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성 목사.
(Photo : ) 김지성 목사.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뭐가 깨질까요? 당연히 계란이 깨어지겠지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무모한 일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강함’ 앞에서 ‘연약함’을 대비시킴으로써 연약함은 결코 강함을 이길 수 없음을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함’을 좋아합니다. 강할 때 무시받지 않고, 강할 때 비로소 성공을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강해지기 위해 힘을 키웁니다. ‘완력’, ‘학력’, ‘재력’, ‘체력’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연계의 원리는 ‘약육강식’입니다. ‘약한 것’은 ‘강한 것’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약육강식의 원리’는 항상 맞는 것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한 면으로 보자면 현미경 없인 볼 수 없는 미생물의 감염에 의해 맹수의 제왕이라는 호랑이나 사자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몇마리 모기의 습격에 의해서 거대한 몸집을 가진 코끼리가 도망을 치기도 합니다. 학벌로 치자면 비교가 되지 않는 분이 자신보다 뛰어난 학력을 가진 무수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사업을 펼쳐가기도 합니다.

역사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절대적 원리가 아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바벨론, 앗시리아, 마게도니아, 로마제국, 오스만제국, 나치독일, 파시즘 이탈리아는 패망국가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침략하여 무너뜨리려 했던 약소국들 가운데 어떤 나라는 여전히 존재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대표적 국가입니다.

‘강하기에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남기에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강함’을 추구하기에 앞서 ‘결론’부터 살펴보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진리의 보고인 성경은 ‘계란으로 바위를 부순 사건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음을 증언합니다. 세계최강 이집트 최정예 전차부대가 비무장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이기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전투체계를 갖춘 견고한 여리고성은 여호와의 법궤를 따라 침묵시위를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완전 무장한 싸움의 달인인 거인 골리앗은 물맷돌 몇 개만을 들고 돌진하는 소년 다윗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민족 청소를 목적으로 하였던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 하만은 힘없는 여인 에스더의 기도 앞에서 무기력하게 넘어져 버렸습니다.

‘강함’은 ‘완력’, ‘학력’, ‘재력’, ‘체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함’은 ‘연약함’ 속에도 존재합니다. 너무도 우습게 보이는 ‘약함’이 ‘강함’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육체의 가시’로 약하여졌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강함’만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약함’에도 강력한 힘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약함’으로 인해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하다고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함 속의 큰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꼭 계란이 깨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더라도 바위가 깨어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