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의 금강경 주석에 의하면 부처는 늘 부동의 자세로 잠을 잤다고 한다. 오른 손을 이마 위에 놓고 자면 그 손은 그 다음 날 아침까지 그 곳에 있었다. 왼 손을 배 위에 놓고 자면 역시 그 다음 날 아침까지 그 곳에 있었다. 손을 어딘가에 놓으면 밤이 맞도록 손을 움직이지 않고 잤던 것이다. 움직이지 않기 달인에 참가했다면 단연 일등을 거머쥐었으리라. 십 년 동안 부처와 동거했던 제자 아난다는 이러한 부처의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신기방통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정말 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깨어 있는 것인지를 물었다. 부처는 대답했다.
나는 늘 깨어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내가 자고 있음을 자각하지. 피곤한 육체에 서서히 밀려오는 잠은 위에서부터 천근만근의 무게로 나를 누르기 시작하고, 그 무게로 인해 내 몸이 이완되고 팔다리가 느슨해지면, 나는 부동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밤새 자각한다.
부처는 밤마다 찾아오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숙면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번뇌하게 만든 것일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매일 낮 뜬 눈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던 부처는 매일 밤 감은 눈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때 마다 하늘 높이 솟은 벽에 부딪힌 그는 점점 굳어져만 갔다. 그에게 정녕 필요했던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신 그 분이었던 게다.
부처와 전혀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하는 베드로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있다. 그것도 두 개의 쇠사슬에 매여서 말이다. 의례껏 구타와 고문을 당했을 것이고 내일 목이 잘리거나 사자 밥이 되어 죽을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으리라. 이러한 상황에 처한 베드로가 뭘 하고 있나? 자고 있다. 그것도 아주 깊이. 베드로의 자는 모습을 묘사하는 헬라어(κοιμάω)는 '죽은 듯이 자다'는 뜻이다. 식음을 전폐하고 전전긍긍해도 모자랄 이 판국에 죽은 듯이 자고 있다. 그가 어찌나 깊게 잠들었던지 천사가 나타나도 깨지 않는다. 옥중에 광채가 가득 차도 깨지 않는다. 멋쩍은 천사가 하는 수 없이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치자, 그제야 비로소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어쩌면 저리도 깊은 잠을 취할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진리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안식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 머리 대는 곳이 잠자리요, 눕는 곳이 꿈자리가 된다. 세상을 이긴 샬롬의 평안을 쉼으로 얻기 때문이다. 베드로를 보라. 풍랑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살려달라" 고래, 고래 소리질렀던 그가 풍랑 보다 몇 갑절은 더 위험한 죽음의 상황 속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다. 천사가 나타나도 깨지 않는다. 밝은 광채가 비춰도 깨지 않는다. 샬롬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예수님이시니이다"는 시편 4:8을 잠꼬대로 중얼거리며 달달한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처가 예수님을 만난 후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청하는 모습을 상상을 해 본다. 그의 고백이 이렇게 바뀌지는 않았을까?
나는 잠을 자는 동안에 내가 자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피곤한 육체에 서서히 밀려온 후 위에서부터 천근만근의 무게로 나를 누르던 모든 짐들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가볍다. 내가 눈을 감을 때 내 몸이 이완되고 팔다리가 느슨해 진다. 그리고 아침까지 깨지 않는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세상을 이기는 샬롬의 평안을 쉼으로 얻었기 때문이다.
내 모든 짐을 내려주신 예수님.
샬롬의 평안을 쉼으로 주신 예수님.
이처럼 좋으신 예수님께 참 감사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