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론 골짜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다윗 성과 죽은 자들이 매장된 감람 산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무덤을 성 안에 두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성에서 메어가 근처 감람 산, 힌놈의 골짜기 건너편에 많이 매장하였다. 그래서 성전이 파괴되기 전, 성전을 방문하던 유대 순례자들은 무덤가를 지나야만 성전에 올라갈 수 있었다.

1968년에서 1970년에 이르기까지 텔아비브 대학의 데이빗 우씨쉬킨 (David Ussishkin)과 바르 일란 대학의 가브리엘 바르카이 (Gabriel Barkay) 교수는 기드론 골짜기의 동쪽 실반 (Silwan) 마을의 약 50개의 고대 무덤을 조사하였다. 감람 산은 주전 9세기부터 유다 왕국의 귀족과 부유한 자들의 무덤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고대 무덤들은 예루살렘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무덤과는 다르게 정교하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1차 성전 시대의 무덤

다윗 성에서 동쪽으로 맞은 편인 감람 산을 보면, 멀리서도 1차 성전 시대에 속한 고대 무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바위를 파서 만든 고대의 무덤은 입구를 사각형의 작은 창문처럼 만들어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주전 8세기에 속한 세 개의 무덤이 나란히 놓여있다. 각각의 무덤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을 위한 무덤으로 판단된다. 견고한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 구조나 무덤의 위치 곧 다윗 성을 마주하며, 성전 산이 잘 보이는 위치로 볼 때, 이 무덤에 매장된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부유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세 개의 무덤 입구에는 고대 히브리어로 비문이 기록되었지만, 비잔틴 시대에 이곳에 거했던 수도사들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어 읽을 수는 없다.

한동안 1차 성전 시대의 무덤은 실반 (Silwan)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의 창고, 양과 염소의 축사, 닭장으로 이용되었다.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된 무덤으로는,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무덤에 속한다. 우씨쉬킨 (Ussishkin)은 이 같은 무덤 형태와 장례 전통은 후에 페트라와 같은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든 예와 예루살렘 2차 성전 시대의 무덤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주장한다.

바로의 딸의 무덤 (Tomb of Pharaoh’s Daughter)

다윗 성에서 동쪽 감람 산을 바라보면, 1차 성전 시대의 가장 인상적인 무덤 하나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로의 딸의 무덤 (Tomb of Pharaoh’s Daughter)으로 알려져 있는 무덤이다. 이 무덤은 네모난 상자 모양으로, 지붕은 평평하게 다듬어졌으며, 입구는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때 이 무덤의 지붕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후에 피라미드 모양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교하게 다듬어진 이집트 처마 장식 (cornice)은 잘 남아 있다. 이집트의 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이 무덤에 대하여 실반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아랍 사람들은 이 무덤을 솔로몬의 아내였던 바로의 딸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무덤의 시기에 대하여, 이스라엘 고고학자 나흐만 아비가드 (Nahman Avigad)는 무덤 입구에 기록된 고대 히브리어의 문체에 근거하여, 주전 8세기로 이해한다. 주전 8세기는 솔로몬 시대보다 약 200년 후이다. 불행하게도 무덤 입구에 기록된 고대 비문은 비잔틴 시대의 수도사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셉나의 무덤 (the Tomb of . . . yahu who is over the House)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이사야 22:15-16)

1870년 프랑스의 외교관이며 고고학에 관심을 가졌던 찰스 끌레르몽 가누는 바로의 딸 무덤 근처에서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된 고대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찰스는 망치와 정을 사용하여 무덤 위의 비문을 떼어 영국 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당시는 누구도 고대의 무덤 비문을 해독할 수 없었다. 후에 나흐만 아비가드 (Nahman Avigad)가 비문을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 (무덤)은 . . . 야후 (yahu), 그는 집 (왕궁)의 관리인 (over the house)이다. 여기에는 금과 은이 없다. 다만 [그의 뼈]와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그의 아내의 뼈가 있을 뿐이다. 이것을 여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할 것이라.

이가엘 야딘은 이 무덤의 주인을 이사야 22:15절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모든 국고를 맡은 셉나 로 이해한다. 실재로 셉나의 무덤은 감람 산 높은 곳, 바위를 판 곳에 위치하였다. 비록 무덤 비문의 이름 끝은 yahu로 끝나고 이사야의 국고를 맡은 자의 이름은 a로 끝나지만, 이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1차 성전 시대에 속한 셉나 (또는 쉐브나야후)라는 이름의 인장이 여럿 발견되었는데, 두 가지 형태 모두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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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