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0:19절에 하나님께서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생명을 선택하여 복을 얻게 됩니까? 어떤 사람들이 사망을 선택하여 저주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 18:14절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할 때 우리들의 삶에 죄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죄가 가져다 주는 결과는 멸망입니다. 사망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처럼 된 자리를 내려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복된 자리로 가게 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나를 부러워해야 합니다. 남들이 나를 존경하고 우러러 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내가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남이 나보다 높아지는 것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낮아지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고 있는지 확인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첫째, 나의 부끄러움이 드러날 때 구별됩니다. 부끄러움이 드러나면 내가 하나님처럼 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부끄러움을 가려야 합니다. 숨겨야 합니다. 그런 부끄러운 모습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들 속에는 자신의 그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까 하여 불안해 합니다.
범죄한 아담이 무화과 나무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차이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러 갔던 사울 왕은 모든 것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사무엘이 와 죄를 지적합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악이 드러났습니다. 그 때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삼상 15:30]
사울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 했습니다. 백성들의 높임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백성들로부터 무시와 멸시, 버림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실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드러나게 되었을 때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다고 인정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은혜를 구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시편 51편을 기록합니다. 이것을 성전에 두고 온 백성이 잊지 않도록 반복하여 읽도록 했습니다.
우리들의 허물과 부끄러움이 드러날 때 나는 누구입니까? 부끄러움을 감추려 하십니까? 나는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허물과 부끄러움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니까? 스스로 낮아지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고 있는지 확인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둘째, 무시와 멸시를 받을 때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이 날 우습게 본다는 것을 알 때 자신이 하나님처럼 높아져 있는 사람들은 정말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자존심을 짓밟을 때 나는 누구입니까?
수르보니게 여인은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무시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내가 누군데 하는 자존심을 꺾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생명을 선택한 것입니다. 복을 받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인이 네 예물은 기쁘게 받지 않고 아벨의 예물을 기쁘게 받았습니다. 내가 성의가 무시된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상한 자존심이 시키는 대로 사망을 선택하여 저주 가운데로 떨어졌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갈 때 시므이라는 노인이 다윗을 욕합니다. 무시와 멸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왕인데, 내게는 막강한 장군들이 따르고 있는 왕인데 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하면서 더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볼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내 모습을 볼 때 당연한 것입니까? 낮아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아니면 억울한 것입니까? 만일 억울하다면 나는 나를 누구로 보고 있느냐는 질문을 해야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고 있는지 확인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셋째,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부딪힐 때 드러납니다.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허비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칠 때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을 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긍휼을 입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사람은 굶어 죽더라도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서도 품꾼이 아니라 내가 아들인데..... 한다면 그는 보잘 것없는 자존심을 세우는 패역한 아들이 될 뿐입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가 보이는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상황이 내 부족과 한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돌려버립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광야에서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리가 구원받는 자리에서 한 무리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부끄러움이 드러날 때...... 무시와 멸시를 받을 때..... 자신의 한계에 부딪칠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입니까? 구원 받는 무리들과 멸망을 당하는 무리들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설명합니다. 세리와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탁월함으로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형편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라를 배반하고 민족을 수탈하며 인정도 없이 온갖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죄로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생명을 얻는 자리로 갔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는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던 요한이 요단 강에서 침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3: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생명을 선택하여 복을 얻게 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는 사람들입니다.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집안에서 믿음의 자녀로 양육 받아온 하나님을 몰라 죄를 짓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누가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하고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구원 받은 강도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짓을 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에게 여전히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명령하고 있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올 때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는 자는 생명을 선택하여 복을 얻게 된다면 그 하나님 나라를 어른처럼 받아들이면 사망을 선택하여 저주 가운데 떨어지게 됩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
*고난을 지나가는 욥도 그렇습니다.
또 어린아이 같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따라갑니다.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사람들은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이 왕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왕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묻고 또 묻는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직 자신이 연약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은 어린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높아진 자리에서 내려와 주의 긍휼을 구하는 자리로 내려갈 때 그것이 생명의 선택입니다. 복이 따라올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