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는 죄 아래 태어났고,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죄악의 근성을 피로 이어 태어났기 때문에 죄 짓는 악취미를 삶에 어떤 낙으로 즐기면서까지 살아온 것이 아담의 후예, 온 인류의 생리적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저 잘난 멋에 사는 인생은 하나님 앞에 그 교만으로 인해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당한 실패와 절망이며 감당할 수 없는 부담과 고통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가 ‘나는 이것밖에 안되었구나’ 하고 엎어지기는 했었는데 일으켜 줄 자도 없고 스스로 털고 일어설 힘도 없을 때에 그 인생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잘 반성해 보노라면 ‘아! 내가 어리석었고 또 무능했고, 지나친 욕심과 기대를 가지고 너무 허욕이 앞섰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자신의 신세를 망치고 엎어졌지만 스스로 떨치고 일어날 힘이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더 이상 가능성을 기대할 것이 없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럴 때 인간은 가장 솔직해져야 합니다.
1. 부모님이 나를 낳고 싶어서 낳은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게 하심으로 낳았으니까 하나님이 왜 낳게 하신지를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종교 심리인데 흑인, 황인, 백인 차별없이 사람으로 태어난 인생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생각하게끔 되어있는 것은 그의 인생이 어머니 뱃속에서 출생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의 인생의 심령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영을 가졌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지극히 깊은 절망에, 몹시 다급한 상황에, 죽을 지경에 몰리게 되어서야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원숭이가 유인원이라고 해서 인류의 조상이라고 다윈이 별소리를 했지만 이제 21세기 과학은 그것도 헛소리였다고 취급하고 미국에서는 생명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지론이 나왔는데 이것은 곧 성경적으로 돌아가야 가장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았을 때에 그 결과는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 허세 떨고 광내는거 보고 원숭이 흉내내는 식으로 빚이라도 얻어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옷이 낡기도 전에 빚이 숨통을 조여 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지나친 과시적 허세가 자기 인생에 엄청난 부담을 지게 했고 여러 가지로 주변에서 숨통을 조르는 오라줄에 얽혀 매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 강단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세상의 어떤 물리적 사치품으로 단장하려 하지 말고 진리와 성령으로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와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이 보실 때 최고로 아름답다 하시고 그 사람은 얼굴이 생기와 소망으로 넘치고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행복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기자는 미상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부르는 노래인데 본문 1절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에서 깊은 데라고 하는 곳은 바다 밑바닥이 아니고 자기 인생이 가장 깊은 절망과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시달리다 못해 죽을 지경이 되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절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귀울이소서”라는 말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애통하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끓는 부르짖음에 귀를 귀울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처럼 ‘하나님의 자비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이 사람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몰랐다면 이 사람은 아무리 깊은 절망과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줄도 몰랐을 것이고 부르짖을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데 주여 누가 서리이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하니까 자기가 너무나 깊은 절망과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가지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그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로 자기를 구원해주셔야 하는데 거기에 가장 큰 장애물이 죄악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내가 지은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엄청나게 두터운 장벽으로 가로 막아놨다 이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 듣고 믿어져서 그물을 내렸더니 한 그물로 두배를 채워 배가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만 그 사실로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을 계속 모시고 살면 수지 맞겠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죄가 많은 인생이라 모시지 못할 것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참회가 베드로로 하여금 얼마나 비참한 회개로 통곡하게 했겠습니까!
