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유리 현상은 한인교회 전반에 걸쳐 과거부터 깊게 제기되어 온 문제다. 한 극단에서는 신학적 지성이 목회 현장의 영성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목회적 열성이 신학없이 표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현재 신학교에서 학업 중이면서 동시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함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신학의 학문성과 목회의 현장성 간에 일치점을 찾아 본다. 시카고 지역에는 게렛신학교, 노스팍신학교, 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무디신학교, 북침례신학교, 시베리웨스턴신학교,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대 신학대학원, 위튼대학교, 트리니티신학교 등 다양한 신학교가 밀집돼 있으며 최근 한 통계에서 미국 전역에서 신학생 배출율 1위 도시인만큼 이 문제를 논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아홉번째 인터뷰는 게렛신학교에서 목회상담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성민 목사다. 초등학생 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 목사는 숭실대 철학과를 거쳐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M.Div.를 마치고 목사로 안수받았다. 이 목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장로인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기독교 고아원 ‘신망애육원’에서 자랐다. 일주일에 10여차례 이상 예배를 드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해야 할 정도로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신앙 생활에 대한 반감도 있었지만 성직에 대한 소명만은 놓지 않았다. 그는 전도사 시절 서울 구로동에 소재한 교회에서 교육목회를 하면서 이 지역 청소년들의 방황, 부부 사이의 갈등 등 현실의 문제를 보게 됐고 그들을 위한 목회,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목회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그러던 중, 자신이 고아원에 있을 때, 고아원의 문제아들과 한명 한명 밤새도록 상담하며 돌봐주고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한 마리 양을 향한 끈질긴 사랑과 헌신”이 답이란 것을 믿게 됐고 목회상담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목회상담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감리교 계통 학교인 드류신학교에서 목회상담학으로 S.T.M.을 거쳐 현재 게렛신학교에서 Ph.D.에 있다. 시카고에서는 참길장로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목사님이 목회상담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상당히 현실적인 과제에서 시작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가졌던 고민들을 좀 구체적으로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전도사 사역을 했던 교회가 있던 지역은 그렇게 부유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의 청소년들이 원대한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허영만을 좇는 것을 보고 “왜 이런가”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또 목회 현장에서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대하면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고민도 더해졌습니다. 원래는 다른 학문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막상 목회 현장에서 부딪혀 보니 삶의 문제로 인해 맨바닥에서 고통하는 성도들에겐 어떤 신학의 이론이라도 공허하게 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신학적이면 오히려 그것이 성도들의 삶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로 들리게 되어 반추의 여지조차 없어지는 경우죠.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성도들에게 말씀에서 우러나는 영적 통찰을 제시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도들과 함께 삶을 살아 가면서 그들 한명 한명을 변화시켜 거듭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상담학을 공부하시면서 “답이다” 할 만한 것을 찾으셨습니까?
모든 학문이 그렇겠지만 ‘만능키’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이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선 제 자신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아내와 초등학생 때 만나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함께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녔고 결혼했습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결혼해서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목회상담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이 차이점이 공부를 하면서부터는 문제의 구조적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성도들을 대할 때, 혹은 교회 안의 각종 문제를 대할 때 그것이 ‘문제다’라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는 방법까지 고민해 보는 열쇠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하에서 “어떻게 하면 건강한 성도와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나름의 실마리를 찾아가게 됐지요.
-목회상담학이 가진 전문적인 접근 방법론이나 학문적 내용에 관해서 현장의 목회자들의 인식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개선됐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보입니다.
제가 정의하는 목회상담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목회자가 성도와의 만남 속에서 성도의 신앙의 문제는 물론, 삶의 문제를 놓고 질적인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성도의 삶이 변화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분석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이 있다면 이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겠지요. 미국교회의 경우는 상담사역만을 별도로 하는 목회자가 교회 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점진적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걸맞는 삶을 살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굳이 그것을 목회상담학이란 학문으로 배울 필요까지 있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법합니다만.
