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빌립보 장로교회 최인근 목사
시애틀 빌립보 장로교회 최인근 목사

어느해 12월, 수요 예배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인 저녁 8시 30분 경 수요예배를 나오지 않던 한 분이 성전 안으로 조용히 들어오더니 그의 가족들에게 눈으로 비상사태를 알리듯 하더니 그 가족들이 조용히 다 빠져나갔다.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이 오랜 목회 경험에서 오는 직감이라는 것일까? 서둘러 예배를 마치고 사연을 알아보니 이 모 권사님의 弟夫(제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단다. 이제 겨우 57세밖에 안되었다는데...

그분은 한국 식품점을 운영하는 분이었는데 몇 시간을 운전하여야 하는 먼 곳으로 배달을 나갔다가 변을 당하였다고 한다.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는 이민 목회이지만 이것 또한 예사롭지 않는 변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오히려 많은 은혜를 받았다.

세상을 일찍 떠난 인간적인 아쉬움과 눈물이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面面(면면)을 보니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분이었지만 그분의 일생을 한 눈에 보는 듯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당시 시애틀 총영사를 비롯하여 한인회 회장, 연방 상원의원 등 참석한 분들이나 보내 온 화환들이 보통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분은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덕망 높은 분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평가는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할 수 없다'고 했던가? 조용히 섬김의 삶을 살 때에는 그다지 비중이 큰 사람인 줄 몰랐었는데 누군가의 추모사에 깔린 사연처럼 그분의 빈자리가 그렇게도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를 이와 같은 장례식에 참여해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잔치집 보다 초상집에 가라'고 하셨던가 보다.

남자로 이 땅에 태어나서 아버지를 눈물로 아쉬워하며 배웅해 주는 자식들을 이 땅에 남겨 두고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면 그는 복된 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신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목사가 그를 위해 눈물 흘려주며 장례 예배를 주례 해 주는 그런 장로라면 그 또한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이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면서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 인해 많은 사회 저명 인사들이 손수건을 적시며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주는 그런 인물이라면 그도 또한 성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오늘 장례식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한 세상 살고 떠나는 것이야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치일 진데 그 누가 감히 비켜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다 가는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일까? 더불어 살 줄 아는 쇼셜리즘을 가지고 이웃들과 어우러질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 놓을 줄 알아야 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Selfish) 삶은 결코 쇼셜리즘을 만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황금만능인 이 시대에는 이처럼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 그러나 오늘 같은 장례식을 찾아가 보면 그와 같은 삶은 그 얼마나 초라하고 처량한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도 얼만 안 되는 그 재물 아끼려고 수전노처럼 혼자서 살고 이 세상을 마지막 하직하는 그 순간에도 쓸쓸히 혼자서 가야 하니 그보다 더 가련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교회에서는 충성스런 장로쯤은 되어야 하겠다.

장례식장에서 부를 마땅한 호칭 하나 없어 '아무개 성도'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 사람은 무슨 염치로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까? 최소한 주례하는 목사가 그립고 아쉬워 목이 메이는 그런 장로, 참으로 멋진 이름이 아닌가? 목사가 장레식장에서 눈물에 목이 메이는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여야 천국에 입성할 때도 우리 주님께서 신발 벗고 쫓아와 반겨 주시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식들이 목이 매어 추모사를 잃어내리지 못하는 그런 아빠! 참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그러나 이처럼 평범한 것 같은 이와 같은 삶을 불행하게도 이 시대의 많은 남자들이 추구하지 못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목회 현장은 온갖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에 이 시대에 어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는 목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늦었다 할 그 때가 곧 빠른 때이므로 우리들도 정신을 차리고 이처럼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멋진 삶을 추구해야 하겠다. 죽을 때 멋있는 사람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참 멋진 사람의 천국 환송을 통해서 가슴 부듯한 기분 좋은 경험을 하고 돌아와 참으로 하나님께 드릴 감사가 넘친다. 언제나 남의 일 같이만 여겨지는 천국 가는 그 길이 언제 내 앞에 닥쳐올는지 알 수 없기에 조금은 긴장감을 가지고 이 일을 생각해 보고 싶다.

57세의 한창 일 할 나이에 "내년 성탄절에는 더 멋진 교회를 만들자"고 작년에 호소해 놓고 올 성탄을 맞지 못한 채 떠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인생 무상을 새롭게 느껴 본다. 누구도 예측 못하는 인생의 이처럼 허망한 길을 속절없이 보내 버리지 않도록 오늘도 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히 다짐해 본다. 나를 위해 눈물 흘려 줄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어 놓아야 되겠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