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필 때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6. 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50년대의 중, 후반의 어렸을 때, 우리 시골에서는 설탕을 구경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설탕물의 맛을 섭취하는 유일한 길은 옥수수 대를 벗겨서 짜서 먹었을 때 나오는 것이 전부였지요. 어쩌다가 산자락을 낀 곳에서 사시는 동네 분으로부터 양봉으로 얻어진 꿀 한통을 얻기라도 하는 날이면, 집에서는 그야말로 ‘꿀단지’ 모시듯이 그 꿀을 아껴서 먹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 초, 서울로 이사를 가서 보니, 설탕을 얻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따라서(때로는 아버지를 기다리느라고) 다방을 출입하다 보니, 그곳에서는 여러 가지 모양의 설탕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각설탕은 보기에도 좋았고, 먹기에는 더 좋았습니다. 그 하얗고도 투명하게 반짝이는 흰 모습의 각설탕을 가져오는 친구는 학교에서 인기 만점이었지요. 우리는 둘러 앉아 그것을 하나씩 입에 물고는, 가만히 녹여서 삼키곤 했지요. 음식에 들어간 설탕은 맛을 냅니다. 제 아무리 쓴 약이라도, 그 속에 설탕이나 꿀을 넣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으니까요. 순식간에 번져간 설탕의 효능은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의학과 건강지식이 과학화되고 일반상식화 된 지금에 있어서, 설탕은 만병의 주범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흰 쌀밥, 흰 밀가루와 더불어 ‘흰 설탕’은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 꼴이 되었으니까요.‘뭐든지 설탕을 넣으면 맛이 최고다!’는 말에 속아 넘어갈 현대인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만큼 설탕이 지니고 있는 성질 중에는 현대인들에게 불필요하기도 하고, 또한 건강에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자연의 맛 그대로가 최고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구요.

신앙의 모습이 바로 그러합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에야 여러 가지 달콤한 말들(?)로 서로를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역할이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신자요,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 성숙한 믿음을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가 견디어내야 할 쓴 맛(?)은 얼마든지 있게 될 것입니다. 그‘쓴 맛’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하늘의 상급’은 또한 얼마나 고상한 것인지요!

기독교는 쓰디쓴 십자가를 내세우는 종교입니다. 고난과 죽음으로 상징되는 십자가의 종교가 우리들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편리한 조건들 속에서 살아간다 해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신’(히 5:7) 분이심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새벽을 깨우면서 우리가 지키고 있는 사순절의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사탕발림의 종교’가 아니라,‘고난의 길을 통과한 후에 얻게 될 찬란한 면류관의 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새벽의 눈물을 통과하면서 말입니다.

효신장로교회 공동목회자 문석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