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사/김현식 지음/신국판 440쪽
(Photo : ) 김영사/김현식 지음/신국판 440쪽

평양사범대 노어 교수, 북한 로열패밀리의 가정교사에서 서울의 탈북자로, 그리고 미국 예일대학의 초빙교수로, 파란과 곡절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고 있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 김현식. 그가 서울과 평양 그리고 세계에 보내는 단장(斷腸)의 편지.

“내 육신이 파란과 곡절의 현대사다. 젊은이들이여, 나를 읽으라.”

1992년 국립 러시아사범대학 교환교수로 있던 평양사범대(김형직사범대) 노어 노문학과 교수가 남한으로 망명을 했다. 1954년 평양사범대학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뒤 바로 교수로 임명(북한에서는 성적이 뛰어난 사람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교수로 임명될 수 있다)되어 38년간 대학 강단에 서고, 또한 동시에 1971년부터 20여 년간 김일성 처가 자녀들(김성애의 남동생인 김성갑과 김성오의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활약했던 김현식 교수다.

1970년대 초,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북한의 9년제 초.중등 무료의무교육을 10년제로 확대하기 위한 교육실험 담당자로 선발되어 작업을 수행하기도 한 그는 북한 최고의 교육엘리트를 키워내는데 기여한 공로로 여러 개의 훈장을 받았던 북한의 핵심 교육인재였다. 그런 그가 왜 망명을 했을까?

그의 인생은 미국에서 동생을 만나기 위해 러시아로 날아온, 6.25전쟁 때 헤어진 누님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에게 망명을 제의한 남한의 정보요원이 주선해준 만남이었다. 그의 누님은 40여 년간 새벽마다 동생을 위해 기도하느라 멍으로 시커멓게 변한 무릎을 보여주며 북한을 탈출해 목사가 될 것을 설득했다. 목사가 되는 것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김현식 교수의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14살 소년이었던 그에게 남긴 유언이기도 했다.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딸, 다섯 명의 손주, 그리고 러시아로 오기 전 자기의 신분을 보증선 일곱 명의 제자들이 북에서 당하게 될 고초를 생각해서라도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는 그에게 누님은 목사가 돼 북한의 개방과 선교에 남은 인생을 바칠 것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누님과의 비밀스런 만남은 그러나 북한 측에 발각되어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급한 호출은 곧 처단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한의 정보요원은 그가 평양으로 돌아가도 어차피 무사할 수 없으니 일단 몸을 피한 뒤 북한의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설득했다.

당시는 사회주의의 보루인 소련이 무너지고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차례로 쓰러지면서 북한의 정권 붕괴도 곧 임박한 것만 같았다. 그는 김일성의 둘도 없는 친구라던 루마니아의 챠우셰스꾸가 처와 함께 루마니아 국민들로부터 총살당하는 장면을 러시아에서 티브이로 보았다. 베트남과 독일, 예멘 등 세계의 분단국가들이 모두 통일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정권도 머지않아 붕괴되고 통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으로 돌아갈 것인가, 남으로 갈 것인가. 결국 그는 북에 남은 가족과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 그의 신상을 절대 비공개로 할 것이라는 정보요원의 약속을 받고 남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에서도 제대로 정착할 수 없었던 이념의 유목민

북한 정보망과 KGB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6개월간의 은신과 비밀수송 작전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남한에 도착하였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의 심문이었다. 남한의 정보부 에서는 그가 신분을 언론에 정확히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를 검증할 길이 없다고 했다. 미국의 누님을 러시아로 불러들여 만나게 해서 자신을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것도, 신상 비공개를 약속해가며 남으로의 망명을 주선한 것도 남한의 정보요원이었으므로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심문에 지친 그는 북에 남은 가족과 제자들을 위해 단식에 들어갔고, 결국 그의 신분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정보요원의 다짐을 받고서야 2주 만에 단식을 풀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서울에 가면 남북한 통일문제를 연구하면서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며 살 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남한에 발을 디딘 첫날부터 그는 수많은 ‘탈북자’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교수가 될 수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도무지 무얼 해야 좋을지 모른 채 하루하루를 막막하게 견뎌야 했다. 더구나 북한에서는 아무 효용도 없는 대외선전용 주체사상이 남에서 판을 치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사회에 절망했다(39~40쪽).

