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계가 주목한 북한인권국제대회, 나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 신라호텔을 찾았다. 북한인권대회에 참석한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교협) 회장 이정남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북한인권대회 참석차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정남 목사는 여느 때처럼 밝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이정남 목사를 처음 만났던 때는 2년여 전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 동안 우리는 쉽게 의기투합했다. 이 목사는 교협회장에 당선돼 한인교회들의 어려움들을 해결하느라 몹시도 마음고생이 심했고 나 역시 우리 신문의 LA지사인 기독교민신문에서 지사를 개척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어려운 때 함께 고민하고 기도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LA의 소식을 나누던 중 대화는 자연스레 북한인권문제로 넘어갔다. 북한의 봉수교회가 진짜냐 가짜냐는 논쟁이 한국에서는 인권문제와 함께 불붙고 있다고 말하자 이정남 목사가 갑자기 평양 사투리를 구사한다.
"내레 평양 출신이야. 분단 전 평양서 자랐어. 근데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이야. 거긴 교회 자체가 있을 수가 없다고 봐"
그는 봉수교회의 진위논쟁은 북한의 인권, 종교자유의 문제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이어갔다. 93년, 그는 남가주 교계에서 북한을 방문했던 기억을 더듬는다.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었지. 근데 교인들이 성경책도 못찾고 할렐루야란 말도 몰라. 앞에 앉은 내가 아멘이라고 하면 아멘이라고 따라 하는데 할렐루야라고 하니 웃더라고. 그걸 봉수교회 지도자가 보고 교인들을 위협하니 금새 조용해지던데. 교인들도 많이 졸고... 게다가 위치가 아무나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기억 상으론 차를 타고 산을 한참 갔던 거 같은데 일반인이 어떻게 가? 그것도 교회는 진짜 교회지. 예배 드리니까. 그러나 성도들이 공산당 간부의 가족, 친인척이라고 해"
봉수교회 진위 논쟁은 그 교회에 성령이 역사하시느냐의 문제인데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지하교회의 존재는 어떠한가?
"김국장, 탈북자들 만나 봤지? 지하교회 이야기 하는 사람 있던가?"
없었다. 탈북자들 중에 아직 북한 내의 지하교회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소련은 대문을 열었고 중국은 창문을 열어 개방했다고들 해. 교회에 대한 개방도 그렇지. 소련은 자유롭고, 중국은 창문을 열어서 기독교가 그 창문을 통해 들어오긴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바로 바로 약을 뿌리고 닫았다 열었다 하지. 그러니 지하교회 중 일부가 박해를 당하지만 삼자교회는 인정을 받을 수 있어. 그런데 북한은 소위 뭐라고 하냐면 개구멍도 없어. 기독교 자체가 못 들어간다고. 성경을 북한으로 보낸다고 하는데, 봉수교회로 가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 아직 중국에 묶여 있는 현실이야. 중국 내 탈북자들에겐 줄 수 있지. 그런데 북한엔 절대 못 가져 가"
현재 북한 내에선 성경이 불온 삐라처럼 인식되는데 그걸 당장 경찰서에 신고하지 누가 읽거나 소지하겠느냐는 말이다. 성경을 소지하다 적발되면 처형되고 가족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형편이다.
그래도 북한에 비밀리에 교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소문으로 반박했더니 이정남 목사는 바로 응수했다.
"내가 북한 갔을 때 온천에 갔어. 근데 온천이 한 3평도 채 안되는데 2명 밖에 못들어가게 돼 있더라고. 그래서 거기 사람을 불러서 '이걸 좀 넓혀서 여러 사람이 들어가서 쉬게 해 주면 안되냐'고 주문했더니 그 사람들이 '이 선생, 다 아시면서 왜 그러십네까? 우리가 물오리 입니까?'라고 핀잔을 주던 걸"
어떤 남한 대학생이 탈북자들에게 북한은 김정일 수령이 워낙 통치를 잘해서 데모가 안 일어난다고 했다가 탈북자들의 분노를 산 적이 있다. 북한에는 집회결사의 자유가 원천봉쇄 되어 있기 때문에 데모는 상상도 못한다. 데모를 모의하려고 모이는 순간 구금되고 고문과 형벌에 시달려야 한다.
