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퍼스타 감사용’으로 잘 알려진 옛 삼미그룹 2대 회장 김현철 씨가 기업가에서 선교사로 변신한 스토리를 중앙일보가 인터뷰했다. 서울 삼일빌딩의 주인이었고, 야구단 구단주였으며 특수강으로 세계 제패의 꿈을 꿨던 그는 지금 대지진으로 신음하는 아이티에서 선교센터 건립이라는 하나님의 꿈을 꾸고 있었다.
중앙일보는 선교사로 변신한 그를 지난 14일(현지시간) 지진 참상의 현장인 아이티 프로토프랭스에서 우연히 만났고, 이후 19~20일 산토도밍고에서 다시 만나 그의 지나온 삶의 여정을 들었다. 그는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김 씨는 지난 1980년 만 29세라는 이른 나이에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한참 그룹이 잘 나가던 77년 선대 회장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골수암 진단을 받고 투병 끝에 세상을 뜨자 경영 일선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당시 쌍용 김석원 회장과 한화 김승연 회장도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가 돼 세간에서는 이들을 두고 ‘재계 3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삼미그룹은 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창원에 특수강 공단을 만들어 무기 국산화를 시도했을 때, 그 선두에 섰던 주자였다. 국내 철강회사들이 첨단 특수강에 손사래를 쳤을 때 박 전 대통령이 삼미에게 중책을 맡겼고, 당시 일본 마루베니라는 특수강 회사 공장에서 8개월 연수 경험이 있었던 김 씨는 새 사업체 이사로 발령 받았다.
삼미는 특수강으로 세계에서 그 이름을 날렸다. 89년 캐나다 최고 특수강 회사를 인수하면서 100년 된 미국 자회사도 손에 넣었던 삼미는 명실상부하게 특수강에서 세계적 회사가 됐다. 그러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북미공장이 적자를 냈고 이로 인해 자금이 말리기 시작했는데, 95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특수강 세계 1위라는 꿈도 접어야 했다.
김 씨는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른 나이에 회장이 되고 삼미가 특수강으로 세계 1위를 넘볼 때만 해도 신바람이 났다”며 “그러나 95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져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이렇게까지 기업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기업을) 떠나기로 했다”고 자신이 회장직에서 물러났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2년 후 그룹은 부도가 났다. 이후 모든 재산을 은행에 압류 당했던 김 씨는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다 친구의 도움으로 재기하기도 했다. 가족들에게도 시련은 닥쳤다. 맏딸은 거식증 치료를 받고 있고 사위는 백혈병 진단을 받아 지금도 서울대병원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장남은 몇 년 전 뇌에 바이러스가 들어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던 적이 있었다. 어렵사리 고쳤지만 지난해 여름 재발했다.
김 씨 자신도 지난 2002년 우연히 대장검사를 했다가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한달 반 동안 항암제 투약기구를 몸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만나 선교사의 삶을 살게된 계기였다.
그는 “수술하러 가는데 ‘암센터’라는 간판이 보이니까 눈물이 핑 돌았다”며 “수술은 잘 됐다. 그런데 일주일 뒤 수술부위가 터져버렸다. 몽롱한 와중에서도 ‘이젠 끝이구나’ 싶었다. 그때 신에게 매달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인생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했다고.
뇌에 바이러스가 들어간 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는 “아들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과거 잘못을 회개하고 진정한 신앙인이 됐다”며 “남들은 자식 이야기를 창피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생각이 다르다. 많은 분이 알고 기도해주면 그만큼 힘이 되는 것 아니겠나.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에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김 씨는 병에서 회복된 뒤 하와이에 있는 선교사 교육센터에 들어갔다. 석 달 교육을 받고 다시 두 달여 태국으로 전도여행을 다녀왔던 그는 그 때까지도 선교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 집이 있었던 도미니카로 돌아가려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의 한 교회에서 이왕 갈 거면 선교사 파송을 받으라고 권해 선교사가 됐다.
