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2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화해를 위한 대화의 장을 모색하는 가운데 강원용 목사(평화포럼 이사장)에 이어 고범서 교수(한림과학원 석좌교수, 기독교윤리학)를 만나 대화의 진정한 가치와 한국교회가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대화의 자세에 관해 들어보았다-편집자주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지역간, 계층간 파벌갈등이 사회 곳곳에 침투해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특히 교파간의 갈등으로 분열의 아픔을 겪어온 한국교회 내에서의 대화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제는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봐도 대화가 필요하다. 여당과 야당, 고용인과 피고용인, 지방과 지방, 세대와 세대, 계층 간에 대화는 물론, 남녀 모두에게도 대화와 화해가 필요한 시대라고 본다.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사회가 급속도로 분화되어 복잡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복잡성은 각 분야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다.둘째는 자신의 관계에 맞게 분열되기 때문에 각자가 개인적인 권리나 이해관계를 성취하길 원한다.

예를 들면 사회의 습관이나 전통을 따라 살기쉬운 부류는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이다. 반면,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된 손익 계산이 빠르다. 자기에게로 관심을 돌리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한국의 미래, 인류의 미래도 결국 이해관계의 충돌이 필연적이고 합의와 조화가 필요한 시대로 가까이 와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개개인들만이 빛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함께하는 교회의 역사도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나 대화란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속에서 대화란 말을 참 많이 쓰지만 대화라기 보단 타협에 가까운 일들이 많다. 더군다나 정치문제에 있어서는 이해관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사회는 대화의 모범을 보여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나는 그 기관이 바로 교회라고 보고 있다. 상호 이해관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회들이 앞장서서 대화를 통해 화해를 이뤄내야 한다.

우선은 교회가 대화하고 연합해야 사회의 공동선을 이룰수가 있다. 인간이 복잡하기에 신앙도 다소 차이가 날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의 연합은 궁극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절실히 필요한 때에 와있다.”

▲고범서 교수는 대화의 본질은 공동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기독교의 '겸손'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설명했다. ⓒ 김근영 기자
-대화의 가치와 지향하는 바에 대해선 모두들 공감하지만 막상 입장의 차이가 첨예한 개인이나 단체사이에 대화의 물꼬를 튼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에 앞서 우리는 대화(dialogue)와 협상(negotiation)이란 말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대화, 대화' 하지만 대화란 말을 '협상'이란 말과 곧잘 혼동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생전에 교의학에 관한 책을 12권이나 썼지만 모두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그 첫번째 이유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지 못해서였다"는 것이였다.

사고라는 것은 절대 혼자할 수 없다. 선생이 학생의 질문 속에서 배우듯이 상담을 통해 자극을 받고 도전을 받아야 가능하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대화란 공동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복잡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협상이지 대화라고 할수 는 없다. 그리고 진리란 혼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화가 추구해야 할 단초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그 유명한 대화를 보자. 그들의 대화의 시작은 전혀 코드가 안맞는 대화였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네게 준다"고 말씀하시자 그 여인은 '다시는 물을 길르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기뻐하지 않았는가.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의사소통의 철학을 보면 "진리는 두 사람에서 시작한다"는 말과 "싸움은 사랑하는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무기를 넘겨준다"는 말이 나온다. 칼 야스퍼스가 말한 "신은 간접적으로 자기를 나타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싸움'이란 말은 서로가 진리를 발견하고자 돕고 아끼고 격려하는 싸움을 의미한다. '내 무기까지도 가져가란 말'은 결국 자기의 독단과 방어를 내려놓고 함께 진리를 찾으라는 것이다.

'신은 왜 간접적으로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하는 것만이 의사소통은 아니라는 것이다. 묵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사람의 말속에 하나님의 말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나를 비판하는 그 말속에서 희미하고 가는 하나의 소리,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간에 서로가 하는 말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그것을 듣진 못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대화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주고 받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도 교계안에서의 대화의 시작도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볼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진리를 깨우쳐주려는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수없다.”

-대화와 화해의 선봉에 교회가 서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한국교계의 큰 하나됨을 이뤄가고자 한다면 어떠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위르겐 하버마스(Jorgen Habermas)가 제시한 이상적인 담론의 상황(ideal speech situantion)을 갖춰야 한다. 이 상황을 구성하는 법칙은 먼저 각 사람은 어떠한 제의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사람이 한 말이니까 (대화나 토론은)안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외부의 강제성, 이를 테면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교회와 교회간에 대화를 살펴본다면 대화의 덕목중에 추가해야 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기독교가 말하는 '겸손'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자신의 무지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나 이말도 기독교의 '겸손'에는 미치지 못한다.