이정남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93년 방문 당시 북한에서는 3인 이상의 모임이 불가했다. 2인까지 모이는 것은 괜찮지만 3인 이상이 모일 경우에는 반드시 지도자 동지 혹은 공산당 간부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다. 온천도 만약 3명 이상 들어가는 사이즈로 만든다면 사람이 들어갈 때마다 지도자 동지도 매번 온천욕을 해야 할 판이니 그게 물오리가 아니면 뭐겠는가?
강력한 억압정책으로 결사의 자유가 철저히 봉쇄된 북한에서 데모는 커녕 비밀리에 지하교회가 모이는 것도, 전도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3명 이상 모일 수도 없는데 어떻게 전도가 되고 모임이 되겠는가? 외부와는 철저히 격리돼 있고 혹시라도 북한 땅에 전파된 성경과 찬송가는 불온 삐라로 취급돼 고발의 대상이 되는데 전도나 지하교회가 가능할까? 이정남 목사는 "북한에는 지하교회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번 인권대회에 대해서도 이정남 목사는 '말할 것이 많다'고 했다. 사회운동가와 정치인들은 '인권'을 계속 말해야겠지만 기독교인들은 인권보다 '종교자유'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자유만 확보된다면 인권은 곧 이뤄질 거야. 교회가 가서 전도하고 부흥회도 하고 말씀도 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인권은 시간이 지나면 확립되지. 지금 기본적인 인권조차 말살된 그들, 인권에 대한 개념조차 상실한 그들에게 '인권'은 무슨 별나라에서나 온 말이지. 이해도 안 될 거야. 이번 대회 동안 기독교인들은 북한의 종교자유화에 힘을 모아야지"
그는 덧붙인다.
"콩고가 과거 자국민을 식민지화 했어. 자국민을 완전히 식민지인처럼 핍박했지. 북한은 뭐랄까? 자국민을 노예화했다고 할 수 있겠군. 생각도 표현도 할 수 없는 노예 말이야. 빨리 북한과 남한이 예수통일을 이뤄야지. 정치, 경제, 사상 다 떠나서 복음으로 한 통일 말이야"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우린 다시 헤어졌다. 북한의 봉수교회 논쟁이나 인권 문제는 북한에 있어서는 아직 너무 멀기만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지금 북한에는 생명과 진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정남 목사를 다시 만났을 때에는 북한문제도 많이 개선되어 좀 더 진일보한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
김준형 편집국장
이정남 목사를 처음 만났던 때는 2년여 전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 동안 우리는 쉽게 의기투합했다. 이 목사는 교협회장에 당선돼 한인교회들의 어려움들을 해결하느라 몹시도 마음고생이 심했고 나 역시 우리 신문의 LA지사인 기독교민신문에서 지사를 개척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어려운 때 함께 고민하고 기도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LA의 소식을 나누던 중 대화는 자연스레 북한인권문제로 넘어갔다. 북한의 봉수교회가 진짜냐 가짜냐는 논쟁이 한국에서는 인권문제와 함께 불붙고 있다고 말하자 이정남 목사가 갑자기 평양 사투리를 구사한다.
"내레 평양 출신이야. 분단 전 평양서 자랐어. 근데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이야. 거긴 교회 자체가 있을 수가 없다고 봐"
그는 봉수교회의 진위논쟁은 북한의 인권, 종교자유의 문제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이어갔다. 93년, 그는 남가주 교계에서 북한을 방문했던 기억을 더듬는다.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었지. 근데 교인들이 성경책도 못찾고 할렐루야란 말도 몰라. 앞에 앉은 내가 아멘이라고 하면 아멘이라고 따라 하는데 할렐루야라고 하니 웃더라고. 그걸 봉수교회 지도자가 보고 교인들을 위협하니 금새 조용해지던데. 교인들도 많이 졸고... 게다가 위치가 아무나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기억 상으론 차를 타고 산을 한참 갔던 거 같은데 일반인이 어떻게 가? 그것도 교회는 진짜 교회지. 예배 드리니까. 그러나 성도들이 공산당 간부의 가족, 친인척이라고 해"
봉수교회 진위 논쟁은 그 교회에 성령이 역사하시느냐의 문제인데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지하교회의 존재는 어떠한가?
"김국장, 탈북자들 만나 봤지? 지하교회 이야기 하는 사람 있던가?"