물론 목회상담학에서 사용하는 심리학이나 상담학적 방법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분이 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목회는 성령이 하시는 것이며 목회자는 말씀을 붙들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굳이 목회상담이 학문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말하라면 한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두 종류의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한 부모는 아동 발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고 또 다른 부모는 이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자라면서 갑자기 부모에게 반항할 때 아동 발달 단계를 모르는 부모는 “저 아이가 왜 갑자기 저러지? 날 무시하는 거야? 아버지를 안 무서워 하는 나쁜 녀석이군. 혼 좀 나야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동의 발달을 아는 부모는 아이가 반항할 때, 그가 반항의 시기에 왔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언제가 되면 이 반항이 끝나는지도 예측할 수도 있기에 좀 견딜만 하겠지요?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바라볼 때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적 수준은 여기까지 와야 한다고 선을 그어 놓습니다. 그리고 신앙적 수준을 그 선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설교하고 목회합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동체는 설령 비신앙인은 없을지라도 준신앙인, 성숙한 신앙인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을 섬겨가는 곳입니다. 집사도 다 같은 집사가 아니고 장로라고 다 같은 수준을 가진 장로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성도 개개인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성도들의 수준’이란 것을 그어놓고 설교하고 목회하면 성도들이 상처받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목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그들을 교육하며 그들이 진정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신앙의 기반을 마련해 주고 조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상담학을 통해 성도 개개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맞는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면 목회 현장에 끼치는 유익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가 목회상담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야 제대로 목회를 할 수 있단 말씀인가요?
꼭 그렇진 않습니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는 한 개인의 치유가 “이해와 설명”이라는 과정에서 이뤄진다고 봅니다. Heinz Kohut는 “How does analysis cure”라는 책에서 내담자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상태에서 그것을 그에게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인 치유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먼저 상담자가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둘 사이에 공감이 일어납니다. 그후에 전문적 식견을 갖고 그 문제의 원인을 “설명”해 주면 내담자는 스스로 문제의 해법을 찾아가게 됩니다.
교회가 그런 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목회자가 성도를 보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힐난하지 말고 그들의 상황을 들어 주고 이해해 주고 그것을 설명해 주면 그 과정만으로도 치유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들이 성도 개개인의 삶의 문제에 나서게 되면 성도들이 기분 나빠하고 불편해 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 개개인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삶의 문제를 이야기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럼 성도들은 “목사님이 우리의 이런 사소한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고 기도해 주시면서 도와 주시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공감대가 바로 치유와 변화의 시작점입니다. 이런 과정을 상담이라고 한다면 굳이 상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더라도 성도 한명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상담이고 목회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 상담입니다.
참고로 Object Relations Theory로 유명한 도날드 위니컷의 Holding Environment라는 개념을 소개 드리고 싶습니다. 아기가 계속 우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아주 아픕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혹시 어디가 아픈가 열도 재 보고 온갖 노력을 다 해 보지만 아기는 계속 울기만 합니다. 엄마도 힘들고 아기도 힘든 그런 상황입니다. 밤새 우는 아기를 달래고 있던 어머니도 결국 울음을 터뜨려 버리죠. 엄마와 아기가 함께 울면서 이 고통의 순간을 지나는 국면이 되면 아기는 자기 외부의 어떤 대상이 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보면서 심리적 안정을 느끼고 잠이 들게 됩니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이런 Holding Environment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모든 성도는 무의식 중에 목회자를 아버지처럼 대하고 목회자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자신을 사랑으로 감싸거나 훈계할 때, 무의식 가운데 숨어 있던 자신의 부모의 모습을 기억해 냅니다. 목회자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가진 아버지 상이냐 아니면 끝까지 품어내는 자상한 아버지 상이냐에 따라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 성도들에게 다가갈 때 목회자가 좀더 염두에 두면 좋을만한 현실적인 제안이 있을까요?