"인간은 분명 신이 아니다. 인간의 판단과 시각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다. 지리적 역사적 차이를 비롯해 개인의 사회적 위치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편견과 이기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 하버마스의 지적에 본인도 동의한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vuher)는 이러한 편견과 이기심을 '이데올로기적 오염(ideological taint)'이라고 말했다. 보수와 진보, 지방색과 여권 신장의 운동등도 모두가 이 '이데올로기적 오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로마서 3장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사도는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오만과 독선은 이같이 상대적 인간이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대적인 인간이 자기를 신(神)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신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오만과 독선을 가진 바리새인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겸손을 모르는 인간이 신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만이 '사랑하는 싸움'을 통하여 진리를 함께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탐구해간 진리 역시도 상대성을 면치 못한다. 인간은 진리로 향하는 도상위에 있는 것이지 진리 자체에 도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버마스의 예리한 지적이기도 하다.

▲고범서 교수는 바리새인의 교만죄를 지적하며 한국교회가 부분적인 인간의 진리로 오만과 독선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 김근영 기자
대화란 어느 한쪽편의 승리가 아니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주고 받는 것이다. 교계안에서의 대화도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볼수 있다.'사랑하는 싸움'에 의한 진리의 발견. 이것이 참된 의미의 대화요, 거기에 진정한 화해가 깃들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의 대화와 화해에 가장 큰 걸림돌은 자기 아집과 독선이라 볼수있는가. 그밖에 다른 걸림돌은 어떤 것을 들수 있나.

“종교적 심벌(symbol)과 신화(myth)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고 본다.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남긴 말 중에는 '신앙의 언어는 심벌들의 언어다"라는 말이 있다. 국기를 예로 들어보자. 국기는 하나의 천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애국심'이라든지 '국가'라는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심벌(symbol)이 될수가 있는것이다.

이 심벌들로 구성하여 이야기가 될때 이것을 신화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신화에도 신화이지만 초월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깨어지지 않는 신화(unbroken myth)가 있는 반면에 깨진 신화(broken myth)가 있다.

천동설과 지동설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전까지는 성경의 우주관을 그대로 믿고 천동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성경의 말에 담긴 신화적인 의미를 해석해내지 못하고 역사적인 사실이나 과학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미신으로 전락해 버린다.

21세기에 말하는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의 종교개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폴 틸리히(Paul tilich)또한 '신화가 없는 종교는 있을수 없다'고 말했다. 즉 온고이지신(溫故以知新)이란 말처럼 신앙의 역동성을 잃지않기 위한 전통의 종교적인 계승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천동설과 같은 '깨어지는 신화'가 아닌 '깨어지지 않는 신화'와 전통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위해서는 기독교 안에서의 대화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대화라는 것은 교회안에만 갇히지 않고 세상속으로 확장되어 갈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세상에 보여야할 대화의 모본(母本)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건넨 말씀은 당시에 정말 충격적인 말들이다. 바리새인들이 "왜 안식일을 왜 범하느냐"고 말하자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깨뜨려 버리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도 빌라도도 그 진리를 들을뻔 했지만 결국은 부정하지 않았는가.

인간에게는 여러 한계점이 존재한다. 능력의 차이, 이해의 차이, 권력의 차이, 지역과 성별의 차이등 셀수 없는 입장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 이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분적일수밖에 없는 지를 알게한다. 자기가 온전하다, 절대적이다 하는 편견에 사로잡힐 위험성을 우리또한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오염(ideological taint)이 바로 공산주의 막시즘이 아니였나.

성경에서 말하듯이 세리와 죄인이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는 말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상대적으로 월등하게 윤리적인 바리새인이 왜 이런 책망을 받았겠는가. 로마의 통치하에 세금걷는 앞잡이와 몸을 파는 창기였지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그들은 분명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정작 자신들의 안다하는 그 교만죄(the sin of pride)를 바로 보지 못했다. 대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겸손'이다. 한국의 진보수계도 이 덕목을 잊지말고 대화에 임해야 할 것이다.”