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저는 아직도 맬 깁슨이 그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엄청난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유’을 달라고 외치던 모습과, <쇼생크 탈출>에서 억울하게 죄수가 된 팀 버튼이 마침내 탈옥에 성공한 후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자유’를 만끽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자유는 그렇게 좋은 것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유를 찾은 인간은 또 어떤 자유를 추구해야 할까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전통과 규범, 객관화된 진리를 거부합니다. 대신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판단이 진리가 됩니다. 종교, 권위, 전통이 무너져서 더 이상 인간의 취향이나 개성을 방해할 규범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극단적인 죄의 형태로 간주되던 마약, 도박, 섹스(동성연애)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합니다.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자기 소견대로 사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사망(패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험하거나 시험을 당하실 수도 없습니다. 혹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자유가 절대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완전한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완전한 자유로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파괴하는 어떤 종류의 악도 행하시지 않는 것입니다(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존 스토트 인용). 기독교의 자유는 이렇게 역설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고기를 물속에서 살고 번성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물고기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물속으로 제한됩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서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할 권리를 달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죽음을 말합니다. 새는 공중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기차는 기차 레일위에서만 자유로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제한적으로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하신 선악과가 바로 그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경계마저도 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간은 무제한적인 자유를 외치며, 자유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정욕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요일 2:16).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 분은 거부할 수도 있는 십자가 형을 그분의 의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의 길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이런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제한된 자유가 진정한 자유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며 사십시오. 섬기며 사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