그는 삼미그룹 회장 때와 지금 어느 쪽이 더 행복한가를 묻는 질문에 “15년 회장 하면서 행복했던 건 우리가 세계 1위를 할 수 있다는 꿈을 꿨던 잠시뿐이었던 것 같다”며 “나머진 스트레스와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선교사가 되고 나니 반대다. 모든 걸 내려놓으니 늘 행복하다. 아버님이 이룬 삼미그룹을 지키지 못한 게 걸리지만 이젠 그마저 내려놨다.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욕심만 내려놓으면 회사 역시 사라진게 아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에 대해선 “아이티에 선교센터와 함께 병원·기술학교를 짓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원래 남부 플로리다 감리교회에서 시작했던 건데 제가 소속한 월드그레이스미션과 남가주 늘푸른 선교교회가 합세해 곧 착공할 것”이라며 “이번에 포르토프랭스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오고 있다. 당장 먹을 물과 식량도 급하지만 아이티는 길게 봐야 한다. 한번으로 끝나는 구호 말고 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는 게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는 선교사로 변신한 그를 지난 14일(현지시간) 지진 참상의 현장인 아이티 프로토프랭스에서 우연히 만났고, 이후 19~20일 산토도밍고에서 다시 만나 그의 지나온 삶의 여정을 들었다. 그는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김 씨는 지난 1980년 만 29세라는 이른 나이에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한참 그룹이 잘 나가던 77년 선대 회장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골수암 진단을 받고 투병 끝에 세상을 뜨자 경영 일선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당시 쌍용 김석원 회장과 한화 김승연 회장도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가 돼 세간에서는 이들을 두고 ‘재계 3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삼미그룹은 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창원에 특수강 공단을 만들어 무기 국산화를 시도했을 때, 그 선두에 섰던 주자였다. 국내 철강회사들이 첨단 특수강에 손사래를 쳤을 때 박 전 대통령이 삼미에게 중책을 맡겼고, 당시 일본 마루베니라는 특수강 회사 공장에서 8개월 연수 경험이 있었던 김 씨는 새 사업체 이사로 발령 받았다.
삼미는 특수강으로 세계에서 그 이름을 날렸다. 89년 캐나다 최고 특수강 회사를 인수하면서 100년 된 미국 자회사도 손에 넣었던 삼미는 명실상부하게 특수강에서 세계적 회사가 됐다. 그러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북미공장이 적자를 냈고 이로 인해 자금이 말리기 시작했는데, 95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특수강 세계 1위라는 꿈도 접어야 했다.
김 씨는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른 나이에 회장이 되고 삼미가 특수강으로 세계 1위를 넘볼 때만 해도 신바람이 났다”며 “그러나 95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져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이렇게까지 기업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기업을) 떠나기로 했다”고 자신이 회장직에서 물러났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2년 후 그룹은 부도가 났다. 이후 모든 재산을 은행에 압류 당했던 김 씨는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다 친구의 도움으로 재기하기도 했다. 가족들에게도 시련은 닥쳤다. 맏딸은 거식증 치료를 받고 있고 사위는 백혈병 진단을 받아 지금도 서울대병원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장남은 몇 년 전 뇌에 바이러스가 들어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던 적이 있었다. 어렵사리 고쳤지만 지난해 여름 재발했다.
김 씨 자신도 지난 2002년 우연히 대장검사를 했다가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한달 반 동안 항암제 투약기구를 몸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만나 선교사의 삶을 살게된 계기였다.
그는 “수술하러 가는데 ‘암센터’라는 간판이 보이니까 눈물이 핑 돌았다”며 “수술은 잘 됐다. 그런데 일주일 뒤 수술부위가 터져버렸다. 몽롱한 와중에서도 ‘이젠 끝이구나’ 싶었다. 그때 신에게 매달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인생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했다고.
뇌에 바이러스가 들어간 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는 “아들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과거 잘못을 회개하고 진정한 신앙인이 됐다”며 “남들은 자식 이야기를 창피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생각이 다르다. 많은 분이 알고 기도해주면 그만큼 힘이 되는 것 아니겠나.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에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김 씨는 병에서 회복된 뒤 하와이에 있는 선교사 교육센터에 들어갔다. 석 달 교육을 받고 다시 두 달여 태국으로 전도여행을 다녀왔던 그는 그 때까지도 선교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 집이 있었던 도미니카로 돌아가려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의 한 교회에서 이왕 갈 거면 선교사 파송을 받으라고 권해 선교사가 됐다.
그는 삼미그룹 회장 때와 지금 어느 쪽이 더 행복한가를 묻는 질문에 “15년 회장 하면서 행복했던 건 우리가 세계 1위를 할 수 있다는 꿈을 꿨던 잠시뿐이었던 것 같다”며 “나머진 스트레스와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선교사가 되고 나니 반대다. 모든 걸 내려놓으니 늘 행복하다. 아버님이 이룬 삼미그룹을 지키지 못한 게 걸리지만 이젠 그마저 내려놨다.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욕심만 내려놓으면 회사 역시 사라진게 아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에 대해선 “아이티에 선교센터와 함께 병원·기술학교를 짓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원래 남부 플로리다 감리교회에서 시작했던 건데 제가 소속한 월드그레이스미션과 남가주 늘푸른 선교교회가 합세해 곧 착공할 것”이라며 “이번에 포르토프랭스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오고 있다. 당장 먹을 물과 식량도 급하지만 아이티는 길게 봐야 한다. 한번으로 끝나는 구호 말고 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는 게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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