상당한 기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점차 안정을 찾았고, 할 일도 찾게 되었다. 또한 남북한의 언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집필 작업 등에 몰두하면서 남으로 넘어온 명분과 의미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미국 뉴올리언스 신학대학원에서 1년간 초빙교수로 있었는데, 이때 추후의 북한 선교를 위한 포석으로 오랫동안 공산주의 유물론에 젖어온 북한 사람들이 성경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북한 출신의 교수가 쓴 성경 이야기가 미국에서 화제가 되자 예일대학에서는 1년간 그에 대한 조사 작업을 벌인 뒤 초빙교수로 불러들였다.

예일대학의 초청은 통일교육원 강연자 명단의 맨 끝자리에 ‘탈북자 김현식’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가던 그를 단번에 강연자 명단의 맨 첫 자리에 차지하게 했다고 한다. 철천지 원쑤들이 산다던 ‘원쑤의 땅’에서 그는 예상치도 못한 환대를 받으며 3년간 북한학을 강의했다. 이 책은 그가 예일대학에 머무르며 틈틈이 쓴 것이다.

김현식은 그가 남한생활을 하면서 새로 지은 이름이다. 자신의 신상을 감추기 위해 북에서 쓰던 본명은 러시아를 탈출하는 순간 버렸다. 남으로 넘어오고도 한참동안 자서전이나 회고록 같은 책을 쓰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오래도록 정붙이고 살았던 곳을 이야기하려면 새로 살게 된 남한 역시 좀 더 세밀히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으로 북에 두고 온 가족이 어려움을 겪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십 수 년 뒤 여러 경로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가족은 이미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 책은 반혁명 수령 배신자의 직계 가족으로 몰려 쓰러져간 그의 아내와 아들 며느리, 두 딸과 다섯 손주들의 영전에 바치는 책이기도 하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새로운 북한 사회와 교육, 로열패밀리 이야기

골수 김일성주의자를 길러내는 원종장(原種場)인 사범대학의 교수로, 북한 최고위층의 자녀를 가르친 가정교사로, 북한의 교육제도를 바꾸는 교육실험 담당자로, 초 중고등 대학용 노어 교과서와 교수법을 집필한 교육 이론가로 40여 년간 일해 온 그의 눈에 비친 북한의 교육현장이 적나라하고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교육 별천지, 북한의 학교가 베일을 벗는 순간이다.

북한 로열패밀리와 최고위층은 어떻게 자녀교육을 시킬까?

김일성은 교육열이 유별난 사람이었다. 그의 소원은 북한을 교육의 모범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북한의 11년 보통 무료 의무교육을 정착시킨 그는 자식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고급중학교(고등학교) 3학년이던 김정일의 러시아어 실력이 형편없음을 알고 조바심이 난 김일성은 저자인 김현식 교수에게 그가 다니던 학교로 수업검열을 나갈 것을 지시했다. 이 책에는 수줍은 얼굴로 이마에 땀을 송글송글 흘려가며 저자 앞에서 러시아어 구답시험을 치던 소년 김정일의 모습이 언급되어 있다(252쪽 ‘로어 시험장에서 마난 소년 김정일’). 김정일은 딸 설송의 홈스쿨링을 위해 황장엽의 아내 박승옥과 최고의 대학교수들을 동원하여 커리큘럼을 짜고 수업을 하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북한 최고위 간부들의 자녀가 다니는 귀족학교인 남산학교 이야기와 이 학교를 폭파한 김정일의 속마음, 저녁식사 중 후계자 문제로 촉발된 김일성의 부부싸움 등 알려지지 않았던 평양 로열패밀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펼쳐진다.

북한에도 대입부정 비리가 있을까? 최고 인기학과는 무엇일까?

무료의무교육에 관심을 가진 김일성과 달리 김정일은 영재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북한 최고의 수재들이 가는 대학은 김일성대도 김책공대도 아닌 바로 평성리과대학과 강계국방대학이다. 강계국방대학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장교복을 입고 호텔급의 식사와 숙소를 제공받으며 최고의 연구시설을 갖춘 곳에서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등 최신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공부를 한다(309쪽). 북한의 최고 인기직업은 외화를 벌 수 있는 외교관이나 무역일꾼인데, 외국어 영재학교인 평양외국어학교를 거쳐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나 평양외국어대학으로 가는 것이 가장 선망하는 코스다. 북한에서도 대학에 들어가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고 심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진학 경쟁이 치열한데, 해마다 시험지 유출, 채점 청탁, 뇌물 등의 입시 부정으로 몸살을 앓는다(311쪽). 인기학과는 외교관이 될 수 있는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나 평양외국어대학 외에도 요리사가 될 수 있는 평양요리전문학교, 전기공이 될 수 있는 평양전기전문학교, 백화점 간부로 배치될 수 있는 경제대학, 의학대학 등이며, 지질대학, 임산대학, 금속광산대학 등은 비인기학과다(108쪽).

