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의 생애
아타나시우스 | 은성 | 198쪽 

안토니(Anthony, 251-356년)는 AD 251년에 중부 이집트 코마(Coma)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천성이 과묵한 안토니는 어렸을 때 배우는 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다른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이었음에도 그는 맛있고 푸짐한 음식을 탐하지 않았으며, 부모에게 무엇을 내놓으라고 귀찮게 조르는 일도 없었다. 안토니는 <구약성서>의 야곱을 본받으려 했고, 단순한 삶을 추구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안토니는 아주 어린 여동생과 단둘이 남았다. 안토니는 열여덟 살 또는 스무 살 때 가정과 여동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여섯 달쯤 뒤에, 안토니는 늘 하던 대로 교회를 향해 걸어가면서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어떤 사람들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 등을 깊이 생각했다(마 4:20, 행 4:35).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교회로 들어갔을 때, 마침 복음서를 낭독하고 있었다.

안토니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 19:21)"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마치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그가 성인들을 생각하게 됐고, 그 말씀이 그를 위해서 봉독된 듯했다. 그는 바로 부모가 남겨 준 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또다시 교회에서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교회를 나가 남은 재산까지 궁핍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는 여동생을 신망이 높은 수녀들에게 데려가 수녀원에서 길러 달라고 맡긴 후,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고 참을성 있게 단련하면서 집안일보다는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안토니가 사는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젊어서부터 홀로 은둔생활을 해온 노인이 있었다. 안토니는 그 노인의 생활을 본받으며 그 노인이 사는 마을 근처에서 지내기 시작했지만, 성경의 "게으른 사람은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말씀을 기억하며 손수 일하며 생활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것의 일부는 빵을 사는 데 사용했고, 일부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또한 그는 "은밀하게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는 배움처럼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안토니의 금욕적 수도생활은 매우 엄격해서 빵과 소금과 물로 하루 한 끼 식사를 했으며, 이틀에서 닷새씩 금식하는 일도 빈번했다. 그는 친구와 순례자들이 가끔 지나면서 남겨주고 간 빵을 먹기도 했다. 옷이라고는 양털 옷 한 벌과 양가죽 옷 한 벌이 전부였다. 그는 보통 맨땅에서 잠을 잤으나, 밤새워 기도하느라 눕는 날이 적었다.

수도생활 중 그는 악령의 공격과 유혹을 받았다. 당시의 은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안토니에게도 악령과의 싸움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악령은 환상과 꿈을 통하여 대낮에도 친구나 매혹적인 여인, 용, 부자로 살던 자기 자신, 다정한 가족들의 모습으로 나타나 부와 명예를 약속하는가 하면, 수도생활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포기하는 광경을 보여 주곤 했다. 악령이 음란한 생각들로 공격하면, 안토니는 기도로 그것들을 무찔렀다. 궁지에 몰린 악령은 어느 날 밤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온갖 교태를 부리면서 그를 유혹하려 했다.

안토니는 거의 20년 동안 이런 식으로 금욕생활을 했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아주 가끔 사람들 눈에 띄었다. 그의 엄격한 기도생활과 독특한 수도생활은 널리 알려지게 돼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많은 사람이 그의 금욕생활을 본받으려는 뜻과 열망을 품었다.

안토니는 성품이 관대했고 영혼이 겸손했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이 자신보다 더 존경받기를 원했으며, 다른 성직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청했다. 그는 누구든지 유익한 것을 말해 주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임종이 가까워 오자 안토니는 장례 문제를 미리 이야기했다.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고, 그 묻힌 곳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부탁했다. "내 옷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아타나시우스 주교에게는 내가 깔고 있는 양가죽과 외투를 드리십시오. 그것은 그분이 나에게 준 것인데 이제는 낡았습니다. 세라피온 주교에게는 또 다른 양가죽을 드리고, 여러분은 행복을 가지십시오. 이제 나 안토니는 여러분에게서 떠나가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안토니는 마치 자기를 찾아온 친구들을 보고 기뻐하는 듯 밝은 표정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안토니의 유언대로 준비하여 그의 시신을 싸서 매장했는데, 그 두 사람 외에는 그가 묻힌 장소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안토니의 양가죽과 낡은 외투를 물려받은 사람들은 그 물건들을 소중한 보물처럼 간직했다.

안토니는 '사막에 피어난 꽃'이다. 그는 후대에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에 관하여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은 초대교회 이후 고전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안토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일생을 집필함으로써, 전통 기독교회 안으로 수도원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안토니보다 먼저 수도생활을 한 이들이 많았지만, 공식적으로 안토니가 최초의 수도자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그는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불린다.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독자들은 신비한 수도생활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현대인은 그 내용을 신비적인 것으로 여겨 거절하든지, 아니면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송광택 목사(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