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교회 김성진 담임목사
(Photo : 기독일보) 나눔교회 김성진 담임목사

"요셉은 부모도 형제도 없는 이방 땅에 노예로 잡혀가 최악의 환경에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붙들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청소년들이 방황할 때 누구 한 명이라도 잡아주는 교사나 어른이 있다면 그 아이는 다시 설 수 있어요. 나눔교회에 오는 자녀들은 단 한 번을 오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비전을 품을 수 있도록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교회'를 표어로 지난달 창립 및 임직감사예배를 드린 나눔교회 김성진 목사. 마흔 살에 첫 개척을 하게 된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뤄가실 '꿈'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열한 번의 가출과 끝없는 방황, 누군가 따뜻한 손 한번 내밀어 줬더라면...

초등학교 3학년, 어린 나이에 가출을 시작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방황의 끝을 달렸던 그는 청소년들의 말 못할 상처들과 아픔을 삶으로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목회자다. 아니 목회자이기에 앞서 '삼촌'이고 '작은 아버지'다. 나눔교회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교회와 김 목사의 사택을 '참새가 방앗간을 들어들 듯' 드나드는 것도 김성진 목사에게는 말 못할 고민도, 감춰야 하는 상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뒤 늦게 소명을 받고, 버스 종점이 즐비한 서울 변두리에서 목회를 하신 아버지 때문에 집은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어요.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저만 외가댁에 보내져서 3년을 살았는데, 어머니만 딱 두 번 절 보러 오셨어요. 어머니가 오시면 절 두고 가실까 봐, 안 자려고 애를 쓰다가 깜빡 잠들면 가시곤 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집에 올라왔는데, 다른 형제들하고도 뭔가 어색하고 적응이 힘들었어요. 그러다 3학년 새 학기 첫날, 짝꿍의 놀림에 욱해서 그 애를 심하게 때리고 집에서 옷가지 몇 개만 챙기고 도망친 게 첫 가출이었죠. 열 한번이 넘도록 가출해서 사고도 많이 치고 경찰서도 들어가고 소년원까지 갔으니 할말 다 했죠."

목회자 자녀의 숙명이랄까. 가출해서 방황하다가도 주일만 되면 근처 교회를 찾아가 '알아서' 학년에 맞는 주일학교 교실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 세수도 못하고 꾀죄죄한 형색인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 한 사람만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고민을 들어줬다면 그의 방황은 조금 일찍 끝났을지 모른다.

방황에 종지부 찍게 해준 은사 '안중범 선생님'을 만나다

"이 세상에 썩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치인데 이미 썩을 대로 썩었다. 둘째는 교육이지만 나도 선생으로 참 교육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종교인데 아직까지는 타락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종교계를 네가 책임져봐라!"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꿈도 희망도 없던 김성진 목사를 잡아준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인 안중범 선생님이 새 학기 첫날 그를 불러 던진 한마디다. 종교계를 책임져보라는 한 마디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날부터 1년 동안 매일 선생님과 함께 하교에 '특별 과외'를 받았다. 기초가 전혀 없는 김성진 목사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고 상담 해준 안 선생님이 없었다면 오늘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제안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믿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안중범 선생님이 아버지 친구의 아들이셨어요. 아버지께서 미리 특별히 부탁하신 거였어요. 그렇게 방황을 접고 지금까지 다시는 곁눈질 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청소년들이 방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갖고 이끌어 주면 금방 돌아오는 게 또 아이들이에요.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많은 관심과 투자를 하는 것은 아이들과 직접 만나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동심리와 교육학을 전공한 김성진 목사의 사모와 만나 아이들의 세세한 상황을 나누고, 그 주에 가르칠 내용들을 철저히 준비하는 나눔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은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삶으로 전달되도록 솔선수범하는 '롤 모델'로 세워지고 있다. 주일예배 찬양을 인도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연습 때도 김성진 목사가 가능한 참석해 신앙적인 부분들을 먼저 점검하고, 이끌어 주는 '멘토'가 되고 있다.

