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은 예수를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주목하며 체험한 후 그분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격에 대한 호칭이다. 예수께서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셨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구원하기 위해서 성육신되신 주님의 호칭이기 때문이다. ‘말씀’이란 곧 하나님이신 영원한 아들의 위격을 말하는 또 하나의 성호(聖號)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해야 맞는 것이다.
“되어”(became)란 창조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낳은바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성자는 성부로부터 말미암았으되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 않았고 오직 낳은바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육신”이라는 말은 분명 ‘사람’과는 구분되는 단어이다. 이 육신이라는 말은 주 예수께서 성육신 되셨을 때 모든 면으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혈육을 입으셨다는 말이다. 이는 어떠한 비밀인지! 그분은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신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몸(body)과 이성적인 영혼(soul)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이 만일 참된 육신을 입지 않으셨다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또한 이 육신이라는 말은 피곤하고 연약하기 쉬운 인간이 타락한 후의 나약한 그 육체를 그대로 입고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분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같이 연약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을 입은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한 순간도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신 적이 없으시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을 때 그분의 신성과 능력을 감추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분은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영광의 모습을 포기하셨고 목수의 아들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한 번도 그분의 신성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분이 이 땅 위에서 사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고 부활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사람’으로서 하신 일이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단순히 인간의 피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분의 피인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다. 하나님의 본체를 가지신,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태어난 하나의 인간이셨다. 따라서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셨다(complete God, perfect Man). 현재 하늘에 계신 주 예수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시다. 그분의 신성뿐 아니라 인성 또한 하늘에 계시다. 우리의 본성을 지니신 우리의 맏형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구자로서 먼저 하늘로 가셔서 첫 열매가 되셨다. 그분이 육신이 되셨을 때 그분은 우리와 모든 면에서 같은 육신을 가지고 계시지만 죄는 없으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죄를 범하기 쉬운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만 오셨다.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셨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으시고 죄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었다. 그러한 분이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신 것이다(고후 5:21).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한다’는 말은 원문에서 ‘거처를 정하신다’, ‘장막 가운데 거하신다’의 뜻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장막으로 취하셔서 33년 동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환영이나 보이지 않는 영으로 잠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33년 동안 그분의 육신 안에 거처를 두시고 팔레스틴 땅에 거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요한은 그분의 육신적인 모습 속에서 때때로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발하고 계심을 보았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적어도 “변화산 상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셨을 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게 하셨을 때 등”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복음은 보는 문제이다. 그러니 지식과 머리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광채로서 정신적인 두뇌 활동이 아니라 영으로 보는 문제이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한 번 보면 그것으로 된다, 그 영광의 얼굴은 우리 마음 속에 은은히 비춰진다. 비춰진 것으로 새 창조는 시작된다(고후4:6). 우리 속에 한 번 비추어지면 다시는 지워지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육의 심비에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고후3:3). 그 본 것은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든든함과 평안과 만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베드로처럼 구원받은 후에 잠시 약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내 회복이 된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았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였다. 그 때 주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셨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여기서 알게 한 것은 바로 본 것, 계시(revelation)이다.
계시란 정신적인 작용이나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영 안에서 그분의 얼굴빛을 보는 것이다. 베드로가 잠시 육신으로 약해져서 그가 본 것을 부인한 적이 있을지라도 그는 그분의 눈빛을 다시 보고 이내 회복되었고 밖에 나가서 통곡했던 것이다. 베드로로 하여금 일생 주를 따르게 한 것은 나사렛 사람 예수 구주를 본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단어는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말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출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 전 부터 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그러한 위격이었다. 시편 2편 7절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한다. 요한이 말하는 아들(예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영원토록 존재하실 분이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고 언제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신격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빛났다. 요한은 어떻게 그분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었을까? 요한 일서에서 요한은 그분에 대하여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한 분을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한다고 말했다(요일1:2). 제자들은 주 예수에게서 태초부터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은 그분의 행함과 말에서 놀라운 은혜로움을 느꼈다는 말이다. 또한 그분의 말과 행함에서 거짓이 조금도 없이 진리가 충만했던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거하시면서 사람들에 대한 온유와 사랑과 호의가 충만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안겨주는 식으로가 아니라 언제나 은혜의 복음으로 가득하여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치유하며 공급하는 식으로 사역하셨다.