우리가 상담하게 되는 목회적 환경을 좀더 세부적, 미시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심방을 하게 됐다고 합시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치료의 광선을 발하셔서 암이 치유되고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고 믿음을 선포합니다. 이런 것도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환자의 마음을 좀더 깊이 살펴 보면서 그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사람의 남겨질 가족들인지, 이루지 못한 꿈인지를 제대로 확인하고 그 부분을 터치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장 시급한 것은 환자의 생명이고 그것이 낫는 것이지만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처한 눈앞의 시급한 문제를 대하며 좀더 목회적 마인드를 갖고 상담에 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부부 싸움으로 문제를 겪는 부부가 있다고 할 때, “둘이 싸우면 안된다”고 말하기 보다는 싸움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이 문제라고 하면, 아내가 문제삼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남편도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지, 친구가 좋아서 술을 마시는지, 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술을 마시는지 이면을 봐야 합니다. 왜 가정보다 술이 좋은지 이유를 알게 되면 그 근본적 원인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아마 남편도 가정에서 안식을 얻기보다 술에서 안식을 얻기 때문이겠죠? 아내의 불만도 이런 과정에서 유추해 보면 둘은 결국 술이란 문제로 인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가정의 상에 있어서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대화를 통해서 내담자들이 문제를 털어놓고 해결해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상담은 성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오랜 시간과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적 목회 정서 속에서 목회자는 카리스마적 목회를 요구받기도 하며 그렇지 못할 때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그릇된 시각을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이 갖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문제를 갖고 오는 성도들에 대해 기도해 본 후, 단번에 척 알아내는 것도 은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좋은 상담자의 자질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죄와 문제를 이야기 하며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가 무엇이고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시인하지 않는 한, 또 성령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상담자가 “이것이 당신의 문제요”라고 선포해 준다고 해도 그것이 내담자의 변화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상담자가 끈질긴 사랑을 갖고 그들의 문제에 집중하며 대화를 통해 문제의 껍질을 벗겨 가는 과정을 거치면 깊은 내면의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변화가 시작됩니다.
자아심리학에서는 Grandiose Self와 Hungry Self가 있습니다. Grandiose Self는 나르시즘의 일종으로 자기과장의 욕구가 상당히 높은 상태의 자아관입니다. “나는 내 목회 현장에서 위대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때 자아존재에 만족을 느낍니다. 이런 현상은,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반면, Hungry Self는 누군가 자신을 카리스마적으로 끌어 주어야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자아입니다. 이 두 자아의 조합을 대부분의 종교가 갖고 있습니다. 몇몇 종교 지도자는 Grandiose Self를 갖고 카리스마적으로 조직을 이끌려고 하고 추종자들은 Hungry Self를 갖고 지도자를 따릅니다. 기독교는 분명 다른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독특성을 갖고 있지만 타종교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현상도 갖고 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의 Grandiose Self와 성도의 Hungry Self가 어떤 의미에서 절묘한 부정적 조합을 이룰 때 아마 목회자는 좀더 강력한 카리스마의 유혹에 빠지고 성도도 목회자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목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목회가 주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목회자들이 겪게 되는 마음의 상처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다만 불만을 좀더 인내할 뿐입니다. 참다 참다 이 불만이 설교를 통해 나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개인적 하소연이나 분풀이가 되어 버립니다.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받는 굴욕감과 상처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설교에서 쏘아 대면 반드시 큰 문제가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성도들은 무의식 중에 목회자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며 요구합니다. 목회자의 얼굴 표정에 나타나는 작은 변화와 감정까지도 성도들은 읽어 냅니다. 마치 어린이가 아버지의 표정을 읽듯이 세밀하고 정확합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가식적으로 그것을 감추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럴 때 목회자와 성도가 함께 성장해 가기 위해서 서로가 가진 아픔과 약함이 공유될 수 있는 그런 목회 환경을 조성해 가야 합니다. 목회자의 건강은 곧 목회의 건강과 직결됩니다. 목회자는 친구를 만날 시간도 없습니다. 직장도 교회이고 삶의 터전도 교회이고 주일에 가는 곳도 교회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목회자의 심리적 건강은 목회자의 목회와 직결돼 있죠.
-목회자들이 심리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미국에서는 목회자들이 상담가를 찾아 갑니다. 한국에서는 상담을 받으면 무슨 정신적 병이 있어서 가는 것으로 알고 금기시 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상담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냄을 통해서 자신이 점점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우울증이란 병은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낼수록 인간은 건강해집니다. 목회자들은 목회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로 자책하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위축되다 보면 자신을 더욱 숨기게 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건강하게 선포될 수 있겠습니까? 치유의 과정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해와 설명에서 시작됩니다. 상담을 받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목회자들이 상담가를 찾아가기는 솔직히 쉽지 않을텐데요.
사실 우리에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은 방법입니다. 하나님과 상담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전 너무 화가 나서 울 뻔 했습니다. 어떻게 저 장로님이 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차라리 저분이 교회를 나갔으면 좋겠어요.” 이런 상담은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고 감춤없이 모두 하나님 앞에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말을 듣고 계시고 나를 이해하고 계시며 또 나를 불쌍히 여기고 계신다는 공감을 얻습니다. 이것은 상담의 과정과 동일하지요?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야기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나님과 상담하면 자신이 치유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끝으로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상담하는 데에 직접 사용해 볼만한 좋은 이론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이론이란 것은 그 상황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프로이트, 융의 많은 이론을 들이댄다면 어떤 상황에라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에 상황을 끼워 맞추는 것일 뿐이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론이 사람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모든 상황마다 모두 다른 이론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 없이 이론만 들이대는 것은 상대방을 환자 취급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이 훌륭한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진 끈질긴 인내과 한 마리 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네. 목사님 감사합니다.