2. 본문을 보면 ‘내게 귀를 귀울여 주시라고 내 사정을 들어주시고 자비와 긍휼로 날 건저내시고 살려주시라고’ 하고 싶은데 제일 크게 부담되는 장애물이 자기가 지은 죄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데 주여 누가 주 앞에 설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악을 감찰하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밤에 깊은 골방에서 무슨 짓을 했던지 간에 하나님은 다 살펴보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피할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감찰하신다고 하면 누가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은 죄값도 내가 치르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대신 벌 받아 주신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고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지게 되었을 때, 그때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예수 이름 의지해서 회개했더니 하나님이 내 죄를 예수 이름으로 다 용서하시고 “너는 이제 회개했으니까 죄인이 의인으로 바뀌어 졌느니라. 그래서 너는 의로워졌다. 너로 내 아들, 딸을 삼으리라. 내가 다시 보혜사 성령을 너에게 줘서 너로 하늘나라를 목적으로 살게 하고 하늘나라까지 데리고 가게 될 것이다”고 하셔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4절에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가지고 나를 감찰하신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사람 없으니까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희생양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대책을 하나님이 세워놓으셨고, 또 그렇게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줄 내가 알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이라도 감히 하나님 앞에 입을 열어 회개하고 긍휼을 호소하며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왜 아들을 희생시켜서 이 죄인 괴수들이 회개만 하고 신앙고백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대책을 세워주셨느냐? 그 이유는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라’ 다시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을 통한 대속의 은혜를 알게 믿어지게 회개케 하시고 그가 회개해서 그 엄청난 지옥 형벌의 죄와 저주의 죄를 예수 이름으로 용서받았을 때 그 아들을 희생시키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엄청난 빚을 진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해주신 그 은혜가 황송무지해 너무나 감사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아들을 희생시키고 대속하시어서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섬기게 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희생 제물로 우리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고 그 대신에 우리가 성령의 계시와 조명, 감동과 체험을 통하여 그 아들을 알아보고 대속의 은혜가 믿어지고 성령이 회개 시키시는 대로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죄 없는 의인의 자격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아바 아버지 할 수 있는 아들, 딸의 신분으로 하늘나라 호적의 생명책에 등록시켜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 뜻 가운데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5절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내 갈 길을 지시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 것도 아니요, 교회 다니면서 할짓 못할짓 다하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도 아닌, 하나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자녀의 구실을 다해야 합니다.
3. 6절에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반복해서 7~8절에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자기문제도 이스라엘 전 국민들의 문제도 하나님 앞에 너무나 잘못된 모습들이라서 이토록 자기도 회개하고 그 회개하는 모습과 회복되어지는 과정을 이스라엘에게 알게 하고 보여주면서 이스라엘도 이같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믿음이 되어 절망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생명길로 이끌어 가시면서 하나님의 남은 뜻을 이루실 지체나 그릇이나 도구들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앞에 임마누엘로 하나님 모시고 살면서 쓰임 받는 모습 보자는 것이 영적 지도자로서 가장 간절한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도 아직도 성령을 못 받고 이렇게 하늘나라에 대한 신령한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는 메마른 심령들이 있습니다. 잠언 1장 33절에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고 했습니다. 믿되 회개하고 성령 받고 성령에 이끌리는 믿음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 것이고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게 살 것입니다. 잠언 19장 2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어떤 올무와 재앙으로 인생을 망치려 해도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이 자녀로 맞아 주시고 그의 인생을 말씀으로 생명길을 지시하시며 성령께서 하늘소망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마귀가 함정을 파고 올무를 쳐놓았다 할지라도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함정에 빠질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편안히 감사함으로 하나님 섬기기를 중심으로 소원할 때 넉넉히 섬기고 남을 수 있는 조건으로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럴 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잘 반성해 보노라면 ‘아! 내가 어리석었고 또 무능했고, 지나친 욕심과 기대를 가지고 너무 허욕이 앞섰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자신의 신세를 망치고 엎어졌지만 스스로 떨치고 일어날 힘이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더 이상 가능성을 기대할 것이 없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럴 때 인간은 가장 솔직해져야 합니다.
1. 부모님이 나를 낳고 싶어서 낳은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게 하심으로 낳았으니까 하나님이 왜 낳게 하신지를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종교 심리인데 흑인, 황인, 백인 차별없이 사람으로 태어난 인생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생각하게끔 되어있는 것은 그의 인생이 어머니 뱃속에서 출생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의 인생의 심령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영을 가졌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지극히 깊은 절망에, 몹시 다급한 상황에, 죽을 지경에 몰리게 되어서야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원숭이가 유인원이라고 해서 인류의 조상이라고 다윈이 별소리를 했지만 이제 21세기 과학은 그것도 헛소리였다고 취급하고 미국에서는 생명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지론이 나왔는데 이것은 곧 성경적으로 돌아가야 가장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았을 때에 그 결과는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 허세 떨고 광내는거 보고 원숭이 흉내내는 식으로 빚이라도 얻어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옷이 낡기도 전에 빚이 숨통을 조여 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지나친 과시적 허세가 자기 인생에 엄청난 부담을 지게 했고 여러 가지로 주변에서 숨통을 조르는 오라줄에 얽혀 매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 강단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세상의 어떤 물리적 사치품으로 단장하려 하지 말고 진리와 성령으로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와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이 보실 때 최고로 아름답다 하시고 그 사람은 얼굴이 생기와 소망으로 넘치고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행복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기자는 미상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부르는 노래인데 본문 1절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에서 깊은 데라고 하는 곳은 바다 밑바닥이 아니고 자기 인생이 가장 깊은 절망과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시달리다 못해 죽을 지경이 되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절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귀울이소서”라는 말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애통하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끓는 부르짖음에 귀를 귀울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처럼 ‘하나님의 자비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이 사람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몰랐다면 이 사람은 아무리 깊은 절망과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줄도 몰랐을 것이고 부르짖을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데 주여 누가 서리이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하니까 자기가 너무나 깊은 절망과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가지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그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로 자기를 구원해주셔야 하는데 거기에 가장 큰 장애물이 죄악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내가 지은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엄청나게 두터운 장벽으로 가로 막아놨다 이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 듣고 믿어져서 그물을 내렸더니 한 그물로 두배를 채워 배가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만 그 사실로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을 계속 모시고 살면 수지 맞겠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죄가 많은 인생이라 모시지 못할 것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참회가 베드로로 하여금 얼마나 비참한 회개로 통곡하게 했겠습니까!