16절, 우리가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바울 사도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말했다(골1:19). 그분 안에는 무한한 충만함이 있다는 말이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져 있으며 그분의 자비와 사랑, 죄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은 그분 안에 충만하다. 그분의 성결과 의와 구속 등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도 그리스도 안에 가득하다. 이 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으로부터 모든 공급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가 의미하는 바이다. “받으니”란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그분의 충만한데서이다.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있는데 그 충만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사람이다. 할렐루야!
성도들이나 모든 만민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분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되신 그리스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분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주셨다. 따라서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자들은 “은혜 위에 은혜를 얻는다.” 은혜 위에 은혜(grace upon grace)란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시는 그리스도의 무한 무량(無限無量)한 은혜의 공급을 가리킨다. 그분의 은혜는 다함이 없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지속적이고 신선하게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특별한 그릇이다. 그러니 그분으로부터 받은 자들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시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골로새서 2장 9절은 “그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하며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분 안에 있는 충만을 그분 홀로 가지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참여케 하신 것이다(엡3:19).
유동근 목사는...
유 목사는 대전고와 충남대학교·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美 퍼시픽 신학대학원(Th.M., D.D.), 워싱턴 신학대학원(Th.D.) 등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온누리선교교회 담임목사, 美 퍼시픽 신학대학원 교수, 국제선교신학연구원(IMC) 학장, 예장 국제선교연합총회 총회장, 글로벌부흥협의회 총재 등을 맡고 있다.
현재까지 마태·마가·누가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등 신약 전권을 강해해 책으로 펴냈고 창세기, 모세5경, 여호수아·룻기, 사무엘상하, 전도서·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등도 출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은 예수를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주목하며 체험한 후 그분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격에 대한 호칭이다. 예수께서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셨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구원하기 위해서 성육신되신 주님의 호칭이기 때문이다. ‘말씀’이란 곧 하나님이신 영원한 아들의 위격을 말하는 또 하나의 성호(聖號)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해야 맞는 것이다.
“되어”(became)란 창조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낳은바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성자는 성부로부터 말미암았으되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 않았고 오직 낳은바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육신”이라는 말은 분명 ‘사람’과는 구분되는 단어이다. 이 육신이라는 말은 주 예수께서 성육신 되셨을 때 모든 면으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혈육을 입으셨다는 말이다. 이는 어떠한 비밀인지! 그분은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신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몸(body)과 이성적인 영혼(soul)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이 만일 참된 육신을 입지 않으셨다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또한 이 육신이라는 말은 피곤하고 연약하기 쉬운 인간이 타락한 후의 나약한 그 육체를 그대로 입고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분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같이 연약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을 입은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한 순간도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신 적이 없으시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을 때 그분의 신성과 능력을 감추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분은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영광의 모습을 포기하셨고 목수의 아들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한 번도 그분의 신성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분이 이 땅 위에서 사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고 부활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사람’으로서 하신 일이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단순히 인간의 피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분의 피인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다. 하나님의 본체를 가지신,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태어난 하나의 인간이셨다. 따라서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셨다(complete God, perfect Man). 현재 하늘에 계신 주 예수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시다. 그분의 신성뿐 아니라 인성 또한 하늘에 계시다. 우리의 본성을 지니신 우리의 맏형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구자로서 먼저 하늘로 가셔서 첫 열매가 되셨다. 그분이 육신이 되셨을 때 그분은 우리와 모든 면에서 같은 육신을 가지고 계시지만 죄는 없으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죄를 범하기 쉬운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만 오셨다.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셨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으시고 죄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었다. 그러한 분이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신 것이다(고후 5:21).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한다’는 말은 원문에서 ‘거처를 정하신다’, ‘장막 가운데 거하신다’의 뜻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장막으로 취하셔서 33년 동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환영이나 보이지 않는 영으로 잠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33년 동안 그분의 육신 안에 거처를 두시고 팔레스틴 땅에 거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요한은 그분의 육신적인 모습 속에서 때때로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발하고 계심을 보았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적어도 “변화산 상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셨을 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게 하셨을 때 등”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복음은 보는 문제이다. 그러니 지식과 머리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광채로서 정신적인 두뇌 활동이 아니라 영으로 보는 문제이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한 번 보면 그것으로 된다, 그 영광의 얼굴은 우리 마음 속에 은은히 비춰진다. 비춰진 것으로 새 창조는 시작된다(고후4:6). 우리 속에 한 번 비추어지면 다시는 지워지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육의 심비에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고후3:3). 그 본 것은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든든함과 평안과 만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베드로처럼 구원받은 후에 잠시 약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내 회복이 된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았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였다. 그 때 주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셨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여기서 알게 한 것은 바로 본 것, 계시(revelation)이다.
