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을 읽어 보면서 보는 관점이 찬양의 관점에서는 잘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찬송을 부르셨을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면 과연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우리들의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하나님이시면서 낮은 자의 위치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내려오신 예수님이 생활 가운데 찬양은 과연 어떠하셨는가를 안다는 것은 교회 음악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님이 찬송을 부르셨는가?’ 의 질문에 대답은 당연 늘 찬미 하셨던 분이다.
특히 예수님은 시편을 많이 부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상당히 많은 시편 말씀이 인용 하셨으며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서도 추측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 21:16).라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은 시편을 읽으셨음을 알 수 있고 시편 독서는 그 당시 신앙 관습이라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 기도로 직고를 하실 때 시편을 많이 인용하셨다. (시8:2, 시118:22-23, 시118:26, 시110, 시6:4, 시 41:9, 시22:1, 시31:5)
예수님께서 어느 범위까지 시편을 노래로 하셨는지 관해서는 성경에 예를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노래를 부르시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14장 26절이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여기에서의 저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고 이들은 방금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부른 노래는 시편 115장에서 118장으로 추정 해석하곤 한다. 그 이유는 유월절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할렐(Hallel) 시편들의 두 번째 부분인 이 시편들을 부르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시편은 예수님의 찬양의 주제였고 찬양의 모습이었음을 명백히 말 할 수 있다.
시편은 그 당시 회당의 예배 의식에 사용되었는데 현재로 말하면 찬송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님은 분명 어느 곳에서든지 자신의 기도에서도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바리세인들을 향하여 강한 메시지를 전할 때에도 시편을 통하여 찬송, 찬미를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예배드릴 때에도 시편을 사용하셨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제자들과의 생활 가운데 찬미 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니라’ 라는 부분은 예배 의식의 순으로 보기 보다는 생활의 일부의 모습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의식 중의 찬양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생활의 일부로, 생활 가운데 찬양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이러한 생활 찬양은 바울과 실라의 옥중 찬양을 보면 더욱 알 수 있다.(행16:25)
신약 성경에서는 예배적 성격의 찬양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교회 음악, 예배음악의 규범 될 수 있는 에베소서 5장 19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에 보면 더더욱 예배 의식 찬양이기 보다 공동체 내에서 생활 찬양을 의미하고 있고 어떤 예배적 틀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여기에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고... 찬양하고”의 구절은 꼭 예배의 용어로서가 아니라 생활 가운데에 행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생활이 예배다 하는 의미로 해석 된다면 별 차이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고정 의식적, 예배 의식화 생각과 신앙관 보다 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찬미 하는 것,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고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강조해 볼 수 있기에 생활로 드리는 기도, 생활 속에 묵상 되는 말씀, 생활 가운데 부르는 찬양, 그것이 진정한 예배적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하겠다. 예배 의식 때 부르는 것만이 영적 찬양이고 생활 가운데 찬양하는 것은 일상 찬양이고 등등 어떠한 경계선을 뚜렷이 그을 수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늘 어느 곳에 있든지 시편으로, 입술로, 마음으로 여호와를 생각하며 그를 인정하고 높이는 그것이 진정 영적 찬양이며 신령한 노래가 아닐 가 싶다. 어떤 분들은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라 한다. 한나 처럼(삼상 2:1) 말이다.
기도는 예배 의식 속에서만 속해 있는 것이라고 누가 경계를 지을 수 있을까.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기도가 찬양이고 찬양이 기도이며 예배가 생활이고 생활이 예배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엇인가 구분해야 한다는 양면성을 주장 하지만 어떻게 보면 구분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예배의 음악’, ‘기도의 음악’, ‘생활의 음악’ 등으로 꼭 분리하여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편리상일 뿐이지 별 다른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찬양, 기도, 생활은 모두 동적이라는 것이며 완벽성을 가진 것이라기보다 부족하지만 늘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 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적 종교 행위보다 늘 일대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은 교재의 신앙관 그것을 찾을 때 역동적인 신앙 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시편을 많이 이용하셨는데 시편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내용이 기도이며 그 내용이 생활이며 그 내용이 찬양이다. 간절함과 애절함의 고백들이 가사의 문법화, 음악적 체계화 되어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는 회중 찬양이 되고 신앙의 공감대가 형성 되어 예수님을 이어 현재까지 신앙의 유산처럼 전해져 오고 지금도 많이 부르는 찬미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자.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때 예배 때 무슨 노래를 불렸느냐 보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힘든 이민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차를 몰고 출근 할 때 나의 생각과 입술에서 흥얼거리며 나오는 시편이, 찬양이 더욱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찬양교육상담 718-690-6068
어떤 면에서 우리들의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하나님이시면서 낮은 자의 위치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내려오신 예수님이 생활 가운데 찬양은 과연 어떠하셨는가를 안다는 것은 교회 음악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님이 찬송을 부르셨는가?’ 의 질문에 대답은 당연 늘 찬미 하셨던 분이다.
