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계로는 최초로 미국장로교(PCUSA) 총회장을 역임했던 故 이승만 목사(Rev. Syngman Lee) 추모예배가 19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예장 통합총회 주최로 거행됐다.

이승만 목사는 남·북한과 미국 교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존경받는 목회자이자 이민목회 현장의 산 역사로 평가받는다.

정영택 목사(총회장)의 인도로 진행된 이날 예배에서 '하나님께 영광'(요 21:17~19)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손달익 목사(증경총회장)는 "우리 교계가 선한 목자 한 분을 또 잃었다. 세계 교계도 큰 손실임을 인정하고 있다"며 "이승만 목사는 전쟁으로 희망을 잃은 한국 땅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선교에 있어서 큰 거장이 되셨다"고 했다.

손 목사는 "미국 장로교회의 지도자로, 이민목회의 아버지로, 흑인인권운동의 한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생애는 방대하고 광활하다"며 "오늘 우리는 좋은 스승이요 사랑 많은 친구를 잃은 슬픔에 잠겨 서로를 위로하게 되었지만, 이 모임은 망연자실하는 것으로는 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슬픔을 넘어서, 의지할 곳 없던 고아를 위대한 종으로 키워주셨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손 목사는 "이승만 목사에게 분단은 아버지의 순교와 어머니와 형제들과의 생이별을 안겨주었지만, 그는 남과 북이 견고한 냉전의 역사 속에 있을 때에도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조사를 전한 노정선 목사(연세대 명예교수, YMCA 통일위원장)는 "이승만 목사님께서는 승리하셨다"며 "목사님은 북한을 자주 들르시며 수많은 오해를 받으셨지만, 이것을 정면으로 돌파는 용기를 가진 분이었다"고 전했다.

노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쳐주신 이 목사님께 감사드린다"며 "우리는 300만이 6·25 때 총에 맞아 죽고, 북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에 350만이 아사한 나라"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분단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라고 하셨던 이승만 목사가 우리와 함께 하늘나라에서도 일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이 밖에 이날 예배에서는 김용덕 장로(남선교회전국연합회 제63대 회장, (사)굿타이밍 이사장)가 기도, 김회원 장로는 성경봉독, 한국여전도회성가단 중창단이 찬양, 임춘식 목사(미국장로교 한국선교회 대표)가 고인 약력 소개했고, 박상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박종화(기장 경동교회)·박원호(미국유니온신학교 동문회장)·김정호(미연합감리교회 애틀랜타한인교회) 목사가 추모사를 전했다. 이어 추모영상을 시청하고, 이홍정 목사(사무총장)가 광고, 림인식 목사(예장총회 증경총회장)가 축도를 한 뒤 예배를 마쳤다.

이승만 목사 추모예배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한 뒤 고인의 영정사진을 쓰다듬으며 추모하고 있다. ⓒ하석수 기자
이승만 목사 추모예배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한 뒤 고인의 영정사진을 쓰다듬으며 추모하고 있다. ⓒ하석수 기자

1931년 3월 25일 평양에서 출생한 이승만 목사는 미국 켄터키주 리이빌신학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는다. 1958~73년 켄터키주 보스턴장로교회와 웨스터민스터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1961~73년에는 켄터키주 루이빌대학교 교수 및 교목으로 사역했다. 1964년 예일대 신학부를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받았고, 1972년에는 시카고신학교 박사학위를 취득(종교사회학)했다. 1973~80년 미국연합장로교 세계선교부 중동 지역 총무, 선교국제학 총무를, 1980~88년에는 미국연합장로교 총회 동남아시아·태평양 지역 총무를, 1988~98년에는 미국장로교 총회 세계선교부 부총무를, 1992~93년 미국교회협의회(NCC USA) 회장을 역임했다. 1998년부터 별세하기 전까지 미국 버지니아 주 유니온장로교신학교 교수 및 총장특별보좌역을 지냈다. 2000년 6월 24일 미국장로교 제212회 총회장에 취임했고, (사)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이사장, 미국 컬럼비아신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이승만 목사는 1931년 3월 25일 평양에서 태어나 장로교회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고 평양 성화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모와 네 명의 누이들은 북한에 두고, 남동생과 함께 남한으로 피신했다. 이 목사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소식을 모른 채 지내다, 1978년 누이들과 연락이 닿았다. 이미 모친은 8년 전 소천하고, 아버지도 공산당원들에게 잡혀 옥사한 뒤였다. 이런 뼈아픈 경험은 그가 인생 전반에 걸쳐 평화와 화해, 특별히 남과 북의 평화 논의를 이끌어 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유족으로는 아내 해선, 자녀 애나, 피터, 미나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