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같이 "밤새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는 말이 절실히 느껴질 때가 없었던 것 같다. 혹, 이번 경제 위기가 경제 대 공항 때처럼 심화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함께 밤새 희비가 엇갈려 다음 날 아침이 지나 여러 소식이 들려오면 저절로 우산장사, 짚신장사 부모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감원이 된 사람, 바로 엊그제까지도 여러 사람의 부러움을 사며 미국 최대의 기업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은 자녀를 둔 부모님들, 또 장사가 너무 안 되어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룬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계신다. 그러나 그중에도 회사 위기를 잘 분석하고 설명하여 그저 감원으로 해결하려는 사장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회사를 살리는 방법인지를 논리적으로 잘 풀어 설명함으로 오히려 위기를 살린 지혜로운 우리의 자녀도 있다. 잠을 못자고 뒤척거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 때 그 자녀에게 용기를 주고 담대히 말 할 수 있는 담력을 주셔서 여러 사람을 구하고 오히려 사람과 신뢰를 더 얻은 현대판 다니엘도 생겼다. 나는 이런 저런 생각도 못해 본 일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참으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함께 용서의 능력과 그 위대함을 체험해 보는 것이 절실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갑자기 당하면 일반적으로 먼저 상대방과 그 일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생긴다. 앞뒤를 계산해 볼 겨를 없이 반감이 앞서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자기 괴리감, 자기 모멸감, 열등감 등이 교차하면서 우리 마음에 쓴 뿌리로 깊이 자리 잡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상한 것이 큰 충격으로 본인 자신이 수용하고 넘어 가기가 쉽지가 않게 된다. 우리 주변에 보면 그동안 내가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존감은 매우 중요한 감정이지만 그 자존감의 바탕이 인간중심의 자존심이 되면 곤란하다. 내 중심의 자존심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귀한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내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내 안의 하나님의 말씀과 윤리대로 살려는 의지가 있을 때 그 자존감은 귀한 것이다. 그런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풍랑이 밀려와도 심한 비바람이 친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든든한 반석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난 어떤 여학생이 있었다. 그 딸은 친구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알고 보니 종종 정말 우스운 짓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웃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른 여학생이라면 생각도 못해 볼 일들도 척척 하면서 일이 되도록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하며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 엄마가 물었다. "넌 자존심도 없냐? 여자 애가 광대같이 그게 뭐야?" 그 딸아이는 엄마에게 "내가 좀 망가지면 어때? 나로 말미암아 일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지, 안 그래? 그 까짓 자존심쯤이야 뭐, 별거 아니더구먼. 내가 하나님 자녀인 것 모두 다 아는데 뭘......." 그 엄마는 딸아이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곤 "그래, 네가 엄마보다 낫다." 하고 말았단다.

우리 자녀들에게 이와 같이 거룩한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겉모습보다 속사람이 중요한 것을 인식하는 주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이 있을 때 그 아이는 어디를 가도 자기 능력을 발휘하며 소위 부모들이 말하는 기가 죽지 않는 아이로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거룩한 자존감은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그것을 실천할 때 생긴다. 내가 지은 많은 죄들을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모두 대속해 주신 사실을 깨닫고 절실히 감사함을 느낄 때 나에게 가해를 입힌 사람을 향한 용서도 생겨나게 된다. 자기 잘못을 보지 못하고 남에게만 손가락질 하고 핑계를 대고 비난하게 되면 그런 행위를 하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양심이 괴롭기 때문에 더욱 용서 할 수 없다는 정반대의 결론에 달하게 된다. 이런 공식이 나도 모르게 내 감정 안에서 성립되면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기가 힘들어 진다. 내가 편하기 위해선 상대방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진심으로 그 일에, 그 연루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항상 옳고 맞을 순 없는 것이다. 때로는 내가 잘못 판단할 때도 있고 잘 모르고 있을 때도 있음으로 난 항상 완벽하며 틀리는 일이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거나 내 의견이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고 기분 나빠 자존심 상해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나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없는 은혜로 용서 받은 우리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의 모습으로 나에게 작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할 줄 아는 용서와 관용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평강에 평강으로 임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후에 뒤돌아보면 해고당한 것이 오히려 복의 근원이 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더 잘 된 사람들도 내 주위에 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잠시 광야 같은 곳에 내쳐 진 기분이었지만 믿음을 회복하고 신앙으로 일어서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보내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살리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남을 용서함으로 나를 살리고 또 남도 살리며 용서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함으로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늘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참된 지혜가 아닌 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