대원외고에서도 인정받은 북한식 외국어 교수법 등 북한의 치열한 교육현장

김현식 교수는 남한의 러시아어 교재가 복잡한 문법 위주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쉽고 실용적인 러시아어 교재를 새로 만들었다. 이 책이 대원외고 러시아어 교재로 쓰이자 그는 직접 대원외고에 가서 특별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339쪽). 북한의 외국어 교육은 말할 수 있게 가르치는 교육이다. 외국어학교와 외국어대학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온전히 외국어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시킨다. 그 결과 유학이나 해외연수 한번 없이도 졸업과 동시에 바로 해외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게 된다. 또한 북한에서는 강의시간을 단 1분도 낭비하지 않도록 사전에 철저한 강의안을 짜도록 하는데, 김현식 교수는 남한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도 강의안 없이 수업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교원들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 해마다 교수경연대회가 열리는데, 여기서 입상하면 큰 상과 함께 김일성 당원이 되는 포상을 받으므로 열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또한 남한에서 사교육이 성한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학생의 성적이 나쁘면 전적으로 담당교원의 책임이 되므로 성적이 뒤진 학생을 개별지도 하거나, 과외집체학습으로 수업을 보충하거나, 학생들끼리 서로 도와주는 ‘호상학습반’을 편성하여 실력을 끌어올리도록 한다(330쪽).

이 외에도 해마다 김장전투와 명태 밸(창자) 따기 전투에 동원되는 대학교수들 이야기(80쪽)와 학생들의 연애를 막기 위해 고심하는 교원들 이야기(91쪽),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북한에서의 박사 따기(75쪽) 이야기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판판 다른 남과 북의 풍경, 남북으로 나뉜 가족들, 남북한의 언어 차이

50여 년간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살아온 남한과 북한은 그의 눈에는 같은 민족이면서도 화성과 금성만큼이나 다르게 비쳐졌다.

북한은 생활총화(비판회의)의 나라다. 생활총화는 ‘사상단련의 용광로’라 불린다. 불순물투성이의 철이 용광로의 불길 속에서 순수한 쇳물만 뽑혀 나오듯 사람도 생활총화의 화끈한 비판을 통해 새사람으로 변화된다고 믿는다. 이렇듯 북한에서의 생활화된 자기비판과 호상비판에 익숙해진 저자는 서울에 와보니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꽤 많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북한에서는 비판회의를 통해 서로 나쁜 것을 고쳐주는데 서울에서는 어떻게 비판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상대방은 깜짝 놀라며 남한에서는 그런 식의 공개비판은 없으니 꼭 고쳐주고 싶은 잘못이 있으면 술자리에서 술김에 슬쩍 말하라고 충고했다.

1974년 발표된 김정일의 ‘10대 생활원칙’(김정일의 십계명)은 친척이나 친우, 동향, 동창, 사제 사이에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게 했다. 북한 사람들에게는 본관이 없다. 가문과 문벌에 따라 사람이 모이면 결국 인맥이나 계파가 형성되고, 이는 북한인민 전체가 어버이 김일성의 핏줄이라는 사상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그의 눈에 남한은 인맥이 판치는 사회로 보였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실망의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나중에 정보대학원과 외국어대학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칠 기회가 주어진 것은 바로 인맥 때문이었다. 그가 있던 연구소의 연구소장과 정보대학원장, 그리고 정보대학원에서 알게 된 교수와 외대 학과장이 각각 대학교 동창과 중학교 선후배지간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남한은 인맥이 없으면 교수되기도 힘든 사회라는 것을 실감했다(143쪽).

이 외에도 서로 다른 남북한의 생일파티와 결혼식, 선거장 풍경이 묘사되며, 특히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권력세습과 그 여파로 인해 피폐해지는 북한 사회의 생활상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김일성은 적어도 인민을 위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그는 김일성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했다. 11년 보통 무료 의무교육을 비롯해 150일간의 산전 산후 유급 휴가제와 완벽한 탁아 보육시설, 토지 공유화 등 그가 북한 사회에서 이룩해놓은 사업들은 지금도 다른 나라에서 흉내조차 못 낼 것들이 수두룩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쟁고아나 다름없던 그가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무료교육 덕분이며 만일 그가 남한에서 살아야 했다면 대학 문전에도 못 가봤을 거라고 적어놓았다.

