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1일에 있었던 슈퍼볼 경기에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대(大)역전극이 펼쳐졌다. 뉴잉글랜드 페이트리엇 팀은 경기를 거의 다 이기다가 막판에 캐롤라이

남성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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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팬더스 팀의 천재 쿼터백에 의해 후반 몇 분을 남겨두고 1점차로 역전을 당하고 말았다. 이 때 뉴잉글랜드 팀의 감독은 최후의 작전을 구사한다. 최대한으로 상대방 골문 가까이 나아가는 작전이다. 그러나 아무리 앞으로 전진해도 좀처럼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몇 초를 남겨두고 48야드 거리에서 감독은 승부를 던진다. 키커를 등장시킨 것이다. 보통 감독같으면 이 정도의 먼 거리에서는 절대 키커를 등장시키지 않는 법인데, 감독은 ‘에덤 비네트에리’라는 선수를 불러 들였다. 그는 이미 2번의 실패를 경험했던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키커를 감독이 불러들인 것은 그만큼 믿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힘껏 볼을 차 올렸다.

 


48야드 지점에서 차 올린 공은 상대방의 골문을 통과하면서 경기는 뉴잉글랜드 팀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풋볼에서 키커는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몇 번 등장하지 않는 선수이다. 오히려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다. 남들은 전후반을 화려하게 조명을 받아가면서 경기를 하지만, 키커는 늘 벤치 뒤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기다리며 혼자 공을 차는 연습을 한다. 화려한 주연들 뒤에서, 가려져 있는 빛나지 않는 자리가 바로 키커의 자리이다.


그러나 뉴잉글랜드 페이트리엇 팀은 에덤 비에네트리라는 선수가 없었다면, 2004년 슈퍼볼의 승리를 결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말없이 뒤에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들의 땀과 수고 때문에 화려한 수퍼볼의 승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화려한 주연보다 뒤에서 말없이 순종한 자들의 땀과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화려한 주연보다 뒤에서 말없이 순종하는 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초대교회가 감당했던 복음의 역사 중에 우리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만을 기억하지만,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선교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도왔던, 수많은 헌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디아 같은 여성기업인이 있었기 때문이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헌신된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 끝에 어김없이 자신을 위해 함께 동역하며 뒤에서 말없이 순종했던 수많은 성도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저들의 말없는 순종이 없었다면 결코 사도 바울의 이방선교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원리이다. 교회는 담임목사가 주연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주연은 오직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하심을 만천하에 선포하기 위해 담임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은 말없는 순종의 실천자들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긴 인내를 가지고 자신의 역할이 쓰임 받기를 위해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어떨 때는 자신이 한다고 했지만, 실수할 때가 있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용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영원하신 주인공, 교회와 역사의 감독자 되신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세상이라는 필드에서 대역전극의 감격과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