계시란 정신적인 작용이나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영 안에서 그분의 얼굴빛을 보는 것이다. 베드로가 잠시 육신으로 약해져서 그가 본 것을 부인한 적이 있을지라도 그는 그분의 눈빛을 다시 보고 이내 회복되었고 밖에 나가서 통곡했던 것이다. 베드로로 하여금 일생 주를 따르게 한 것은 나사렛 사람 예수 구주를 본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단어는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말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출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 전 부터 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그러한 위격이었다. 시편 2편 7절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한다. 요한이 말하는 아들(예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영원토록 존재하실 분이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고 언제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신격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빛났다. 요한은 어떻게 그분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었을까? 요한 일서에서 요한은 그분에 대하여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한 분을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한다고 말했다(요일1:2). 제자들은 주 예수에게서 태초부터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은 그분의 행함과 말에서 놀라운 은혜로움을 느꼈다는 말이다. 또한 그분의 말과 행함에서 거짓이 조금도 없이 진리가 충만했던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거하시면서 사람들에 대한 온유와 사랑과 호의가 충만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안겨주는 식으로가 아니라 언제나 은혜의 복음으로 가득하여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치유하며 공급하는 식으로 사역하셨다.
16절, 우리가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바울 사도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말했다(골1:19). 그분 안에는 무한한 충만함이 있다는 말이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져 있으며 그분의 자비와 사랑, 죄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은 그분 안에 충만하다. 그분의 성결과 의와 구속 등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도 그리스도 안에 가득하다. 이 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으로부터 모든 공급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가 의미하는 바이다. “받으니”란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그분의 충만한데서이다.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있는데 그 충만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사람이다. 할렐루야!
성도들이나 모든 만민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분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되신 그리스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분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주셨다. 따라서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자들은 “은혜 위에 은혜를 얻는다.” 은혜 위에 은혜(grace upon grace)란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시는 그리스도의 무한 무량(無限無量)한 은혜의 공급을 가리킨다. 그분의 은혜는 다함이 없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지속적이고 신선하게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특별한 그릇이다. 그러니 그분으로부터 받은 자들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시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골로새서 2장 9절은 “그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하며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분 안에 있는 충만을 그분 홀로 가지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참여케 하신 것이다(엡3:19).
유동근 목사는...
유 목사는 대전고와 충남대학교·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美 퍼시픽 신학대학원(Th.M., D.D.), 워싱턴 신학대학원(Th.D.) 등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온누리선교교회 담임목사, 美 퍼시픽 신학대학원 교수, 국제선교신학연구원(IMC) 학장, 예장 국제선교연합총회 총회장, 글로벌부흥협의회 총재 등을 맡고 있다.
현재까지 마태·마가·누가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등 신약 전권을 강해해 책으로 펴냈고 창세기, 모세5경, 여호수아·룻기, 사무엘상하, 전도서·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등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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