없었다. 탈북자들 중에 아직 북한 내의 지하교회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소련은 대문을 열었고 중국은 창문을 열어 개방했다고들 해. 교회에 대한 개방도 그렇지. 소련은 자유롭고, 중국은 창문을 열어서 기독교가 그 창문을 통해 들어오긴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바로 바로 약을 뿌리고 닫았다 열었다 하지. 그러니 지하교회 중 일부가 박해를 당하지만 삼자교회는 인정을 받을 수 있어. 그런데 북한은 소위 뭐라고 하냐면 개구멍도 없어. 기독교 자체가 못 들어간다고. 성경을 북한으로 보낸다고 하는데, 봉수교회로 가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 아직 중국에 묶여 있는 현실이야. 중국 내 탈북자들에겐 줄 수 있지. 그런데 북한엔 절대 못 가져 가"
현재 북한 내에선 성경이 불온 삐라처럼 인식되는데 그걸 당장 경찰서에 신고하지 누가 읽거나 소지하겠느냐는 말이다. 성경을 소지하다 적발되면 처형되고 가족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형편이다.
그래도 북한에 비밀리에 교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소문으로 반박했더니 이정남 목사는 바로 응수했다.
"내가 북한 갔을 때 온천에 갔어. 근데 온천이 한 3평도 채 안되는데 2명 밖에 못들어가게 돼 있더라고. 그래서 거기 사람을 불러서 '이걸 좀 넓혀서 여러 사람이 들어가서 쉬게 해 주면 안되냐'고 주문했더니 그 사람들이 '이 선생, 다 아시면서 왜 그러십네까? 우리가 물오리 입니까?'라고 핀잔을 주던 걸"
어떤 남한 대학생이 탈북자들에게 북한은 김정일 수령이 워낙 통치를 잘해서 데모가 안 일어난다고 했다가 탈북자들의 분노를 산 적이 있다. 북한에는 집회결사의 자유가 원천봉쇄 되어 있기 때문에 데모는 상상도 못한다. 데모를 모의하려고 모이는 순간 구금되고 고문과 형벌에 시달려야 한다.
이정남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93년 방문 당시 북한에서는 3인 이상의 모임이 불가했다. 2인까지 모이는 것은 괜찮지만 3인 이상이 모일 경우에는 반드시 지도자 동지 혹은 공산당 간부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다. 온천도 만약 3명 이상 들어가는 사이즈로 만든다면 사람이 들어갈 때마다 지도자 동지도 매번 온천욕을 해야 할 판이니 그게 물오리가 아니면 뭐겠는가?
강력한 억압정책으로 결사의 자유가 철저히 봉쇄된 북한에서 데모는 커녕 비밀리에 지하교회가 모이는 것도, 전도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3명 이상 모일 수도 없는데 어떻게 전도가 되고 모임이 되겠는가? 외부와는 철저히 격리돼 있고 혹시라도 북한 땅에 전파된 성경과 찬송가는 불온 삐라로 취급돼 고발의 대상이 되는데 전도나 지하교회가 가능할까? 이정남 목사는 "북한에는 지하교회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번 인권대회에 대해서도 이정남 목사는 '말할 것이 많다'고 했다. 사회운동가와 정치인들은 '인권'을 계속 말해야겠지만 기독교인들은 인권보다 '종교자유'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자유만 확보된다면 인권은 곧 이뤄질 거야. 교회가 가서 전도하고 부흥회도 하고 말씀도 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인권은 시간이 지나면 확립되지. 지금 기본적인 인권조차 말살된 그들, 인권에 대한 개념조차 상실한 그들에게 '인권'은 무슨 별나라에서나 온 말이지. 이해도 안 될 거야. 이번 대회 동안 기독교인들은 북한의 종교자유화에 힘을 모아야지"
그는 덧붙인다.
"콩고가 과거 자국민을 식민지화 했어. 자국민을 완전히 식민지인처럼 핍박했지. 북한은 뭐랄까? 자국민을 노예화했다고 할 수 있겠군. 생각도 표현도 할 수 없는 노예 말이야. 빨리 북한과 남한이 예수통일을 이뤄야지. 정치, 경제, 사상 다 떠나서 복음으로 한 통일 말이야"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우린 다시 헤어졌다. 북한의 봉수교회 논쟁이나 인권 문제는 북한에 있어서는 아직 너무 멀기만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지금 북한에는 생명과 진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정남 목사를 다시 만났을 때에는 북한문제도 많이 개선되어 좀 더 진일보한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
김준형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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