나눔교회 창립 및 임직감사예배
(Photo : 기독일보) 지난 4월 21일 열렸던 나눔교회 창립 및 임직감사예배 모습

평생 부목사만 하고 싶던 그가 담임목사가 되고 달라진 것?

갈렙처럼 영원한 '2인자'가 되고 싶었다던 김성진 목사는 부목사로 시작해 부목사로 은퇴하고 싶었기에, 무려 16년을 부교역자 생활을 했고 목사안수도 일부러 늦게 받았다고 한다. 신학대 다니면서 전도사로 시작해, 안수를 받고 부목사로 어느 정도 사역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꼭 한번은 담임 목사가 돼야만 하는 고정관념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는 생각이다. 부 목사는 '부(不)' 목사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유교적 사상이 깊게 박힌 한국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역시 보이지 않는 계급을 은연중에 만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애틀랜타에 오기 전 다른 지역에서 한 목사님과 함께 뜻을 모아 25명 정도 출석하던 교회를 250명까지 성장시키는 경험을 했어요. 물론 전적인 하나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계가 왔어요. 제가 주로 대학 청년들 사역과 청소년들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담임 목사님께서 조금씩 저를 경계하시면서 행정과 교회관리 이외에는 다른 사역을 온전히 맡기지 않으셨어요. 교회 중역분들에게도 그러셔서 결국 교회에 어려움이 생겼고, 잠시 목사님께서 기도원에 가시고 제가 수습을 했어요. 어렵게 문제가 거의 봉합돼 가는데, 서둘러 내려오신 담임 목사님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담임 목사가 되니 그땐 이해되지 않던 것들도 이해되고, 또 담임과 부교역자들의 관계에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게 됐습니다."

담임이 되니 눈에 보이지 않던 별의 별 것이 다 보인다고 웃는 김성진 목사는 담임이지만 부교역자들에게 한번 맡긴 일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신뢰의 관계로 만들 것이라고 다짐한다. 지금도 한번 맡긴 일은 너무 상관하지 않아서(?) 오히려 문제라는 그는 '시집살이 한 사람이 시집살이 시킨다'는 옛말을 거스르는 일을 해볼 작정이다.

악취 나는 닭 공장, 그곳에서 발견한 이민목회의 소명

부목사 시절, 한번은 닭 공장에 일하는 성도들을 심방한 적이 있었다. 닭 공장 인근에서부터 코를 찌르는 악취는 공장이 가까워 질 수록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곳에서 목사님을 반기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성도들을 보며 김성진 목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교회에서는 늘 환하게 웃고 열심히 봉사하는 성도들이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헌금하시고, 그걸로 사례를 받는다는 걸 알고 정말 깊이 회개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실까라는 의문과 함께 말씀과 믿음이 있으니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구나 깨닫고 이민목회를 해야 겠다고 결심했어요. 이분들에게 영원한 꿈과 소망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김성진 목사를 이리 저리 깎으시고 다듬으셔서 나눔교회를 세우시고, 이루고 싶으신 비전은 한 마디로 '삶'이다.

'복음의 빚 진 자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나눔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나눔으로 무너진 가정과 지역사회를 회복하고', '청지기의 삶을 나눔으로 자녀들이 세계를 품을 꿈꾸는 자로 세우고', '변화된 삶을 나눔으로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며',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함으로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 나눔교회의 5대 비전이다.

'목사님이 하고 싶은 대로 사역해 보시라'고 길을 열어주고 뒤에서 기도해주는 성도들이 있기에 든든하다는 김성진 목사는 앞으로 장년들이 다시 한번 복음으로 변화되어 삶으로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고, 청소년들을 세우는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나눔교회는 4579 Abbots Bridge Rd. Duluth GA 30097에 위치해 있으며 매주일 오전 11시 대예배와 수요 기도회 등 다양한 모임이 준비돼 있다. 교회 404-452-4676, 사택 404-451-7452. 홈페이지 www.nanumchurch.com 준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