2. 본문을 보면 ‘내게 귀를 귀울여 주시라고 내 사정을 들어주시고 자비와 긍휼로 날 건저내시고 살려주시라고’ 하고 싶은데 제일 크게 부담되는 장애물이 자기가 지은 죄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데 주여 누가 주 앞에 설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악을 감찰하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밤에 깊은 골방에서 무슨 짓을 했던지 간에 하나님은 다 살펴보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피할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감찰하신다고 하면 누가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은 죄값도 내가 치르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대신 벌 받아 주신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고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지게 되었을 때, 그때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예수 이름 의지해서 회개했더니 하나님이 내 죄를 예수 이름으로 다 용서하시고 “너는 이제 회개했으니까 죄인이 의인으로 바뀌어 졌느니라. 그래서 너는 의로워졌다. 너로 내 아들, 딸을 삼으리라. 내가 다시 보혜사 성령을 너에게 줘서 너로 하늘나라를 목적으로 살게 하고 하늘나라까지 데리고 가게 될 것이다”고 하셔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4절에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가지고 나를 감찰하신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사람 없으니까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희생양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대책을 하나님이 세워놓으셨고, 또 그렇게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줄 내가 알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이라도 감히 하나님 앞에 입을 열어 회개하고 긍휼을 호소하며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왜 아들을 희생시켜서 이 죄인 괴수들이 회개만 하고 신앙고백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대책을 세워주셨느냐? 그 이유는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라’ 다시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을 통한 대속의 은혜를 알게 믿어지게 회개케 하시고 그가 회개해서 그 엄청난 지옥 형벌의 죄와 저주의 죄를 예수 이름으로 용서받았을 때 그 아들을 희생시키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엄청난 빚을 진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해주신 그 은혜가 황송무지해 너무나 감사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아들을 희생시키고 대속하시어서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섬기게 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희생 제물로 우리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고 그 대신에 우리가 성령의 계시와 조명, 감동과 체험을 통하여 그 아들을 알아보고 대속의 은혜가 믿어지고 성령이 회개 시키시는 대로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죄 없는 의인의 자격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아바 아버지 할 수 있는 아들, 딸의 신분으로 하늘나라 호적의 생명책에 등록시켜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 뜻 가운데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5절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내 갈 길을 지시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 것도 아니요, 교회 다니면서 할짓 못할짓 다하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도 아닌, 하나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자녀의 구실을 다해야 합니다.
3. 6절에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반복해서 7~8절에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자기문제도 이스라엘 전 국민들의 문제도 하나님 앞에 너무나 잘못된 모습들이라서 이토록 자기도 회개하고 그 회개하는 모습과 회복되어지는 과정을 이스라엘에게 알게 하고 보여주면서 이스라엘도 이같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믿음이 되어 절망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생명길로 이끌어 가시면서 하나님의 남은 뜻을 이루실 지체나 그릇이나 도구들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앞에 임마누엘로 하나님 모시고 살면서 쓰임 받는 모습 보자는 것이 영적 지도자로서 가장 간절한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도 아직도 성령을 못 받고 이렇게 하늘나라에 대한 신령한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는 메마른 심령들이 있습니다. 잠언 1장 33절에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고 했습니다. 믿되 회개하고 성령 받고 성령에 이끌리는 믿음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 것이고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게 살 것입니다. 잠언 19장 2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어떤 올무와 재앙으로 인생을 망치려 해도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이 자녀로 맞아 주시고 그의 인생을 말씀으로 생명길을 지시하시며 성령께서 하늘소망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마귀가 함정을 파고 올무를 쳐놓았다 할지라도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함정에 빠질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편안히 감사함으로 하나님 섬기기를 중심으로 소원할 때 넉넉히 섬기고 남을 수 있는 조건으로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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