아홉번째 인터뷰는 게렛신학교에서 목회상담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성민 목사다. 초등학생 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 목사는 숭실대 철학과를 거쳐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M.Div.를 마치고 목사로 안수받았다. 이 목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장로인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기독교 고아원 ‘신망애육원’에서 자랐다. 일주일에 10여차례 이상 예배를 드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해야 할 정도로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신앙 생활에 대한 반감도 있었지만 성직에 대한 소명만은 놓지 않았다. 그는 전도사 시절 서울 구로동에 소재한 교회에서 교육목회를 하면서 이 지역 청소년들의 방황, 부부 사이의 갈등 등 현실의 문제를 보게 됐고 그들을 위한 목회,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목회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그러던 중, 자신이 고아원에 있을 때, 고아원의 문제아들과 한명 한명 밤새도록 상담하며 돌봐주고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한 마리 양을 향한 끈질긴 사랑과 헌신”이 답이란 것을 믿게 됐고 목회상담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목회상담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감리교 계통 학교인 드류신학교에서 목회상담학으로 S.T.M.을 거쳐 현재 게렛신학교에서 Ph.D.에 있다. 시카고에서는 참길장로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목사님이 목회상담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상당히 현실적인 과제에서 시작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가졌던 고민들을 좀 구체적으로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전도사 사역을 했던 교회가 있던 지역은 그렇게 부유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의 청소년들이 원대한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허영만을 좇는 것을 보고 “왜 이런가”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또 목회 현장에서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대하면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고민도 더해졌습니다. 원래는 다른 학문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막상 목회 현장에서 부딪혀 보니 삶의 문제로 인해 맨바닥에서 고통하는 성도들에겐 어떤 신학의 이론이라도 공허하게 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신학적이면 오히려 그것이 성도들의 삶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로 들리게 되어 반추의 여지조차 없어지는 경우죠.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성도들에게 말씀에서 우러나는 영적 통찰을 제시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도들과 함께 삶을 살아 가면서 그들 한명 한명을 변화시켜 거듭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상담학을 공부하시면서 “답이다” 할 만한 것을 찾으셨습니까?
모든 학문이 그렇겠지만 ‘만능키’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이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선 제 자신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아내와 초등학생 때 만나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함께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녔고 결혼했습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결혼해서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목회상담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이 차이점이 공부를 하면서부터는 문제의 구조적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성도들을 대할 때, 혹은 교회 안의 각종 문제를 대할 때 그것이 ‘문제다’라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는 방법까지 고민해 보는 열쇠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하에서 “어떻게 하면 건강한 성도와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나름의 실마리를 찾아가게 됐지요.
-목회상담학이 가진 전문적인 접근 방법론이나 학문적 내용에 관해서 현장의 목회자들의 인식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개선됐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보입니다.
제가 정의하는 목회상담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목회자가 성도와의 만남 속에서 성도의 신앙의 문제는 물론, 삶의 문제를 놓고 질적인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성도의 삶이 변화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분석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이 있다면 이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겠지요. 미국교회의 경우는 상담사역만을 별도로 하는 목회자가 교회 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점진적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걸맞는 삶을 살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굳이 그것을 목회상담학이란 학문으로 배울 필요까지 있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법합니다만.
물론 목회상담학에서 사용하는 심리학이나 상담학적 방법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분이 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목회는 성령이 하시는 것이며 목회자는 말씀을 붙들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굳이 목회상담이 학문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말하라면 한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두 종류의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한 부모는 아동 발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고 또 다른 부모는 이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자라면서 갑자기 부모에게 반항할 때 아동 발달 단계를 모르는 부모는 “저 아이가 왜 갑자기 저러지? 날 무시하는 거야? 아버지를 안 무서워 하는 나쁜 녀석이군. 혼 좀 나야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동의 발달을 아는 부모는 아이가 반항할 때, 그가 반항의 시기에 왔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언제가 되면 이 반항이 끝나는지도 예측할 수도 있기에 좀 견딜만 하겠지요?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바라볼 때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적 수준은 여기까지 와야 한다고 선을 그어 놓습니다. 그리고 신앙적 수준을 그 선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설교하고 목회합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동체는 설령 비신앙인은 없을지라도 준신앙인, 성숙한 신앙인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을 섬겨가는 곳입니다. 집사도 다 같은 집사가 아니고 장로라고 다 같은 수준을 가진 장로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성도 개개인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성도들의 수준’이란 것을 그어놓고 설교하고 목회하면 성도들이 상처받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목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그들을 교육하며 그들이 진정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신앙의 기반을 마련해 주고 조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상담학을 통해 성도 개개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맞는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면 목회 현장에 끼치는 유익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가 목회상담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야 제대로 목회를 할 수 있단 말씀인가요?
