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란 수도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엣센파는 사막에서 말씀의 우물을 파서 시원하게 영생수를 마신 분들이다. 다메섹 문서를 보면 “하나님의 계명을 굳게 붙들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겨놓으시고, 이스라엘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왜 모든 이스라엘이 그릇하게 되었는지 감추어진 일들을 계시하였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들에게 열어 보여 주신다. 그들이 철철 넘치는 샘물을 파게하여 알게하셨다.

이 물을 경멸하는 자마다 살지 못할 것이다.(다메섹 문서 iii, 12-17).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광야에서 “족장들이 팟고, 백성들이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우물과” 같이(민21:18), 아론 중에 지각이 있는 자, 이스라엘 중에 지혜자를 일으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우물을 팠다. “이 우물은 율법이다. 그 우물을 판 이들은 이스라엘의 회개자들이요, 유다 땅에서 나와 다메섹(쿰란)에 이주한 이들이다. 그 우물을 판 지팡이는 율법을 구하는 자이다”(다메섹 문서vi.2-11)

여기에서 “율법(Torah)에 대하여 잠간 설명하려고 한다. 성경에서 (1)율법은 좁은 의미에서 어느 행동을 유지하는 법도로 생각한다. 물론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는 규례가 있다. (2) 율법을 율법책으로 알려진 모세 오경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모세 오경은 법도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나가시는지 말씀한다. (3) 율법책은 좁게는 모세 오경을 가르키는데, 모세 오경을 초월하여 구약성서 전체를 말한다. (4) 예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오,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에서(마5:17)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말한다.

같은 표현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40, 참조 마22:24-40). 그래서 쿰란의 공동체규정 제일 처음에 교단에 들어오려는 자들을 교육시키는 목표가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구하고, 하나님께서 모세와 그 모든 종들 예언자들의 손을 의탁하여 명하시고 그 앞에서 선하고 의로운 것을 행하고, 그가 택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가 경멸하는 모든 자를 미워하고 모든 악에서 떠나서 선한 일에 몰두하게 한다”고 한다(공동체 규정 i.1-5). 여기에 나오는 모세와 그의 모든 종 예언자들은 신약성서에서도 “율법과 선지자”로 부르는 구약성서 전체를 의미한다. 구약성서의 제 3부인 성문서는 주후 90년 이후에 얌니아에서 제정되었으므로 구약의 첫 두 부분 “율법서와 예언서”로 불렀다.

(5) 그러나 결코 “율법”이 좁은 의미에서 법조문이나, 또는 모세의 율법에서 좀 더 넓혀서 구약성서만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었으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였다. 쿰란의 엣센파는 주의 길을 예비하려고 (사40:3),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선포하신 율법을 공부하며 계시하시고 예언자들이 그의 거룩한 성결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려고” 하였다(공동체 규정 viii. 12-16). 사막에서 판 우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하여 샘이 솟아올라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계시를 받게 된다.

(6)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물들을 경멸하고서는 살지 못할 것이다”(다메섹 문서 iii. 17).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이니라”고 책망한다(렘7:13). 그리고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고 말한다(렘17:8, 참조 17:5-8). 학자들은 시편 1편이 예레미야 17장에 왔다고 믿는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 저는 시내 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입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2-3)라고 예레미야의 물가가 시편1편에서는 율법이 된다. 쿰란 수도원에서는 사막에서 율법의 샘물을 파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계속하여 교통을 갖는다.

유대고 전통에서는 어느 누구나 어느 종파라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부정하지 아니 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느냐는 문제이다. 쿰란이나, 신약성서에서 초대교회는 다 똑같이 새 언약의 백성으로 믿었다. 만일 유대교 전통에서는 어느 종파나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율법을 통하여 깨닫는다는 데에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오셨는데, 문제는 율법의 참 뜻이 무엇이냐는 문제로 기독교와 유대교로 갈라진다.

쿰란 종파와 율법과 관련하여 율법공부와 율법해석의 두 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 쿰란 수도원의 발굴에서 소개한대로 모든 건물과 시설은 많아야 150-200명 정도가 같이 생활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의 기본 단위가 10명이었는데(공동체 규정 vi.3), 그 중에 반드시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율법만 연구하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이 분이 제사장인지, 마스킬(maskil)이라고 부르는 레위인인지는 꼭 확인하기는 어렵다. 어째든 한 분이 쉬지 않고 밤낮으로 율법을 연구하여 10명으로 구성된 단원들을 가르쳤다. 또 하나 흥미 있는 것은 반을 3경으로 나누어 3명씩 교대로 철야로 율법서(성경)와 율법을 공부하고 읽고 같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공동체규정vi 3-8).

쿰란 교단의 율법과 관련하여 두 번째 소개하려는 것은 율법의 해석 문제이다. 레위기 18:13에서 이모와의 결합은 금지되었지만, 그러나 성경에는 삼촌 또는 외삼촌과 조카딸과의 관계는 언급이 없어서 바리새파에서는 이를 허용한다.(Babylonian Talmud Yebamoth 62B). 그러나 쿰란의 엣센파는 남자 입장에서만 이모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여자 입장에서 조카딸과의 결합도 금지한다고 해석한다(다메섹 문서 iv. 20-v. 11). 정일 규정인데 짐승이 안식일에 새끼를 낳아도 도우면 안되며, 가축이 물 저장소나 구덩이에 빠져도 끌어내면 안된다.(다메섹 문서 x. 13-14). 예수께서 안식일이라도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마12:11) 말씀과 큰 차이가 있다.

쿰란의 엣센파가 물이 없는 마른 사막에서 말씀의 샘을 파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마시려고 노력하고, 일반 유대인의 완악함과 거짓에서 벗어나서 말씀대로 살려고 애쓴 것은 우리가 배워서 할 것이다. 그러나 율법 이해나 해석에 있어서 극히 제한되어 예수와 바울의 입장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한계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와 같이 율법을 완성하여 율법의 마침이 될 수는 없었다.

권오현 박사(뉴욕신학대학 및 대학원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