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반듯한 신앙 생활을 위해서 ‘바쁨’을 경계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바쁨은 결코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기에 더욱 그리해야 한다. ‘공산당, 간첩, 고통’ 이런 류의 단어들은 우리를 긴장하게 하며, 경계 하게 한다. 반면, ‘향기나는 꽃, 아득한 공간, 부드러운 미소, 거침없는 전진’은 우리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동경하게 한다. ‘바쁨’은 후자에 속한다.

‘바쁨’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곧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쁨’은 우리가 ‘본질’을 이탈하도록 하는 사단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하루의 일과 중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없다면, 진정한 자기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삶의 일과에서 기도와 묵상이 빠진다면 우리의 영혼이 좋은 리듬을 타기는 불가능하기에 곧 메말라 비틀어 질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바쁨’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괴도를 이탈하게 하며, 이런 이탈이 주는 결과의 심각성에 대해서조차 무감각하게 만든다. 바쁨은 하나님이 안 계신 세계로 우리를 내몰아가서 그곳이 오히려 더 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지내왔다. 감사란 하나님이 없던 상태에서 헤어 나옴에 대한 우리의 고마움을 표현하는 반응이다. 따라서, 바쁨은 우리에게서 ‘감사’를 상실시킨다.

당신에게 두 아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 아들은 세상에서 크게 성공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력과 직업, 그리고 굉장한 수입을 가졌다. 다른 아들은 보통을 조금 밑도는 직업과 수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대단한 아들은 한 번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1년 몇 번 그것도 스쳐지나가듯 잠시 보는 것이 고작이다. 그는 늘 ‘바쁘다’고 말하고, 부모도 그에게는 ‘너무 바빠서’하고 씁쓸한 이그큐즈(excuse)를 준다. 보통을 밑도는 아들은 부모를 위해서 바쁘지 않다. 그는 부모를 잘 돌보는데, 사람들은 그가 늘 시간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부모를 반나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을 별로 없는 듯하다. 어떤 아들이 더 사랑스러운가?

‘바쁨’은 종종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바쁨’은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에서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무시한다면, 반드시 그도 당신을 무시할 것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중단한다면, 머지 않아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무시할 것이다. 당신이 먼저 바쁨을 핑계로 좋으신 아버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때로 ‘재앙’을 받았다. 물론 ‘재앙’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지만(렘 29:11), 이들이 ‘바쁨’을 핑계로 하나님을 무시할 때 아버지는 재앙을 허락하셨다. ‘재앙’이란 하나님이 자녀들을 무시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재앙의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먼저 무시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무척 바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바쁨을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바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