꼭 그렇진 않습니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는 한 개인의 치유가 “이해와 설명”이라는 과정에서 이뤄진다고 봅니다. Heinz Kohut는 “How does analysis cure”라는 책에서 내담자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상태에서 그것을 그에게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인 치유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먼저 상담자가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둘 사이에 공감이 일어납니다. 그후에 전문적 식견을 갖고 그 문제의 원인을 “설명”해 주면 내담자는 스스로 문제의 해법을 찾아가게 됩니다.
교회가 그런 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목회자가 성도를 보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힐난하지 말고 그들의 상황을 들어 주고 이해해 주고 그것을 설명해 주면 그 과정만으로도 치유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들이 성도 개개인의 삶의 문제에 나서게 되면 성도들이 기분 나빠하고 불편해 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 개개인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삶의 문제를 이야기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럼 성도들은 “목사님이 우리의 이런 사소한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고 기도해 주시면서 도와 주시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공감대가 바로 치유와 변화의 시작점입니다. 이런 과정을 상담이라고 한다면 굳이 상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더라도 성도 한명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상담이고 목회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 상담입니다.
참고로 Object Relations Theory로 유명한 도날드 위니컷의 Holding Environment라는 개념을 소개 드리고 싶습니다. 아기가 계속 우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아주 아픕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혹시 어디가 아픈가 열도 재 보고 온갖 노력을 다 해 보지만 아기는 계속 울기만 합니다. 엄마도 힘들고 아기도 힘든 그런 상황입니다. 밤새 우는 아기를 달래고 있던 어머니도 결국 울음을 터뜨려 버리죠. 엄마와 아기가 함께 울면서 이 고통의 순간을 지나는 국면이 되면 아기는 자기 외부의 어떤 대상이 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보면서 심리적 안정을 느끼고 잠이 들게 됩니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이런 Holding Environment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모든 성도는 무의식 중에 목회자를 아버지처럼 대하고 목회자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자신을 사랑으로 감싸거나 훈계할 때, 무의식 가운데 숨어 있던 자신의 부모의 모습을 기억해 냅니다. 목회자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가진 아버지 상이냐 아니면 끝까지 품어내는 자상한 아버지 상이냐에 따라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 성도들에게 다가갈 때 목회자가 좀더 염두에 두면 좋을만한 현실적인 제안이 있을까요?
우리가 상담하게 되는 목회적 환경을 좀더 세부적, 미시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심방을 하게 됐다고 합시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치료의 광선을 발하셔서 암이 치유되고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고 믿음을 선포합니다. 이런 것도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환자의 마음을 좀더 깊이 살펴 보면서 그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사람의 남겨질 가족들인지, 이루지 못한 꿈인지를 제대로 확인하고 그 부분을 터치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장 시급한 것은 환자의 생명이고 그것이 낫는 것이지만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처한 눈앞의 시급한 문제를 대하며 좀더 목회적 마인드를 갖고 상담에 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부부 싸움으로 문제를 겪는 부부가 있다고 할 때, “둘이 싸우면 안된다”고 말하기 보다는 싸움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이 문제라고 하면, 아내가 문제삼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남편도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지, 친구가 좋아서 술을 마시는지, 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술을 마시는지 이면을 봐야 합니다. 왜 가정보다 술이 좋은지 이유를 알게 되면 그 근본적 원인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아마 남편도 가정에서 안식을 얻기보다 술에서 안식을 얻기 때문이겠죠? 아내의 불만도 이런 과정에서 유추해 보면 둘은 결국 술이란 문제로 인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가정의 상에 있어서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대화를 통해서 내담자들이 문제를 털어놓고 해결해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상담은 성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오랜 시간과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적 목회 정서 속에서 목회자는 카리스마적 목회를 요구받기도 하며 그렇지 못할 때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그릇된 시각을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이 갖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문제를 갖고 오는 성도들에 대해 기도해 본 후, 단번에 척 알아내는 것도 은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좋은 상담자의 자질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죄와 문제를 이야기 하며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가 무엇이고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시인하지 않는 한, 또 성령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상담자가 “이것이 당신의 문제요”라고 선포해 준다고 해도 그것이 내담자의 변화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상담자가 끈질긴 사랑을 갖고 그들의 문제에 집중하며 대화를 통해 문제의 껍질을 벗겨 가는 과정을 거치면 깊은 내면의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변화가 시작됩니다.
