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Photo :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중국 어느 병원에서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린 어린 아이를 실은 환자 이동용 침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모는 뒤를 울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통증을 못 이겨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가 누워 있었다. 간호사들은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중국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의 한 교외 들판에 6세 남자 어린이가 버려져 있었다. 두 눈을 잃은 채로. 발견될 당시 피해 어린이는 마취약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온 얼굴에는 피가 철철 흐르는 피투성이였다. 아이는 왜 이 지경으로 들판에 버려져 있었던가?

이 어린이는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 납치범들은 아이를 들판으로 데리고 가서 두 눈을 빼는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다. 도대체 왜? 장기밀매? 묻지 마 범죄? 아직까지 단정 짓기는 어렵다. 초기에는 이식 수술용 각막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묻지 마 범죄 쪽으로 가닥을 잡기도 한다.

중국은 현재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넓은 땅과 많은 인구수적 우위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세계 시장을 누비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교섭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하다. 그런데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세계를 주도하기에는 역부족인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은 국방이나 경제대국으로 자리를 잡기 전에 질서와 시민의식이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 세계를 이끌어갈 주전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기본적인 매너와 윤리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정도의 국민의식으로 어떻게 세계를 섬길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보면서, 나는 그저 중국이라는 나라를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우리 속에 있는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아니 내 속에 '나도 알지 못하는 내'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본다.

먼저 인간의 난폭성을 보게 된다.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저런 무참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회의가 든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조절장애를 부추긴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과 분노 앞에 무릎 꿇는 인간.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나타날 징조 가운데 하나가 '무정하다'고 말했다. 타락한 인간 내면에는 이렇게 잔인하고 난폭한 성향이 깔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성향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본래 존중되어야 한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사람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은 짓밟혀서는 안 된다. 아무리 힘없는 어린아이일지라도 인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의 편리대로 하려고 대든다. 이것은 현대판 바벨탑 건축의 시도이다.

아무리 돈이 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이 사건의 배경이 무엇일까? 묻지 마 범죄? 장기밀매? 어떤 일이 있어도 허용될 수 없는 비윤리적인 일이다. 만약 장기밀매가 원인이라면, 어떻게 인간의 가치를 돈 몇 푼과 거래를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돈에 눈 먼 사람들은 "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다. 돈에는 정당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아무리 돈 되는 일이더라도 정당성이 부여되지 않는, 해서 안 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정당하지 않게 돈을 버는 데는 아예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설령 정당하게 벌었을지라도 정당하지 않은 데 쓰인다면, 그것 역시 돈의 오용에 불과하다.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나도 여기서 예외는 될 수 없다. 다만 복음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쓸 뿐이다.

타락한 인간 본성의 뿌리 깊은 곳에 자아중심성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자기만 생각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밖에 모른다. 남의 불행을 사서라도 자신의 행복을 만들려 한다. 인간의 이기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픔과 고통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려 애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애쓴다. 살리려 애쓰는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는 행복하다. 그러나 죽이고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는 불행하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일지라도 이들이 가져오는 해악은 너무 크다. 본디 긍정적인 영향력보다 부정적인 영향력이 파장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그런데 내 안에도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는 성향이 나도 모른 채 잠복해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생각한다. "나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그런데 "내가 알지 못하는, 감추인 나'" 있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많다. 아니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내 모습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진정한 내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표현이다.

중국인 가운데도 소수의 특정인에게 있는 모습이다. 이것으로 중국인 모두를 폄하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중국인이 어떻다는 것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있는, 발견되지 않은 자화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화상 때문에 마음 아파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치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내어 드리자는 것이다. 부끄러운 자화상이기에 감추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그런 성향들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나도 모르게 밖으로 표출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를 짓는다.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숨겨진 내 모습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면서 미리 경계한다면, 그게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 안에서 보는 내 모습을 성령께서 치유하시도록 내어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는 영적인 사람. 그러기 위해 내 안에 감추인 모습을 주님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 내 안에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돌출되어 나오기 전에 성령이 다스리는 마음을 일구어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