의무 수행에 큰 자극과 격려를 받게 됨으로써 종교개혁이 달성된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종종 망각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에 있어 강조는 하나님 말씀의 회복에 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과 교리가 포함된 논쟁과 토론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즉각적인 질문은 영혼의 구원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들을 처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언제나 성령의 역사와 동일시된다. 종교개혁은 영혼의 구원과 성결한 삶을 촉구함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신학적인 모든 논쟁은 종종 부흥과 영적 번영에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사실 논쟁과 격렬한 논의가 있을 때, 종종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게 됨을 경험한다.

1839년만큼 스코틀랜드에 신학적 혼란를 일어난 때는 없을 것이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 토마스 브라운은 그의 <분열에 대한 희의록>에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모든 지역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교회가 사람들의 지적 활동들이 일깨움을 받는 논쟁의 충격으로 받는 것보다 세속적 평화의 정적만 흐르는 무관심에서 나타나는 죽음이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샴 메이첸 박사가 이 나라를 방문했을 때, 한 번은 이 점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분이 관찰한 것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참여하는 것 대신,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한다. 논쟁 대신 전도도 해야만 한다. 한편 여러분이 생각하는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선포해야 할 복음에 무관심하다면, 과연 그런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신약적 측면에서 부흥은 없다.... 모든 참된 부흥은 논쟁 가운데서 탄생한다. 그리고 더 많은 논쟁으로 이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 왔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가져오게 될 한 가지 결과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 날에는 교회 안에서 논쟁의 악한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홍수에 모든 것이 쓸려가 버리듯 다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불 붙은 사람은 곤고하고 허약한 방편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진리를 기쁨으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일에 분연히 일어서 최고조로 외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십 년 갈등'이 어떻게 1843년 대분열로 역사적 결말을 내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또 클라이드 강물 위에 떠 있는 강력한 증기선 중 하나처럼 커닝햄이 어떻게 그 수많은 논쟁이 거듭된 상황에서 강에 있는 모든 증기선들을 그들의 길로 항해하게 하며 항구에 도달하게 했는지, 그의 연설들의 긴박한 순간들로 반대 진영을 무력화시켰는지도 설명할 수 없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커닝햄은 1839년 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도록 찰머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또 온건파의 가장인 엘론의 제임스 로버트슨에게 답변서를 제출하여 그의 노고를 무력화시켜버린 사람도 커닝햄이었다. 스트라스보기 목사들의 면직에 대해서도 연설하여 휴 마틴(Hugh Martin)을 복음주의 진영으로 돌아오게 한 장본인도 커닝햄이었다. 1842년 총회에서 페트론의 권리를 완벽하게 폐지시킬 수 있도록 다수가 확보되었다.

그러나 그해는 불행하게도 기존 교회 체계 안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 개혁운동이 결코 진행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교권이 다 세속 권력의 수중에서 불공정하게 제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교회의 머리이심을 견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속>

서창원 교수
서창원 교수

/서창원 교수(총신대 신대원 역사신학,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