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평가한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지만 그들이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 전에는 그들의 신앙은 능력이 없었다. 진정으로 초대교회가 능력있는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의 성령체험 때문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1885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선교는 많은 열매를 맺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것이었다. 당시에 사회가 불안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서양 종교의 힘에 의지하여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이런 순수하지 못한 신앙이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참된 복음적인 신앙으로 바꾸어진 것이 1907년 대부흥운동인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역 가눙데 한사람이 길선주장로이다. 1903년부터 이미 한국 땅에는 부흥의 불길이 불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이 부흥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하기 위하여 매년 신년초에 전국적으로 특별집회를 갖기로 작정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평양에서도 신년특별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는데 약 1500명이 모였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하였는데에도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선교사들은 이제 평상시로 돌아 가자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주일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로가 일어서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였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전에 내 친구 중 한사람이 임종시에 나를 자기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는 무능하기 때문이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중 미화 100불 상당의 금액을 나는 사취(詐取)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선주장로가 앞에 나오서 회개하자 그렇게 분위기를 억눌렀던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내어 놓고 회개하기 시작했던 그 주일밤 에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새벽 2시가 지나서도 끝나지 않았다. 이 집회에 직접 참석하였던 정익로 장로는 이날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날 밤 길선주 목사[1907년 가을에 목사안수를 받음]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는 얼굴이었다. 그는 길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원래 눈이 어두워서 나를 잘 보지 못하였을 것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 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에배당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돌아와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나타난다. 길선주장로의 회개는 1907년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 것을 싯점으로하여 길선주장로는 초기 한국교회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길선주장로의 보다 더 큰 위대함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 데 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회개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부설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