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를 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진정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거대한 파도에 묻혀 ‘친구를 위해 죽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때 그 시절’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을까? 평양대부흥의 재현을 부르짖지만 이미 ‘야성’을 잃어버려 나약해져버린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300>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 지방의 작은 도시국가인 스파르타 사람들의 최고 덕목은 ‘스파르타를 위해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훈련을 통해 강인한 용사로 성장하게 된다. 그들의 왕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도 30년간 광야에서 목숨을 걸고 추위 속에서 야수들과 싸우는 훈련에서 살아남고서야 왕이 될 수 있었다.
이들 앞에 대국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로드리고 산토로)이 거느린 1백만 대군이 나타난다.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1백만 대군 앞에 스파르타는 대를 이을 자식이 있는 남성들만 전장에 나선다. 다 합해 봐야 고작 3백명이다. 하지만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두려움 없는 진정한 ‘전사’ 3백명이 왕의 채찍이 무서워 싸움터로 나가야 하는 노예 1백만보다 많은 수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고 있지 않는다. 전략을 세우고 성벽을 쌓으며, 모든 길을 막고 적을 협곡으로 유인해 불가능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자 한다. 내부에서조차 반대해 연합군조차 결성하지 못했던 무모한 싸움이지만, 기꺼이 죽기를 각오했기에 오히려 싸움을 즐긴다. 적에게 무릎꿇는 것은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 싫기 때문이다.
일당백의 활약을 펼치는 스파르타 전사들 때문에 연일 전투에서 패하자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와 직접 만나 타협을 시도한다. “나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내 병사라 해도 몇쯤은 죽일 수 있다”며 위협하는 크세르크세스에게, 레오니다스는 “나는 내 병사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다”고 답하며 제의를 거부한다.
사실 페르시아 왕이 원하는 것은 별 것 아니다. 왕이자 ‘신’으로 자처하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 것’ 뿐. 무릎만 한번 꿇으면 재물과 부귀영화를 주고 스파르타 왕이 사랑하는 군사들과 스파르타를 보호해 주겠다는 페르시아 왕의 달콤한 유혹을 레오니다스는 ‘다리에 쥐가 났다는 이유로’ 재치있게 거절한다.
절대 물러서거나 굴복하지 않는 스파르타의 정신은 지켜질 수 있을까? 이들의 작은 ‘희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피가 낭자하고 잔혹한 장면이 자주 등장해 기독교인으로서 편안히 볼 수만은 없는 18세 관람가 영화지만, 태양이 없다면 어둠 속에서라도 싸우겠다는 이들의 고귀한 희생 정신만큼은 묵상해 볼 만하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 지방의 작은 도시국가인 스파르타 사람들의 최고 덕목은 ‘스파르타를 위해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훈련을 통해 강인한 용사로 성장하게 된다. 그들의 왕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도 30년간 광야에서 목숨을 걸고 추위 속에서 야수들과 싸우는 훈련에서 살아남고서야 왕이 될 수 있었다.
이들 앞에 대국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로드리고 산토로)이 거느린 1백만 대군이 나타난다.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1백만 대군 앞에 스파르타는 대를 이을 자식이 있는 남성들만 전장에 나선다. 다 합해 봐야 고작 3백명이다. 하지만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두려움 없는 진정한 ‘전사’ 3백명이 왕의 채찍이 무서워 싸움터로 나가야 하는 노예 1백만보다 많은 수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고 있지 않는다. 전략을 세우고 성벽을 쌓으며, 모든 길을 막고 적을 협곡으로 유인해 불가능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자 한다. 내부에서조차 반대해 연합군조차 결성하지 못했던 무모한 싸움이지만, 기꺼이 죽기를 각오했기에 오히려 싸움을 즐긴다. 적에게 무릎꿇는 것은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 싫기 때문이다.
일당백의 활약을 펼치는 스파르타 전사들 때문에 연일 전투에서 패하자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와 직접 만나 타협을 시도한다. “나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내 병사라 해도 몇쯤은 죽일 수 있다”며 위협하는 크세르크세스에게, 레오니다스는 “나는 내 병사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다”고 답하며 제의를 거부한다.
사실 페르시아 왕이 원하는 것은 별 것 아니다. 왕이자 ‘신’으로 자처하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 것’ 뿐. 무릎만 한번 꿇으면 재물과 부귀영화를 주고 스파르타 왕이 사랑하는 군사들과 스파르타를 보호해 주겠다는 페르시아 왕의 달콤한 유혹을 레오니다스는 ‘다리에 쥐가 났다는 이유로’ 재치있게 거절한다.
절대 물러서거나 굴복하지 않는 스파르타의 정신은 지켜질 수 있을까? 이들의 작은 ‘희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피가 낭자하고 잔혹한 장면이 자주 등장해 기독교인으로서 편안히 볼 수만은 없는 18세 관람가 영화지만, 태양이 없다면 어둠 속에서라도 싸우겠다는 이들의 고귀한 희생 정신만큼은 묵상해 볼 만하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