특히 예수님은 시편을 많이 부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상당히 많은 시편 말씀이 인용 하셨으며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서도 추측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 21:16).라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은 시편을 읽으셨음을 알 수 있고 시편 독서는 그 당시 신앙 관습이라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 기도로 직고를 하실 때 시편을 많이 인용하셨다. (시8:2, 시118:22-23, 시118:26, 시110, 시6:4, 시 41:9, 시22:1, 시31:5)
예수님께서 어느 범위까지 시편을 노래로 하셨는지 관해서는 성경에 예를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노래를 부르시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14장 26절이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여기에서의 저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고 이들은 방금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부른 노래는 시편 115장에서 118장으로 추정 해석하곤 한다. 그 이유는 유월절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할렐(Hallel) 시편들의 두 번째 부분인 이 시편들을 부르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시편은 예수님의 찬양의 주제였고 찬양의 모습이었음을 명백히 말 할 수 있다.
시편은 그 당시 회당의 예배 의식에 사용되었는데 현재로 말하면 찬송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님은 분명 어느 곳에서든지 자신의 기도에서도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바리세인들을 향하여 강한 메시지를 전할 때에도 시편을 통하여 찬송, 찬미를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예배드릴 때에도 시편을 사용하셨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제자들과의 생활 가운데 찬미 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니라’ 라는 부분은 예배 의식의 순으로 보기 보다는 생활의 일부의 모습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의식 중의 찬양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생활의 일부로, 생활 가운데 찬양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이러한 생활 찬양은 바울과 실라의 옥중 찬양을 보면 더욱 알 수 있다.(행16:25)
신약 성경에서는 예배적 성격의 찬양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교회 음악, 예배음악의 규범 될 수 있는 에베소서 5장 19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에 보면 더더욱 예배 의식 찬양이기 보다 공동체 내에서 생활 찬양을 의미하고 있고 어떤 예배적 틀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여기에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고... 찬양하고”의 구절은 꼭 예배의 용어로서가 아니라 생활 가운데에 행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생활이 예배다 하는 의미로 해석 된다면 별 차이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고정 의식적, 예배 의식화 생각과 신앙관 보다 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찬미 하는 것,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고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강조해 볼 수 있기에 생활로 드리는 기도, 생활 속에 묵상 되는 말씀, 생활 가운데 부르는 찬양, 그것이 진정한 예배적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하겠다. 예배 의식 때 부르는 것만이 영적 찬양이고 생활 가운데 찬양하는 것은 일상 찬양이고 등등 어떠한 경계선을 뚜렷이 그을 수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늘 어느 곳에 있든지 시편으로, 입술로, 마음으로 여호와를 생각하며 그를 인정하고 높이는 그것이 진정 영적 찬양이며 신령한 노래가 아닐 가 싶다. 어떤 분들은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라 한다. 한나 처럼(삼상 2:1) 말이다.
기도는 예배 의식 속에서만 속해 있는 것이라고 누가 경계를 지을 수 있을까.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기도가 찬양이고 찬양이 기도이며 예배가 생활이고 생활이 예배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엇인가 구분해야 한다는 양면성을 주장 하지만 어떻게 보면 구분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예배의 음악’, ‘기도의 음악’, ‘생활의 음악’ 등으로 꼭 분리하여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편리상일 뿐이지 별 다른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찬양, 기도, 생활은 모두 동적이라는 것이며 완벽성을 가진 것이라기보다 부족하지만 늘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 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적 종교 행위보다 늘 일대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은 교재의 신앙관 그것을 찾을 때 역동적인 신앙 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시편을 많이 이용하셨는데 시편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내용이 기도이며 그 내용이 생활이며 그 내용이 찬양이다. 간절함과 애절함의 고백들이 가사의 문법화, 음악적 체계화 되어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는 회중 찬양이 되고 신앙의 공감대가 형성 되어 예수님을 이어 현재까지 신앙의 유산처럼 전해져 오고 지금도 많이 부르는 찬미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자.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때 예배 때 무슨 노래를 불렸느냐 보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힘든 이민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차를 몰고 출근 할 때 나의 생각과 입술에서 흥얼거리며 나오는 시편이, 찬양이 더욱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찬양교육상담 718-690-6068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