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설교를 듣고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TV와 라디오, 컴퓨터에서 읽고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는 하지만 포장만 하나님의 말씀일 뿐 그 속에 사람의 생각과 편견을 피력하는 사람의 말이 너무나 범람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소망을 알차고 영광스러운 자격으로 가꾸어 결실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때입니다.

사도 바울의 목회서신 가운데 디모데에게 당부한 말씀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고 했습니다. 지금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깨닫고 회개하며 그 말씀에 일치하는 생각, 말, 행동으로 거듭나고 성숙되기를 힘써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기뻐하지 않고 자기 개인의 사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자기 입장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자기 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말과 사람을 찾아서 좇아 다닌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의 ‘온전한 자들’이란 믿음이 성장한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 중에서 지혜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감추어 두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선포하게 하시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 중에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 지혜를 그 시대의 관원들조차 하나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만일 유대 관원들이나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나 또 바리새파에 속한 율법사,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았다면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지혜, 영감적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만든 장본인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토라를 외우다시피 하며, 남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자기는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억지로 복종하게 만들려고 했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외식하는 신앙을 마태복음 23장에서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일곱 번이나 저주의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왕국에 참여시키실 목적의 경영은 어떻게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는 것일까요?

본문 9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회개해서 죄 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살겠다고 신앙고백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혜사라는 성령을 파송 받고 성령에 이끌리어 이 세상을 기대하지 않고 하늘소망을 가꾸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귀한 보배로 알고 가장 존중하고 사랑하며 섬기기를 힘쓰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고, 귀로도 들어 알아차릴 수 있는 곳도 아니며, 또 믿음으로 연구해서 짐작할 수 있는 곳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하늘나라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곳은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곳입니다.

10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계획과 비밀을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는 성령을 통해 다 알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성령이 그 모든 비밀을 알게 하시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조건을 영원히 누리게 하시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힘들고 억울하고 괴로운 입장을 누군가를 붙들고 호소하고 하소연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기대 걸기보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을 통해 모든 상황들을 깨달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은 내게 다가오고 있는 사정과 형편, 처지뿐만 아니라 절망과 고통, 억울하고 불행한 것을 당하는 원인까지도 다 알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성령을 다윗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5-6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일로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았을 때 자신의 죄로 인해 침상을 적시고, 식음을 전폐하며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사단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영을 받았습니다. 그 성령이 오신 이유와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신령한 소망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을 받고 나면 말씀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며 말씀에 대한 기대가 간절해지면서 그 말씀에 기대를 걸고 복종하며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16-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본문 13절의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함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장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떠듭니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 말하는 의도와 목적이 자신의 명분과 이속을 챙기자는 것으로 귀착되어집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꾸며낸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짓 포장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 얻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되는 그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진짜 성령으로 선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 사람이 제멋대로 떠드는 말인지 구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를 모으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믿음을 가꿔야 합니다. 이 시대는 이단이 난무하는 혼란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9장13-14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해 박사학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사람의 가르치는 말에 신앙인으로서는 기대 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지혜를 없어지게 만드셨고 명철과 총명이 가리워지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계시과 조명이 말씀의 거울로 잘 비춰질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고 믿어지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믿음이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믿어져서 그 말씀에 순종하고 이끌리어 쓰임받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가장 기대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보배로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생각만 예수님을 기대하고 의지하지 정작 생활은 세상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욕심 부리고 감정에 이끌려서 원수 맺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이 아무리 하나님을 알게 해 주셔도 알아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게 하기 위해 먼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지독하게 고집부리고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인생은 계속 육에 속하여 살다가 지옥 가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련하게 보고 깨닫지도 못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인생이 생기와 소망이 없어 보이고, 여러 가지 일들로 기운 없고 힘들어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룩하신 구속 사역의 계획을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일이 없습니다.

회개(悔改. repentance)라는 것은 지옥으로 가던 인생이 천국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으로 그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온전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는 즉시 하나님의 생명책에 우리들의 이름이 기록된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이 먼 훗날이라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내가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고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나를 하나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다양하게 써주시다가 하나님 앞으로 부르심을 받게 될 때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 품에 안기는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