김일성은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분별력과 판단력을 잃었고, 권력을 아들 김정일에게 넘겨준 뒤 그에게 아부하며 말년을 보냈으며 그와 함께 북한도 형편없이 망가져 갔다고 하였다.

이 책에는 또한 황장엽과 그의 아내 박승옥, 리인모, 조선일보 류근일 논설위원의 아버지인 류응호 교수, 평양외국어대생이었던 김현희, 화물차에 깔려 의문사한 남일 부총리, 권력싸움에 희생당한 과학자 김봉환 교수, 우크라이나 여인과의 사랑으로 탈북자가 된 북한 최고의 수재 김지일, 남한 여배우 윤정희 납치사건 등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아울러, 지인으로부터 받은 ‘청첩장’을 그 사람의 첩이 보내는 초대장으로 오해한 이야기, ‘고희’의 고(故) 자를 보고 죽은 사람과 관련된 자리로 잘못 안 이야기, 한식을 찬 음식, 며느리를 뜻하는 자부라는 말을 ‘잡부’일꾼으로 알아들은 경험을 예로 들며 남북한 통일에 앞서 언어 통일이 시급함을 역설했다.

골수 공산주의자에서 북한 선교를 마지막 사명으로 삼은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그의 눈물과 기적과 감동의 이야기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런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에는 고향인 함흥 근교의 오로교회에 열심히 나가기도 하였지만 14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또한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는 북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운채로 잊고 살았다. 남한에 온 뒤 그에게 신앙으로서의 기독교를 찾아준 사람은 바로 서울에서 만나 새로운 삶의 동반자가 된 현재의 아내, 그리고 오로교회 유년주일학교 은사였던 최순직 목사(천안대 초대총장)다.

어린 시절 멈춰버린 그의 신앙은 50년도 훨씬 지나 1998년에 교회 선생님을 재회하면서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서울 성경신학대학원 대학교의 초대총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김현식 교수에게 전화를 하여 기도를 해주었다. 저자는 뉴올리언스 신학대학원에서 초빙교수로 있던 2001년 여름에 미국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북한에는 기독교인을 위한 봉수교회와 천주교인을 위한 장춘성당 등 극소수의 예배장소가 있다. 이것을 예로 들며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전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 기독교인을 위한 대외선전용일 뿐, 원칙적으로는 기독교 등 종교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 북한 선교를 위해 땀 흘리고 또한 북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많은 동포와 미국인들을 만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신의 남은 생 또한 북한의 선교와 개방을 위해 힘쓸 것을 결심했다. 통일이 되는 날, 트럭에 칠판과 백묵 가득 싣고 북으로 달려가 동료 교수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도 다시 제자들을 만날 것을 꿈꾼다. 그는 하나님은 용서와 화해를 원하며, 지난날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는 편지로 마치는 글을 대신했다.

김현식

1932년 함경남도 출생. 함흥 영생중학교 졸업. 흥남고급중학교에 다니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소년 병사로 투입되어 전투 중에 치명적 부상을 입고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뒤 평양사범대학에 진학했다. 1988년에 국립 러시아사범대 교환교수로 파견되어 러시아 교수와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그는 남한 정보부의 주선으로 전쟁 때 헤어진 누님을 42년 만에 만난 것이 북한 당국에 발각되자 러시아를 탈출, 1992년에 남한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탈북자로 서울에 머무르며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초빙교수, 한국 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러시아어 강사, 국가정보대학원 러시아어 강사, 통일정책연구소(이사장: 황장엽) 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미국 뉴올리언스 신학대학원 초빙교수에 이어 2003년 6월부터 예일대학 초빙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북한학을 강의했고 현재는 버지니아의 조지메이슨대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워싱턴의 북조선연구학회(평양문서선교연구소) 대표로 있다. 올 9월부터는 하버드대학에서 북한학을 강의할 예정이다. 현재 미국에서 북한선교를 위해 성경을 북한말로 고치는 작업과 북한 학생을 위한 영어사전 만들어 보내기 운동 등에 힘쓰고 있으며, 북한이 빨리 개방되어 그곳에 가서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가장 절박한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