자아심리학에서는 Grandiose Self와 Hungry Self가 있습니다. Grandiose Self는 나르시즘의 일종으로 자기과장의 욕구가 상당히 높은 상태의 자아관입니다. “나는 내 목회 현장에서 위대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때 자아존재에 만족을 느낍니다. 이런 현상은,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반면, Hungry Self는 누군가 자신을 카리스마적으로 끌어 주어야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자아입니다. 이 두 자아의 조합을 대부분의 종교가 갖고 있습니다. 몇몇 종교 지도자는 Grandiose Self를 갖고 카리스마적으로 조직을 이끌려고 하고 추종자들은 Hungry Self를 갖고 지도자를 따릅니다. 기독교는 분명 다른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독특성을 갖고 있지만 타종교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현상도 갖고 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의 Grandiose Self와 성도의 Hungry Self가 어떤 의미에서 절묘한 부정적 조합을 이룰 때 아마 목회자는 좀더 강력한 카리스마의 유혹에 빠지고 성도도 목회자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목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목회가 주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목회자들이 겪게 되는 마음의 상처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다만 불만을 좀더 인내할 뿐입니다. 참다 참다 이 불만이 설교를 통해 나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개인적 하소연이나 분풀이가 되어 버립니다.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받는 굴욕감과 상처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설교에서 쏘아 대면 반드시 큰 문제가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성도들은 무의식 중에 목회자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며 요구합니다. 목회자의 얼굴 표정에 나타나는 작은 변화와 감정까지도 성도들은 읽어 냅니다. 마치 어린이가 아버지의 표정을 읽듯이 세밀하고 정확합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가식적으로 그것을 감추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럴 때 목회자와 성도가 함께 성장해 가기 위해서 서로가 가진 아픔과 약함이 공유될 수 있는 그런 목회 환경을 조성해 가야 합니다. 목회자의 건강은 곧 목회의 건강과 직결됩니다. 목회자는 친구를 만날 시간도 없습니다. 직장도 교회이고 삶의 터전도 교회이고 주일에 가는 곳도 교회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목회자의 심리적 건강은 목회자의 목회와 직결돼 있죠.
-목회자들이 심리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미국에서는 목회자들이 상담가를 찾아 갑니다. 한국에서는 상담을 받으면 무슨 정신적 병이 있어서 가는 것으로 알고 금기시 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상담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냄을 통해서 자신이 점점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우울증이란 병은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낼수록 인간은 건강해집니다. 목회자들은 목회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로 자책하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위축되다 보면 자신을 더욱 숨기게 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건강하게 선포될 수 있겠습니까? 치유의 과정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해와 설명에서 시작됩니다. 상담을 받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목회자들이 상담가를 찾아가기는 솔직히 쉽지 않을텐데요.
사실 우리에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은 방법입니다. 하나님과 상담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전 너무 화가 나서 울 뻔 했습니다. 어떻게 저 장로님이 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차라리 저분이 교회를 나갔으면 좋겠어요.” 이런 상담은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고 감춤없이 모두 하나님 앞에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말을 듣고 계시고 나를 이해하고 계시며 또 나를 불쌍히 여기고 계신다는 공감을 얻습니다. 이것은 상담의 과정과 동일하지요?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야기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나님과 상담하면 자신이 치유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끝으로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상담하는 데에 직접 사용해 볼만한 좋은 이론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이론이란 것은 그 상황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프로이트, 융의 많은 이론을 들이댄다면 어떤 상황에라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에 상황을 끼워 맞추는 것일 뿐이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론이 사람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모든 상황마다 모두 다른 이론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 없이 이론만 들이대는 것은 상대방을 환자 취급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이 훌륭한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진 끈질긴 인내과 한 마리 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네.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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