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작은 한인교회에서 얼마 전에 선교포럼이 열렸다.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래서 아직은 미약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에, 선교포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한 해를 지나오면서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주기적으로 세미나를 열어 기본적인 준비를 진행해 왔다. 그리고 결실의 계절에 모두가 함께 모여 "어떻게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역인가?"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현장의 교회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것은 무척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고, 신자의 본분을 찾아나가기 위한 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능력과 잠재력을 깨우는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교회의 기능은 매우 다양하다. 예배, 교육, 친교, 봉사, 복음 증거 등. 이 중에 지상 교회의 최고 기능은 복음 증거이다. 성도는 영원히 예배하고 봉사하고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 증거라는 선교적 사명은 지상에 한정되어 있는, 유일한 역할이다. 이러한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불은 연소에 의해 존재한다면 교회는 선교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했다. 선교 비전을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그 자신을 신약교회라 칭할 권한이 없다. (레슬리 뉴비긴) 교회는 오순절 사건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신약 전체의 이야기는 세례 요한의 외침으로 시작하여, 바울의 선포와 권면으로 이어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선교로 귀결된다.
신학적 관점에서 선교 없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장소일 뿐이다.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선교는 교회의 부흥이나 상징이나 어떤 수단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는 교회 내 사역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선교는 교회 사역 중 하나의 기능으로 생각한다.
교회 중심주의는 역사적·제도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신학적 근거는 없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 확장이나 유지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신약은 교회의 존재 이유인데,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필수 사역이다.
선교는 선택이 아니다. 주기도문에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구절은 기독교 세계관을 새롭게 하라는 것이고, 우리의 삶의 질을 바꾸는 것이며,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선교의 종말적인 의미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자기의 일에 충성하고 있다. 예배와 봉사와 섬김과 교제가 활발하다. 이것이 교회의 역할이고 기능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근본 목적인 선교를 향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예배에 목숨을 걸고, 예배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선교를 위한 것이지 자기만 기뻐하고 감사하고 충만하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봉사와 섬김과 교제는 모두 선교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목표를 상실하고 행하는 모든 일들은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 될 수 있다.
사실, 오늘 교회의 관심은 선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에 대한 관심은 있어도 선교에 대한 구체적 이해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보고를 받지만 기도와 협력의 요청에는 매우 힘들어한다. 돈과 연관되는 것은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해한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재정으로 인해 수많은 문제를 발생시켰고, 부작용이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듣는 일은 즐겨 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연구하고 실천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선교 세미나와 행사에는 열심이지만,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현장의 필요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고, 자기들의 축제로 끝을 낸다. 자기 교단의 선교사가 몇 명인가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우주적 교회가 얼마나 되는지, 복음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다.
오늘 수많은 교회들이 헌금과 기도로 세계 선교와 협력하여 많은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나 전략에 대한 이해는 없고, 선교사들의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지만 형식적이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원주민 지도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 없다. (허버트케인)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차가 많고, 수만 리 떨어진 거리가, 일상의 사소하고 바쁜 일에 시달리는 성도들에게 관심거리가 못 된다. 교회에서 잠깐 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이다.
한국과 브라질 축구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해마다 브라질에서 3천개 이상의 교회가 생겨나고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서는 주일에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와 설 자리도 없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프리카 현장은 무시무시한 가난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비누 한 장, 칫솔 한 자루, 화장지 한 개, 깨끗한 냉수 한 잔을 마시지 못한 채 살다가 죽는 현장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지만 독거노인이 우리 동리에 얼마나 있는지,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다. 그냥 기도함으로 모든 것을 다 때우는 것이다. (고르반 신앙) 봉사하는 것도 자기들끼리 교회 내부에서 서로를 위하는 것이지, 세상을 향한 섬김이 되지 못하는 것을 쉽게 보게 된다. 교회가 부흥하고 잘 되면 결국은 자기들의 여유와 누림과 종교적 감사로 일관한다. 그것이 세상을 섬기기 위한 선교적 복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행사가 아닌, 선교에 대한 공부와 포럼이나 세미나가 필요하다. 작은 노력들을 통하여 교회와 신자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고, 더불어 바른 믿음, 하나님의 요구와 원하심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또한 이러한 일들이 본국 교회와 현장 곳곳에서 일어나면 좋겠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모스크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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