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평생 배울 것이 많다. 그래서 평생 교육이란 말이 적합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다. 배울 것도 많이 생긴다. 미국 교단에서 목회자의 계속 교육(continuing education)을 필수로 하고 있다.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대부분 낡은 것이거나 지나간 지식(out of date)이기에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해야 한다 (up to date, up grade, accommodate). 필자의 부친께서는 한 교회에서 40년 현역 목회하신 후 원로목사로 10년 계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필자가 신학교에서 한 학기 공부한 것을 방학 때 집에 와서 부모님 앞에서 강의를 해야 했었다. 아버님께서는 녹음기로 녹음하시고 노트에 필기를 하시면서 열심히 최근 학문을 익히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평생 원고설교를 하시면서 공부하셨다.

히브리어 격언에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To teach is to learn)"이란 말이 탈무드에 나온다. 히브리어 lamad는 배운다는 말이고, 이 동사의 피엘형(intensive active)인 limmel는 가르친다는 말이다. 즉 철저히 배우는 자가 가르칠 수 있고, 가르침으로 확실히 배우게 된다는 말이다. 목회도 인생도 계속 배우는 자세를 가지면 마음 편하다. 때로 실수를 통해서 배우고, 때로 성공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동료 목회자 중 한 분이 “또 배우게 됩니다. 평생 배우는 자로서 살겠습니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분을 존경하게 된다.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사는 사람만큼 미련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손자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면서 열심히 인터넷도 배우고 영어를 배우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

튀빙겐대학교는 15세기 신학부로 시작된 학원으로 독일의 명문이다. 이 학교의 학훈이 정해진 배경이 이렇게 전해진다. 평소 말이 없고 대중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던 졸업 예정자인 신학도가 있었다고 한다. 채플시간에 졸업 예정자들이 돌아가며 졸업 설교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드디어 이 신학도의 차례가 되었다. 단에 올라간 이 학생은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보던 교수들과 동료학생들에게 질문하기를 “여러분, 제가 무슨 이야기를 전할는지 아시겠습니까?” 물으니 모두들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이 학생은 “여러분도 모르는 내용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하고 단 아래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교수회의에서 이 신학도에게 다음 수요일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등단한 이 신학도는 지난주처럼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번에는 모두들 “안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니 이 학생은 “여러분이 다 아신다면 제가 무엇을 더 전하겠습니까?”하고 내려갔다고 한다. 두 번 모두 설교를 하지 않은 이 신학도에 대해 교수들은 참으로 난처했다. 오랜 논의 끝에 다음 주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단다. 세 번째 등단한 이 신학도는 같은 질문을 던졌다. 미리 작전을 짠 회중은 절반은 안다고 대답하고 절반은 모른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니 이 신학도는 “아는 분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 주시고, 모르는 분은 아는 분들에게 배우십시요”하고 단에서 내려 왔다는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참으로 명언을 하였다고 칭찬을 하면서, 이 말을 튀빙겐 대학의 학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모르면 배우고, 알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학풍으로 오늘날 튀빙겐의 학구열은 뜨겁다.

필자는 강의하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하는 편이다. 정작 강의시간에 준비한 것의 절반도 못할 때가 많지만 다음 시간에 더 많은 준비를 한다. 특히 미국 신학교에서 질문을 받을 때 강의를 하지 않은 내용의 보따리를 적절하게 풀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도 배우는 시간이 더 행복하다. 한 가지 배운 것을 가지고 두 가지로 써 먹을 수 있어 좋고, 타인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점검할 수 있어서 좋다. 목회자로서 가르치는 은사를 받아야 한다. 이사야는 훌륭한 학자였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 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